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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현대소설

뒤마 장편소설 『춘희(椿姬.La dame aux Camelias)』

by 언덕에서 2015. 12. 30.

  

 

 

 

뒤마 장편소설춘희(椿姬.La dame aux Camelias)   

  

프랑스 소설가·극작가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1802∼1870)의 장편소설로 1848년 발표되었다. 원 제목은 ‘동백꽃을 들고 있는 부인’이며 ‘춘희’는 여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의 별명이다.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은 그녀가 극장에 갈 때마다 동백꽃을 한 아름 들고 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한 달 중 25일 간은 흰 동백꽃을, 5일 간은 빨간 동백꽃을 들고 나타나는데, 소설 내용에서는 그 내용을 잘 모르겠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빨간 동백꽃을 들고 오는 5일 동안이 자신의 월경기간임을 암시하는 듯하다.

『춘희』의 모델은 파리의 고급 창녀였던 ‘마리 뒤 프레시스’라는 실존 인물로 미모와 기품 있는 태도로 유명했다고 전한다. 뒤마는 18세 때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리지만, 처음에는 수줍어 말도 못 걸다가 나중에 친구가 된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졌는데, 창작 활동에만 열중하던 뒤마는 뒤늦게 그녀의 죽음을 듣게 된다.

 소설의 이야기는 아름답고 낭만적이지만 사회문제에 커다란 관심을 표한 작품이다. 소설의 호평에 힘입어 작자는 이것을 5막의 희곡으로 각색, 1852년 상연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뒤마는 소설가로서보다도 오히려 극작가로서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다. 이 작품을 피아베 작시, 베르디 작곡에 의해 오페라1 <라트라비아타>로 개작, 세계적인 선풍을 일으켰다(1853). 한국에서는 1937년 신극단 '중앙무대'가 이를 처음 공연했다2.

 

마리 뒤플레시스☜( Marie Duplessis, 1824~1847)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 마르그리트 고티에는 화려하게 몸을 치장하고 한 달의 25일간은 흰 동백꽃, 나머지 5일간은 빨간 동백꽃을 들고 극장이나 사교계에 나타나며 언제나 귀부인처럼 생활한다. 이는 그녀가 몸을 판 대가였다. 미모의 고급 창녀인 그녀에게 양가의 자제인 순진한 청년 아르망 뒤발이 나타난다. 그는 그녀에게 정열적인 사랑을 바쳤고, 그녀는 그로부터 처음으로 참된 사랑을 발견한다. 그리고 둘은 서로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하고 파리 교외의 아담한 보금자리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수입원이 막히고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그녀에게 때마침 아르망의 아버지가 찾아와 아르망과의 관계를 끊을 것을 강요한다. 그녀는 자신을 희생시켜 아르망과 헤어지는 것만이 진실로 그를 사랑하는 것이며 그를 살리는 길이라 깨닫고 아르망과 관계를 끊겠다고 약속한다. 그녀가 다시 파리에서 그 전과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을 본 아르망은 마음이 변한 그녀에게 행패를 부리고 여행길에 나선다. 한편 실의와 체념 속에서 폐병이 악화되어 그녀는 사경에 이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르망의 아버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아들에게 그간의 경위를 이야기한다. 진상을 안 아르망은 그녀에게 달려가나 그녀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오페라 <춘희> 공연 장면

 

 이 소설을 쓴 알렉산드르 뒤마 피스는 『몽테크리스트 백작』으로 너무나 유명한 알렉산드로 뒤마의 아들이다. 부자의 이름이 똑같아서 아버지를 뒤마 페르, 아들을 뒤마 피스라고 부르며, 대 뒤마 소 뒤마로 부르기도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아르망은 뒤마 피스 자신이요, 마르그리트는 뒤마 피스가 사랑했던 '마리 뒤프레시'라는 고급 콜걸로 알려져 있다.

