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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근경일기(近頃日記) 1

by 언덕에서 2015. 12. 29.

 

 

 

 

 

 

 

 근경일기(近頃日記) 1

 

 

 

 

 

 

 

 

 

2015년 12월 24일 

 

목요일. 크리스마스이브.

 오후 4시경 ○○이 사무실에 찾아왔다. 유명 증권사 전직 지점장. 이제는 별 볼 일 없는 아저씨. 오늘은 술 약속이 없는 듯하다. 소파에 앉았다가 폰을 꺼내 뭔가를 작동시키며 주시한다. 신음 소리(영어다).

 저 자식, 또 시작이구나. 그런 걸 왜 보느냐 물으니 '심심해서'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렇구나. 갑자기 한숨이 튀어나온다. 집으로 들고가야할 보따리가 계속 신경 쓰였다.

 자투리 시간에는 이병주의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읽었다.

 성탄전야니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사무실을 나왔다. ○○이 따라 나왔다.

 “연휴 잘 보내라.”

 지하도를 건너 전철을 타고나니 폰이 울린다.

“통닭하고 맥주나 마실까?”

 차는 이미 두 정거장을 지나온 참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니 우편함에 택배 표시 태그가 붙어있다. 경비실에 가서 그것들을 찾고 위층으로 또 위층으로 올라간다.

 저녁 생각이 없어 그냥 소파에 기댔는데 잠이 든 모양이다. TV를 켜니 ‘순간 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가 방송되고 있다. 피로가 밀려온다. 퇴근한 아내의 쌀 씻는 소리가 들린다.


12월 25일 

 

연휴의 시작.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아직 다 읽지 못했다. 김인숙 소설집을 중고서점에서 샀는데 몇 달 째 책꽂이에서 놀고 있다. 연휴 때 다 읽어야 한다.

 서로 평화의 인사를 나눕시다……. 성탄의 의미는 원래 그런 것이다. 그 지점에서 확장하면 안 될 일이다. 오늘 접한 요한복음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문학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후부터 기온이 급강하한다고 하니 외출금지.

 평소 잴 때마다 고혈압이었는데 종합건진 받는 그날은 이상하게도 정상수치를 기록하고 있었다.

 현대의학이란 건 믿을 게 못된다. 만성피로. 피로 속에서 반 백년을 살았다는 느낌이다.  오후에도 소파에 기대어 졸았는데 그 짧은 시간에 꿈을 꾸었다. 

 내 방이 배로 넓어지고 둘째형이 내 책상 옆에 자신의 책상을 옮기겠다고 했다.

 둘째 형에 대한 감정은 항상 무덤덤함이다.

 

12월 26일

 

토요일

 아침을 먹자 말자 목욕탕에 갔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1층인 줄 알고 밖으로 나오려다 타려는 남자를 보고 겸연쩍었다. 5층이었던 것이다. 대머리에 째진 눈매를 한 무테안경의 중년남자는 오늘도 눈빛이 매섭다.

 욕조에다 반만 몸을 담그고 앉아있는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아는 이다. 이번에는 9층 남자다. 사십대 후반 아니면 오십대 초반?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의 학생 주임교사라고 했는데 역시 눈매가 날카로운 사내다. 상대방을 압도하려는 눈매. 주로 경찰관이나 직업군인 등의 눈에서 그런 것을 느끼는데 그에게도 느껴진다. 나를 못 알아봤는지 오늘은 인사를 하지 않는다. 안경 벗은 나를 못 알아봤을 것이다.

 오후.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드디어 다 읽었다. 법과 제도가 현실을 왜곡하기 때문에 인간을 불행과 죽음으로 이끈다면 그 법과 제도는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인간은 그 법과 인습이란 것이 가장 공정하고 공평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병주씨는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우연과 우연을 모아 줄거리를 만든 관계로 스토리에서 개연성이 없다. 그러나 핍진성은 느낄 수 있다. 박정희에게 당한 것을 상쇄하기 위한 분풀이 같은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70년대 초반. 투옥 중인 사상범의 동생이 멀리 이집트까지 가서 유명한 클라리넷 연주자가 된다는 설정이 생뚱맞다. 내가 살아보니 세상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았다. 소설은 허구이지만 어디까지나 개연성 있는 허구여야 할 것이다.


12월 27일


일요일이 주는 푸근한 느낌이 좋다. 오전에는 EBS의 다큐멘터리를 보기 위해 TV를 켰다가 또 졸고 말았다. 아내가 갑자기 내 귀에다 큰소리를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려보니 TV만 켜져 있었다. 아내를 불렀더니 안방 문을 열고 나오더니 의아해 한다.

 “당신, 어젯밤에도 잠꼬대를 많이 했어요.”

 시내에 나갔더니 캐롤송이 들리는 곳도 있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와 시민공원을 산책했다. 일기예보는 오늘이 영하권이라고 했지만 봄날 같은 날씨다. 요즘의 일기예보는 틀리게 예측되는 경우가 매우 잦다.

 남은 시간에는 어제 읽다 남은 김인숙 소설집 <유리 구두>도 다 읽었다. 작가의 메시지가 예상과 달라서 읽으면서 계속 놀랐다. 공지영 아류일 것이리라는 편견을 깼고 문장의 호흡은 지루했다. 1998년 판으로 9편의 단편을 모은 것이었는데 초반 몇 편은 뭐 이리 시시한 소설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후반으로 가서는 공포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여 몰입시켰다.

 요즘 와서 견비통이 부쩍 심해졌다. 오른쪽 어깨인데 수저질을 하기 어려울 경우도 있다. 가만 생각해보니 대학병원을 비롯하여 열 군데가 넘는 병원에 다녔지만 모두들 해결하지 못 한다. 현대의학이란 믿을 게 못 된다. 아는 병보다 모르는 병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저출력레이저치료기라는 것을 어깨에 대고 앉아 있자니 좀 한심한 느낌마저 든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라는 유행가 가사가 자주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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