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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장아이링 장편소설『적지지련(赤地之戀)』

by 언덕에서 2016. 1. 18.

 

장아이링 장편소설『적지지련(赤地之戀)』

 

 

 

중국 작가 장아이링(張愛玲, 张煐, Zhang Ailing, Eileen Chang, 1920~1995)의 장편소설로 195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적지지련』의 적지(赤地)는, 사전적으로는 ‘가뭄이나 병충해로 황폐화된 땅’이지만 ‘적화(赤化)된(공산화 된) 땅’을 빗댄 표현으로도 보인다. 장아이링은 영화 <색·계>의 원작소설을 쓴 작가로도 유명하다.

 루쉰과 함께 중국 현대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작가 장아이링의 『적지지련(赤地之戀)』은 1945년 공산정권에 들어서면서 몇몇 작품에서 공산주의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정치적인 측면에서 '호불호'가 갈리게 된다. 그러나 미국으로 망명한 장아이링이 그곳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 한 후, 1980년대 들어 대륙의 정치 상황이 달라지면서 그녀의 작품이 다시 재조명되었다. 장아이링의 대부분 작품들이 해금되었으나 유독 『적지지련』만은 2000년대 초반까지 금서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장아일링은 1943년 잡지에 <침향의 재, 첫 번째 향>을 연재하며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시기 중국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한창 항일전쟁을 벌이던 때였다. 일본이 패망한 뒤에는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내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던 시기다. 당연히 중국의 문단도 전쟁과 민족, 혁명과 같은 거대한 주제에 매몰되게 된다. 그런 문단 분위기에서 장아이링은 ‘이단아’ 같은 존재였다. 그녀의 소설들은 주로 평범한 사람들이 혁명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겪어야 했던 소외된 삶과 사랑을 그렸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베이징대학을 갓 졸업한 류취안은 대학생 토지개혁단의 일원으로 시골마을에 파견된다. 류취안은 동료 개혁단원인 황쥐안이라는 여학생을 만나 호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엄숙한 공작’을 수행하는 중이라 그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토지개혁 활동에만 전념한다. 그러나 대지주의 땅을 빈농에게 재분배하는 토지개혁운동은 당초 목적과는 달리 당 지도부의 부패와 치부 수단으로 변질돼 버린다. 또한 자신의 안위를 위해 이웃을 고발하고 고문, 살해하는 일도 빈발한다. ‘불현듯 모든 이론이 다 헛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현실이란 기껏해야 사람을 죽여 놓고 그 물건을 나눠주는 것이 아닌가. 류취안과 함께 내려온 동료 대학생들도 물들기 시작한다. 오로지 황쥐안에 대한 사랑만으로 버텨오던 류취안은 당의 명령으로 갑작스럽게 상하이 당 기관지 ‘해방일보’로 파견된다. 류취안은 그곳에서 미모의 여자 간부인 거산을 만난다.

 류취안과 거산의 관계가 깊어질 즈음, 황쥐안이 발령을 받아 상하이로 온다. 위태로운 삼각관계에 처한 류취안은 결국 황쥐안과의 사랑을 선택하고 거산과의 관계를 끝내기로 한다. 그러던 중 류취안은 신문사 내부 횡령사건에 연루됐다는 누명을 쓰고 공안국에 체포된다. 다급해진 황쥐안은 거산에게 도움을 청한다. 거산의 중재로 황쥐안이 당 지도부의 ‘첩실’로 가고 류취안은 풀려난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류취안은 절망감을 견디지 못하고 사지(死地)인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한국전 참전 중 부상을 입어 남한의 병사들에게 구해져 포로병원에 있다가 이후 포로수용소에 있던 그는 ‘반공 포로’ 생활을 하다가 대만과 본토 중 어느 곳으로 갈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산당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예징쿠이는 대만 행을 택하지만, 류취안은 목숨을 걸고 중국에 돌아갈 것을 택하는데서 소설은 끝난다.