 뒤마 피스는 1824년 디마 페르의 사생아로 태어났는데 어머니 카트린느는 남자에게 버림받은 후 평생을 홀로 살다 아들을 키웠다. 이후 그녀는 뒤마 피스가 중학교에 갈 즈음에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빼앗기고야 만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원망하지도 않고 묵묵히 외로운 삶을 견뎠다고 한다. 이와 같은 성장배경을 가진 뒤마 피스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연약한 여자들의 입장을 옹호하고 학대받는 하층계급 사람들의 처지를 고발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창부인 마르그리트와 청년 아르망이 서로 사랑하면서도 가문과 명예, 체면 등에 얽매어 헤어져야 하는 비극적 사랑과, 결국에는 마르그리트가 세상을 떠나는 슬픈 이야기로 엮어지고 있다. 마르그리트는 창부이면서도 결코 더렵혀지지 않은 순정을 지니고 있으며, 진실한 사랑에 눈을 뜨자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그 사랑을 위해 살려는 여인이다. 이런 여인의 절대적인 사랑의 모습은 대중에게 깊은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1970년대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대학생 애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술집여자 이야기가 봇물을 이루던 현상도 이 소설의 영향 탓이 아닌가 한다.

 이 작품의 배경은 19세기 전반기, 제2제정시대의 파리를 무대로 하여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상류사회 귀족들의 풍속을 무대로 하고 있다. 특히 마르그리트는 당시 파리에서 명성이 높았던 창부 '마리 뒤 프레시스‘를 모델로 했는데 작가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때 작가의 나이는 24세, 그리고 '마리 뒤프레시'의 나이는 22세였다.

 

 

 진실한 사랑을 못 이루어서 불쌍하기도 하지만, 소설의 모델이 되었던 실제 주인공인 마리라는 여인의 생애는 너무나 불행한 인생이었다. 그녀는 열 살 때 수프를 얻어먹기 위해 처녀성을 팔아버릴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그녀의 가족들은 염소우리 속에서 염소와 같이 지낼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그래서 그녀는 열두 살 때 맨발에 넝마를 걸치고 파리로 온다. 글이라곤 쓸 줄 모르고 평생 목욕탕에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얼마 안 가서 자신이 남자들에게 호감을 주는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로부터 급속히 연애수업을 배워서 차츰 부자 애인들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는 겨우 2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은 지 이미 15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몽마르트르의 생 샤르르 묘역에 있는 마리 뒤프레시의 묘지에는 많은 참배객에 의해 헌화되는 희고 붉은 동백꽃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남들에게 축복받는 당당한 사랑이 있는가 하면 이룰 수 없는 비련의 사랑이 있다. 그래서 결혼으로 도달하는 사랑보다는 미완이나 불륜의 사랑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연유로 작가는 여주인공을 죽여버리거나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누구나 겉으로는 사랑의 완성을 원하지만 잠재적인 심리 가운데서는 사랑의 끝남, 사랑의 파괴를 원하는 묘한 심리가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심리가 『춘희』를 영원한 명작으로 만들었고 마르그리트를 구원의 여인상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마리 뒤플레시스 :

 프랑스 소설가 뒤마의 작품 <춘희>의 모델이 되었던 고급 창부로, 본명은 Alphonsine Plessis. 노르망디 지방에서 빈농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13살 때 영주의 아들에게 능욕당한 뒤 집시 무리와 함께 파리로 간다. 3년 뒤 파리에서 고급창부사회의 여왕이 된 그녀는 상류 각계의 명사들을 단골로 삼아 매우 사치스런 생활을 한다. 가늘고 부드러운 팔과 다리, 우아한 코, 숱 많은 검은 머리에 매료된 사나이들 중에는 전재산을 탕진한 사람도 많았다 한다. 뒤마, 쇼팽, 리스트 등의 예술가들도 그녀를 찬미했는데, 특히 뒤마는 그의 소설 <춘희>를 통해 고급창녀인 '마리 뒤플레시스'를 '마르그리트 고띠에'라는 숭고한 희생자로 탈바꿈시켜 버린다.

 

 

 

☞오페라 춘희 :

 베르디가 만든 오페라 '춘희'는 3막으로 되어 있는 연주시간이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오페라이고 24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베르디는 이태리의 대표적인 오페라 작곡가로 이 곡외에 [나부코], [리골렛토], [아이다], [일 트로바토레], [운명의 힘]등의 작품들이 있다. 파리의 사교계에서 염명(艶名)이 높았던 마리 뒤 프레시라는 실재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24세의 다정다감한 청년 뒤마 퓌스(삼총사로 유명한 대 뒤마의 아들 소뒤마)가 통렬하게 사회 비평을 한 소설 [트라비아타]는 1848년 발표되자마자 많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 소설을 읽은 베르디(Giuseppe Fortunio Francesco Verdi 1813-1901)는 이 작품이야 말로 평소 그가 찾고 있던 소재라고 생각하고 창작 의욕이 샘솟아 [리골렛토](1851년)의 각본을 썼던 프란체스코 M. 피아베에게 오페라 대본을 의뢰하고 베네치아의 페니체극장과 계약을 맺은 후 불과 1개월 반 만에 전곡을 완성하였다.

