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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아빠 찾아 삼만리

by 언덕에서 2016. 1. 5.

 

 

  

빠 찾아 삼만리

 

 

 

Ⅰ.

 

 

 

 

어린 시절 눈물로 보았던, 그래서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동화가 있다. <엄마 찾아 삼만 리>라는 동화인데, 가엾은 이탈리아의 어린이가 돈을 벌려고 떠난 후 그곳에서 병들어 거처마저 알 수 없게 된 엄마를 찾으러 남미로 떠난다. 소년은 혼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남미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간다. 그런데 이 소년의 엄마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지 않고 다른 도시인 코르도바로 옮겨갔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어떤 친절한 사람의 소개장을 받아 사흘 낮 나흘 밤이나 걸려서 돛단배를 타고 로사리오까지 가게 되지만 거기서도 명함에 적힌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 게다가 돈까지 떨어져서 당장 갈 곳도 먹을 것도 없는 형편이 된다. 그 시간 엄마는 중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었고.

 

 

 

Ⅱ.

 

 

 

 

 1970년대 초반이었다. 당시에도 유행이라는 것이 있었던 모양인데, 이 동화가 인기를 끌자 영화로 상영되기도 했다. 그때는 내가 국민학교 고학년 때였는데 개봉관에서는 비싸서 엄두를 내지도 못하고 세 살 많은 형을 졸라 개봉된 지 1년가량이 지났을 때에 영화를 보았다. 동네의 이본동시 상영만 전문으로 하는 허름한 영화관에서였다. 원작과는 배경이 다른 영화였다. 돈벌려 간 엄마를 찾아 대만으로 가서 병들어 죽어가는 엄마를 만난다는 내용이었는데 주인공이 ‘김정훈’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한국에서 대만까지의 거리는 오천 리도 안 되는 거리여서 제목은 '엄마 찾아 삼천 리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는 대만이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였다는 판단이 든다.  

 

 

Ⅲ.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1(Edmondo De Amicis)라는 이탈리아인이 쓴 원작 <엄마 찾아 삼만 리>는 1910년대 후반이 시대적 배경인데 당시 남미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고 1차대전 직후 이탈리아의 가난이 소설을 만든 배경임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서구인들이 남미인들을 가난의 대상으로 혐오하고 경멸하는 분위기지만 당시는 공급과잉이 만든 초기자본주의의 번성으로 언제 어디서라도 가난은 서구인이라 하더라도 이주 노동자를 만들게 되어 있다. 오늘날도 당시처럼 신자유주의가 대세로 자리 잡았고 개인은 물론이고 국가간 ‘빈인빈 부익부’ 현상은 더 깊어가고 있다.

 

 


Ⅳ.

 

 

<EBS TV '아빠 찾아 삼만리'에서의 한 장면>

 

 최근에 우연히 EBS - TV에서 ‘아빠 찾아 3만 리’ 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동남아 등 가난한 국가의 이주노동자 자녀들이 한국으로부터 온 아버지의 편지에 있는 주소를 본다. 그곳 집을 떠나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혼자 힘으로 아버지가 거주하는 공장 기숙사를 찾아가는 내용이다. 과거 독일 광부나 간호사, 월남전 파병, 중동건설현장 근무 등 우리 역시 아주노동자의 경험이 있는지라 역지사지의 기분이 되어 몰입되게 만들었다. 못 살아도 아빠와 같이 살고 싶은 것이 아이들의 마음이지만 가난한 아버지는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5~6년 고생하면 자신과 아이들의 인생이 달라지기에 갖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그 전에 KBS - TV에서 만든 ‘LOVE IN ASIA'는 한국에 결혼이민 온 외국인 며느리가 친정을 찾아가는 내용이는데 비슷하지만 대비되는 부분이 있다.

 

 

Ⅴ.