 

1954년 홍콩 거주 때의 장아이링 

 

 

 장아이링이라는 작가는 몰라도 이 작가가 쓴 <색, 계>라는 중국 소설을 모르는 이는 드물 듯하다. 소설 <색, 계>는 영화화 되면서 더 유명해졌고, 영화의 여주인공은 한국의 젊은 영화감독과 결혼하면서 한국인들에게 친근한 이가 되고 말았다.

 『적지지련』은 인민정부의 사회주의 혁명과 토지개혁이라는 민감한 주제를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그 시대를 걸머지고 묵묵히 나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사랑과 갈등을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그려냈다. 특이하게 눈길이 가는 장면이 있다. 남한의 병사들 손에 구해져 포로병원을 거쳐 포로수용소에 갇히면서까지 포로들이 겪었을 상황에 대한 조바심은 형언하기 어렵다. 제3국으로 가야하는가, 아니면 다리는 잘려도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가. 이 부분에서 겹치는 다른 작품이 있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 그것이다.  

 전반적으로 역사 속에서 자신들의 뜻과는 다르게 어려운 사랑을 하는 남녀 이야기가 주를 이룰 것이란 생각과는 달리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한국전에 자원한 류취안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어서 황쥐안과 거산의 그 이후의 이야기들은 흐지부지 없어져버린 부분이 아쉽게 남는다.

 혁명의 이상과는 달리 시행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불합리하며 잔인한 일들이 많이 벌어진다. 혁명이란 이름 하에 많은 사람들이 파렴치한 죄인이 되고, 이웃을 도륙하는 흉악범이 된다. 이런 모습들은 기존 문혁 때를 다룬 소설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E.H 카의 표현과 같이 역사란 반복되는 것이며, 인간의 본성도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전쟁 당시의 연합군이 선량하게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적이라도 일단 전쟁터에 쓰러져 있으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치료해주는 장면 등이 그렇다. 이 작품이 미국 공보처 지원 하에 만들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장아이링이 공산당의 토지개혁에 참가한 경험이 있다는 증언이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는 듯하다.  이 작품은 1949년부터 1953년 사이의 중국 역사의 이면을 보여주고 있다.

 

 

 장아이링은 『적지지련』에 붙인 서문에서 소설이 ‘실제 인물들이 실제로 겪었던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작가가 토지개혁에 참가한 적도 없고 농촌생활과 한국전쟁에 대한 경험도 거의 없다는 점을 들어 사실적이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소외된 사람들의 삶과 사랑을 그린다’는 장아이링의 다른 소설과 별 다를 게 없다.

 소설가이자 산문가, 영화작가인 장아이링은 1920년 중국 상하이에서 명문 집안의 딸로 태어났다. 조부는 청나라 관료였고 조모는 청 말기 양무운동을 주도한 리훙장(李鴻章)의 딸이었지만, 두 살 때 어머니의 유럽행 유학을 시작으로 부모의 이혼, 계모와의 불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겪었다. 1938년 런던대에 1등으로 합격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유학을 포기하고 홍콩대에 입학한다. 하지만 1941년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이듬해 상하이로 돌아와 <첫 번째 향로(第一香爐)><경성지련(傾城之戀)><붉은 장미와 흰 장미> 등의 작품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944년 장아이링은 친일파 관료에 나이차도 많이 나는 후란청(胡蘭成)과 결혼해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후란청과의 관계가 소설 <색, 계>의 소재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면서 1947년 그녀의 짧은 결혼생활은 끝이 났다. 희대의 바람둥이였던 후란청이 친일파 숙청을 교묘히 피해가면서 무수한 여자들과 동거를 한 것이 장아이링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장아이링은 1952년 홍콩을 거쳐 1955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1956년에 미국인과 재혼했지만 1967년 남편과 사별하고, 이후 줄곧 혼자서 살다 1995년 9월 미국 LA의 한 아파트에서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최근에 타이완 여행기를 담은 그녀의 유작 <충팡볜청(重訪邊城)>이 공개되어 또 한 번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