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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세모 풍경( 歲暮 風景)

by 언덕에서 2015. 12. 23.

 

 

 

 

 

 

 

 

세모 풍경( 歲暮 風景)

 

 

 

 

 

 

Ⅰ.

 

저녁에 퇴근하는 길이었습니다. 아파트 놀이터에는 그네나 미끄럼틀 같은 것이 정비되어 있고 이곳에는 어린이나 어르신들이 놀이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기도 하지요. 이곳을 지나는데 갑자기 고함 소리가 들려서 걷던 길을 멈추게 되었습니다. 6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요? 점잖은 모습의 부인 한 명이 벤치에 앉아 있는 남녀 고교생 두 명을 향해 야단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디서 이런 못 배워먹은 짓이야? 학교에서 그렇게 가르치데!"

 학생 두 명은 태연한 표정으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너희들은 부모도 없어! 주위의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아?"

 지나는 사람들과 근처에 상주하는 경비 아저씨를 포함해서 열 명 이상의 사람들이 갑자기 그 자리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엇 때문에 할머니는 분개하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1~2학년 정도 되는 두 학생은 열린 공간인 아파트의 놀이터 벤치에서 짙은 포옹과 키스를 하고 있었고 할머니는 그 장면을 묵과할 수 없었던 겁니다.


 Ⅱ.

 

 얼마 전 EBS - TV에서 본 장면입니다. 모 고교 선생님이 자신이 근무 중인 학교 소개를 하고 있었습니다. 방송 카메라 앞으로 학생들이 지나가곤 했는데 여학생들은 인사를 했지만 남학생들은 선생님께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 선생님은 ‘우리학교 남학생들은 원래 이렇다’고 했습니다. 왜 선생님은 학생들이 인사를 하지 않음에도 그럴 수 있는 일로 생각했을까요?

 지난 주 늦은 밤이었습니다. 아파트 옆 도로에서 여중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둘은 지그재그로 걷고 있었습니다. 걷다가 넘어지고 일어서다 또 넘어지고……. 한눈에도 이들은 만취상태였습니다. 결국은 한 아이가 또 넘어지더니 길가에 세워둔 트럭 바퀴 옆에다 대자로 눕고 말았습니다. 많은 행인들이 지켜보았지만 모두들 그냥 지나가더군요. 트럭이 움직이면 저 아이는 죽거나 다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112에 전화를 하고 경찰순찰차가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무관심. 무엇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Ⅲ.

 

 

 요즘 청소년들은 예전에 비해 발육이 무척이나 빠르고 매스컴의 발달로 얻어듣는 정보도 많아 어른들 못지않게 아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요즘 청소년들은 ‘아이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 청소년들이 잘 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조선시대에 나온 소설 <춘향전>을 읽어보면, 만 열다섯 살 이몽룡이 같은 또래의 성춘향을 맞아 성애(性愛)를 나누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몽룡은 스무 살도 못 되는 나이에 장원급제를 하여 암행어사까지 되지요.

 춘원 이광수나 육당 최남선이 20세 전후의 나이에 학교 선생이 되고 저명한 문필가로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특별히 조숙했거나 당시에 인물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그 나이 또래의 사람이 응당 ‘어른’이었던 것이지요. 이젠 청소년을 ‘어른’취급하고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Ⅳ. 

 

 연말연시가 되니 귀가길이 늦어집니다. 어느 만화에서 본 장면이 생각납니다. 홍길동은 집을 떠날 때 만류하는 아버지에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며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함’을 이야기하며 원통해 합니다. 이에 놀란 홍판서는 '너에게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하노라!‘고 답을 하지요. 하지만 홍길동은 계속해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를 반복합니다. 만화 말미에 만화가의 작은 설명이 달렸습니다.

 

 “뭘 알아야 자식(또는 사람) 노릇을 합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있을까요?  연말연시입니다. 예의는 차치하고 추운 겨울, 늦은 밤, 길에서 술에 취해 짧은 치마를 입은 채 휘청거리는 청소년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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