 초연은 1853년 3월 6일에 페니체극장에서 이루어 졌는데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다. 그 원인은 주역인 비올레타역을 맡은 가수가 너무 살이 많이 쪘으며 파리 사교계의 소재가 이탈리아에서는 생소하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공연 당시 의 사건을 다룬 오페라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연시에는 [비올레타]를 닮은 아름답고 가냘픈 여성을 주연으로 삼고 시대도 1700년대로 거슬러 올려 시대적 배경을 설정하여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르디하면 곧 트라비아타를 연상할 만큼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오페라가 되었다.

 그러나 베르디가 처음에 의도하였던 현실을 직관하고 음악과 드라마가 격렬하게 서로 부딪쳐 하나가 되어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했던 이 청순한 오페라는, 그의 뜻과 달리 아름다운 선율만을 강조한 경박한 미남미녀의 비련물(悲戀物)이 되어 인습의 먼지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트라비아타]는 매춘부, 금권 결혼, 황금만능의 세 가지 악의 꽃이 어지럽게 피고 있던 당시의 파리에 도미 몽드(고급 창녀)의 세계에 들어와서 헤매는 춘희 비올레타가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이 오페라는 그녀를 끝까지 사랑하는 알프레도를 통하여,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고 자기 자식밖에 생각하지 않는 제르몽와 쾌락주의에 몸을 맡기고 놀기만 하는 파리 사교계의 신사 숙녀의 모습을 통하여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가?], [남녀의 본질을 무엇인가?], [모럴(moral)이란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다.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 공연 :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椿姬)’는 1948년 1월16일 명동 시공관에서 초연됐다. 의사이자 성악가였던 이인선이 제작·번역·남자주인공의 1인3역을 소화했고, ‘한국 오페라의 대모’ 김자경이 마금희와 함께 여자주인공 ‘비올레타’역을 맡아 한국최초의 ‘프리마돈나(prima donna)’가 됐다. 연출은 서항석, 지휘와 연주는 임원식과 고려교향악단이 맡았다.

 5일동안 전회(10회) 매진을 기록하며 무성한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제작자가 ‘숫자’에 밝지 않다보니 집과 피아노를 처분해야 했다.

 한번 ‘춘희’는 ‘영원한 춘희’였다. 김자경이 오페라에 눈을 뜬 것도 ‘춘희’였고, 그가 1968년 창단한 ‘김자경오페라단’이 첫 작품으로 올리고, 김자경이 세상을 뜨기 석달 전 마지막으로 공연한 것도 ‘춘희’였다. 김자경은 자서전에서 “‘춘희’가 이어준 오페라와의 인연으로 오페라에 살고 죽는 ‘오생(生) 오사(死)’ 인생을 살았고, ‘오씨 성에 이름이 페라’인 오서방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알렉산더 뒤마의 소설을 원작으로 베르디가 오페라로 만든 ‘라 트라비아타’는 이탈리아어로 ‘엇나간 여자’라는 뜻. 일본인이 ‘춘희’라 의역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따르면서 이땅에도 ‘춘희’란 이름이 정착됐다. ‘라 트라비아타’가 초연된 것은 1853년 3월6일 베네치아에서였다. 초연에서는 주연 배우가 극중 인물과 어울리지 않아 실패했으나 이듬해 5월 6일 재공연에서는 대성공을 거두며 비제의 '카르멘'과 함께 공연 횟수가 가장 많은 오페라로 기록됐다.

