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경일기(近頃日記) 2
2016년 2월 6일 (토)
구미행 완행열차를 타다.
기차가 대구를 지나니 눈 덮인 산이 보인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경부선 열차를 타면 칠곡군의 왜관역 근처의 풍경이 마음에 든다. 물론 열차 차창을 통해 느낀 감정일 뿐이겠지만 작고 낮은 산이며 붐비지 않는 읍내 분위기가 그렇다. 열차가 왜관 역에 잠시 정차하는데 젊은 흑인이나 백인이 많이 보인다. 왜관에는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군인들을 보니 지금도 있을 것이다. 일기예보는 추운 날씨라고 했지만 열차 안은 스팀으로 덥기까지 했다.
장모님은 해가 바뀌었으니 금년 85세다. 잠자리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처가이지만 마지막 몇 년이나마 성실한 사위 구실을 해야겠다는 사명감 같은 것을 갖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오랜만에 등장하는 막내사위에게 격할 정도로 반갑게 대하신다. 근처에 사는 큰동서도 나를 만나러 왔다. 그런데 거기까지만 좋았다.
셋째처형이 대작(對酌)하는 큰동서와 내게 성경 설교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순간 모두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발견했다. 내 표정 역시 그랬을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도 역사(役事)하셨어요……. 그러니 교회라는 말이 뭐예요? 믿을 ‘교’ 모일 ‘회’내가 믿음을 실천해서 사람을 모이게 하면 바로 내가 ‘교회’잖아요…… 그러니 이곳도 교회죠.”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든다.
“처제, 그만 해요!”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그 설교는 계속되었다. 큰동서가 화를 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바람에 그날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파토가 났다. 큰동서 부부는 큰처형의 과한 신앙 때문에 혼인 기간의 대부분을 불화 속에서 살아왔다.
무엇이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을까? 큰동서와 셋째 처형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 혼자서 곰곰 생각하다 숙면.
2016년 2월 7일 (일)
인사하고 내려오다.
장모님은 나를 위해 준비했다며 포장된 선물을 주셨다. 아마도 당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으므로 하나씩 준비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버이날에 또 찾아뵙겠습니다.”
이제 나도 만만찮은 나이지만 장모님은 멀지 않은 시간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기차는 남으로 달리다 밀양 역에서 멈춰 섰다. 역 앞의 식당에서 점심으로 추어탕을 먹는데 식당 벽에 걸어둔 액자에 영화 ‘밀양’ 속의 한 장면이 담겨져 있다(위 사진). 진미추어탕. 송강호와 전도연이 함께 전도하는 그 장면은 식당 바로 앞에서 찍은 것이다. 갑자기 어제 저녁의 설교 장면이 떠올라 혼자 '하하~ ' 웃고 말았다. 아내는 내가 혼자서 웃는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유를 말하자 이번에는 함께 웃게 되었다.
“이렇게 웃기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지. 나는 ○○언니가 미친 줄 알았어요.”
♣
역전에 도열한 맨 앞쪽 택시를 잡아타고 밀양성당으로 갈 것을 주문했다. 밀양성당 납골당 ‘천상낙원’. 나를 낳아주시고 키워주신 부모님이 한줌 재가 되어 계신 곳이다. 밀양성당은 밀양시 교통 낮은 야산 위에 있는 제법 큰 성당으로 그곳 어디서나 영남루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문열의 대하소설 '변경'의 초반 무대가 바로 이곳일 것이다. 이곳은 외진 곳이기도 해서 ‘차 잡기’가 힘들다. 택시기사는 우리가 기도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부모님이 안치된 납골당 내 그 자리는 계속 10년 전의 그 위치 그대로다. 성당 측에서 붙여둔 공지문이 보인다. 망자의 이름 밑에 사진을 붙이고 싶으면 첨부 양식을 통해 신청하라는 내용이다.
성당 주차장까지 내려오면서 내가 말이 없으니 아내는 자신이 간구한 기도 내용을 전했다.
“이제 아무 걱정 마시고 편히 쉬셔도 된다고 제가 말씀드렸어요.”
택시를 타고 다시 밀양역으로 갈 것을 주문했다. 6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택시기사가 묻는다.
“죽으면 혼백이 있을까요?”
계속 말을 이었다.
“살아있는 사람 마음 편하기 위해 무덤이나 납골당 그런 곳에 두는 거지. 그렇지 않아요? 죽으면 흔적도 없이 하도록 당부하고 죽어야 해요. 뭐하려고 자식들 귀찮게 해요. 안 그래요?”
점잖은 느낌을 주는 분이었기에 내가 대답했다.
“살아있는 자식들의 마음에라도 계시면 좋지요.”
“있잖아요, 선생님. 나이가 더 드시면 이렇게 일년에 몇 번씩 방문하는 것도 힘들어져요. 자식들을 귀찮게 만드는 게 좀 그렇지 않아요?”
이 택시기사의 전직(前職)은 무엇일까? 쓸데없이 박식한 면이 많았다.
“화장(火葬)이 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매장을 많이 하잖아요. 땅은 좁은데 무덤은 나날이 늘고……. 후손들을 위해 매장하면 안돼요. 그리고 납골당에 안치하는 것도 저는 반대예요. 뼛가루도 오래되면 벌레가 모이데요.”
내가 물었다.
“뼛가루라기보다는 재 아닙니까? 불에 태우고 남은 가루 모양의 물질이잖아요. 그것은 연소되어 단백질도 없을걸요. 벌레가 모인다니 말이 됩니까?”
“선생님, 벌레가 모인데요. 그래서 요즘은 납골당 같은데서 그 재에다 방충제를 뿌리기도 한데요. 제 말은, 죽으면 납골당 같은 곳에 두는 것, 그런 흔적조차 후손에게 피해가 된다는 것이지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사람이 죽으면 모두 다 티베트나 중앙아시아 알타이족처럼 조장(鳥葬)을 해야 해요. 우리 인간은 짐승 고기를 먹으며 평생을 살잖아요. 그러니 죽을 때는 우리 몸을 짐승이 먹게 해야 평등한 것이지요. 동물원의 육식동물에 줘도 좋고요.”
이 말이 끝나자 나는 큰소리로 “푸핫!‘하고 웃었다. 원칙적으로 맞는 말이다. 우주의 질서라는 원칙. 그러나 원리원칙대로 흘러간 적이 어디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밀양역에 도착하니 마침 부산행 열차시간과 절묘하게 맞는다. 이렇게 해서 연휴의 하루해가 또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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