 

 

<KBS TV 'LOVE IN ASIA'에서의 한 장면>

 

 'LOVE IN ASIA'는 가난한 동남아 처녀가 집안을 살리기 위해 한국에 시집와서 아버지뻘 남자와 결혼하는 장면도 그렇지만 결혼한 후 10년이 지나도 친정에 가지 못하다가 이루어진 늦은 해후에 통곡하는 모습은 슬프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EBS의 <아빠 찾아 삼만 리>에서 보여주는 슬픔도 그에 못지 않았다. 한창 아버지의 손길이 필요한 어린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하느님‘ 이상의 것이다. 베트남의 농촌, 또는 스리랑카의 어촌에 살면서 자동차조차 구경조차 못한 아이가 복잡하고 거대한 인천공항에 내려서 버스를 탄다. 엄마가 적어준 아버지의 주소. 처음 본 땅 아래의 전철을 타고 또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는데 그네 나라에서 미리 익힌 몇 가지 한국말에 의존하여 아버지를 찾는 장면은 무슨 아슬아슬한 곡예를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아이를 둔 아버지는 행복한 축에 속한다.  


Ⅵ.

 

 

<영화 '방가 방가'에서의 한 장면>

 

 2003년 11월부터 한국에선 불법 체류자 단속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이주노동자 10여명이 자살하였고 전국에서 이주 노동자가 강제 추방 반대를 외치며 농성을 하였다. 이주 노동자 노동 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사회의 시선이 이주 노동자에 집중하였고 이주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라는 주장, 이주 노동자를 노동자로 인정하라는 주장, 이주노동자에게 영주권을 주라는 주장 등 다양한 요구와 대안이 나왔다. 

 우리도 오랜 이주 노동의 역사2를 갖고 있다. 한 때는 우리도 '엄마 찾아 삼만 리', '아빠 찾아 삼만 리'의 주인공이었다. 전세계에 퍼져 살고 있는 재외교포를 생각할 때 한국은 이주 노동자를 인격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1997년 외환 위기 때 정부는 이주 노동자를 내보내고 한국인을 고용하는 회사에 지원금을 주었다. 당시에도 이주 노동자가 하던 일을 하겠다는 한국인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출산율이 세계 최저 수준이므로 앞으로 더 많은 이주 노동자가 필요할 것이다. 2015년 한국에는 이주 노동자가  20만 명가량 되고 결혼 이민자와 이주 노동자, 유학생을 합치면 모두 170만의 외국인이 산다. 불법체류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2만 명 가량의 무국적 아동, 유령이 된 아이들이 이 땅에서 교육과 의료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민족’이란 개념은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필요하지도 않다. 한국 사회 전체가 이들과 함께 할 큰 그림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이다.

 

  

  1. 1846년 이탈리아의 오네글리아에서 태어났다. 모데나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포병대에 배속되어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 참가했다. 1868년에 「군대 생활」을 발표해서 좋은 평가를 받은 뒤 1870년부터 본격적으로 작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시문 기자 생활을 하면서 세계 여러 곳을 여행했고, 또 많은 여행기를 썼다. 1886년 교육적인 내용을 담은 「쿠오레(사랑의 학교)」를 발표했는데, 오늘날까지도 온 세계 어린이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다. 언어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담아 발표한 「고상한 말」을 발표하고, 1908년에 세상을 떠났다 [본문으로]
  2. 이주 노동자를 정식 노동자로 인정하는 고용허가제라는 새로운 제도가 마련되었다. 그들이 보기에는 이것도 고칠 것이 많지만 이전의 산업연수생 제도보다는 나아진 것이다. 한국도 외국에 노동력을 보낸 역사가 깊다. 19세기 후반에 조선인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중국 만주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정착하였다. 1902년에는 조선인 계약 노동자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 일하러 미국으로 건너갔다. 멕시코 유카탄 반도로 쿠바에까지 남아있는 ‘애니깽’의 후손들이 그 증거다. 한국정부는 1960년대 초반부터 해외 이민과 단기 이주 노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1960 ~ 70년대에 많은 사람이 중남미 지역에 농업 이민을 떠났다. 또 1966년부터 1977년까지 광부 7,932명과 간호사 1만 266명이 서독과 특별 고용계약을 맺고 파견되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초에는 중동 건설 붐을 타고 많은 한국인이 중동에서 이주 노동자로 일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미국과 호주를 비롯한 전 세계에 이민을 떠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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