 

 

  1. 오페라 춘희 :베르디가 만든 오페라 '춘희'는 3막으로 되어 있는 연주시간이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되는 오페라이고 24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베르디는 이태리의 대표적인 오페라 작곡가로 이 곡외에 [나부코], [리골렛토], [아이다], [일 트로바토레], [운명의 힘]등의 작품들이 있다. 파리의 사교계에서 염명(艶名)이 높았던 마리 뒤 프레시라는 실재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고, 24세의 다정다감한 청년 뒤마 퓌스(삼총사로 유명한 대 뒤마의 아들 소뒤마)가 통렬하게 사회 비평을 한 소설 [트라비아타]는 1848년 발표되자마자 많은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이 소설을 읽은 베르디(Giuseppe Fortunio Francesco Verdi 1813-1901)는 이 작품이야 말로 평소 그가 찾고 있던 소재라고 생각하고 창작 의욕이 샘솟아 [리골렛토](1851년)의 각본을 썼던 프란체스코 M. 피아베에게 오페라 대본을 의뢰하고 베네치아의 페니체극장과 계약을 맺은 후 불과 1개월 반 만에 전곡을 완성하였다. 초연은 1853년 3월 6일에 페니체극장에서 이루어 졌는데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다. 그 원인은 주역인 비올레타역을 맡은 가수가 너무 살이 많이 쪘으며 파리 사교계의 소재가 이탈리아에서는 생소하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로는 공연 당시 의 사건을 다룬 오페라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연시에는 [비올레타]를 닮은 아름답고 가냘픈 여성을 주연으로 삼고 시대도 1700년대로 거슬러 올려 시대적 배경을 설정하여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베르디하면 곧 트라비아타를 연상할 만큼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오페라가 되었다. 그러나 베르디가 처음에 의도하였던 현실을 직관하고 음악과 드라마가 격렬하게 서로 부딪쳐 하나가 되어 인간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했던 이 청순한 오페라는, 그의 뜻과 달리 아름다운 선율만을 강조한 경박한 미남미녀의 비련물(悲戀物)이 되어 인습의 먼지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트라비아타]는 매춘부, 금권 결혼, 황금만능의 세 가지 악의 꽃이 어지럽게 피고 있던 당시의 파리에 도미 몽드(고급 창녀)의 세계에 들어와서 헤매는 춘희 비올레타가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이 오페라는 그녀를 끝까지 사랑하는 알프레도를 통하여, 남의 이목을 두려워하고 자기 자식밖에 생각하지 않는 제르몽와 쾌락주의에 몸을 맡기고 놀기만 하는 파리 사교계의 신사 숙녀의 모습을 통하여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가?], [남녀의 본질을 무엇인가?], [모럴(moral)이란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다. [본문으로]
  2.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 공연 : 한국 최초의 오페라 ‘춘희(椿姬)’는 1948년 1월16일 명동 시공관에서 초연됐다. 의사이자 성악가였던 이인선이 제작·번역·남자주인공의 1인3역을 소화했고, ‘한국 오페라의 대모’ 김자경이 마금희와 함께 여자주인공 ‘비올레타’역을 맡아 한국최초의 ‘프리마 돈나(prima donna)’가 됐다. 연출은 서항석, 지휘와 연주는 임원식과 고려교향악단이 맡았다. 5일동안 전회(10회) 매진을 기록하며 무성한 화제를 불러일으켰지만 제작자가 ‘숫자’에 밝지 않다보니 집과 피아노를 처분해야 했다. 한번 ‘춘희’는 ‘영원한 춘희’였다. 김자경이 오페라에 눈을 뜬 것도 ‘춘희’였고, 그가 1968년 창단한 ‘김자경오페라단’이 첫 작품으로 올리고, 김자경이 세상을 뜨기 석달 전 마지막으로 공연한 것도 ‘춘희’였다. 김자경은 자서전에서 “‘춘희’가 이어준 오페라와의 인연으로 오페라에 살고 죽는 ‘오생(生) 오사(死)’ 인생을 살았고, ‘오씨 성에 이름이 페라’인 오서방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알렉산더 뒤마의 소설을 원작으로 베르디가 오페라로 만든 ‘라 트라비아타’는 이탈리아어로 ‘엇나간 여자’라는 뜻. 일본인이 ‘춘희’라 의역한 것을 우리가 그대로 따르면서 이땅에도 ‘춘희’란 이름이 정착됐다. ‘라 트라비아타’가 초연된 것은 1853년 3월6일 베네치아에서였다. 초연에서는 주연 배우가 극중 인물과 어울리지 않아 실패했으나 이듬해 5월 6일 재공연에서는 대성공을 거두며 비제의 '카르멘'과 함께 공연 횟수가 가장 많은 오페라로 기록됐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