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의 교훈
서울역에서 서대문 쪽으로 가는 길에 염천교라는 다리가 있다. 다리라고는 하지만 그 밑은 물이 아니라 철길이다. 부산, 목포에서부터 숨가쁘게 달려온 열차가 최종적으로 멈추는 곳이 서울인 것 같지만, 사실은 휴전선 코밑의 문산까지 이어져 있다. 염천교 밑을 달려가는 철길은 바로 통일의 비원을 안고 북으로 북으로 뻗어가는 미래의 국토의 대동맥이 될 것이다.
그 염천교에서 남대문 사이의 중간 부분에 정3품을 하사받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었다. 속리산에 정2품송이 있는 것은 국민 누구나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남대문 바로 바깥에 정3품송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당상관품작을 하사받은 그 주인공 소나무가 남아있지 않아서일 것이다.
대부송(大夫松)으로 불려졌던 이 소나무가 벼슬을 하게 된 까닭은 이렇게 전해져 온다.
남대문 성밖 아름드리 고송이 있던 곳은 바로 강희맹의 집터(서울특별시 중구 순화동 193-212 일대로 추정)였다.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예조, 형조, 병조판서 등을 두루 거친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서 경사(經史)와 전고(典故)에 통달한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이기도 했다. 본관은 진주인데, 진주 강씨 일문의 마지막 등불이라는 풍수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한 인물이다.
이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진주에는 두 군데의 봉란(鳳卵)자리가 있었다. 동란(東卵)과 서란(西卵)이 그것이다. 동란(東卵)은 고려 때 상원수 강감찬 장군과 함께 거란족을 물리친 부원수 강민첨 장군의 생가 뒷산을 말한다. 지금 진주 강씨 은렬공파는 강민첨을 파조(派組)로 하고 있는데, 은렬(殷烈)은 강민첨의 시호이니 그 후손들이 은렬공을 기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리한 것이다. 서란(西卵)의 봉란자리는 진주 강씨 시조 강이식(姜以式)의 9세손 강구만(姜九萬)이 살던 곳으로 현 진주시 상봉서동에 있다.
강씨 문중에 전해져 오는 가첩(家牒)에 의하면, 강구만 대에 이르기까지 강씨 일족들이 출세를 계속하자 왕실에서 그 까닭을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 집 뒤의 산이 대봉산(大鳳山)이고 집 안에는 봉황의 알을 뜻하는 바위가 있다고 보고되었다. 대봉산의 봉황은 임금을 뜻하는 것이요, 이에 알까지 품고 있으니 머지않아 강씨 왕조가 탄생될 것이라는 참언이 뒤따랐다.
왕실에서는 즉시 알을 깨버리게 했으며 대봉산의 이름을 비봉산(飛鳳山: 봉황이 날아가버린 산)으로 바꾸어 버렸다. 일설에는 깨진 봉란에서 즉, 바위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전한다. 그 뒤로 강씨 일문에서는 조선 초기의 강희맹을 끝으로 걸출한 인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공경대부, 정승판서가 예전처럼 나지 않자 강씨들은 봉란을 다시 만들어놓고 봉황이 날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고도 한다.(이상은 최영주의 <신한국풍수>에서 재인용한 내용이다.) 강희맹은 <촌담해이(村談解頤)>라는 소화집(笑話集)을 엮었는데 책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내용이 전한다. 조정에서 봉황을 겁내 했는데 강희맹의 글을 읽으면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많아 15C 사람이 맞는지 의심을 하게 된다. 그 봉황은 어쩌면 강희맹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도둑질에 달통한 아버지와 아들이 한 부잣집으로 도둑질을 하러 갔다.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거기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아들이 그것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아버지는 문 밖으로 나와서 창고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들은 기가 막혔다. 아버지가 나를 붙잡혀 죽게 하려는 것이다. 이럴 수가 있는가. 그러나 기막혀하고 분해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아들은 살아나갈 궁리를 했다.
"찍찍" 하고 쥐의 소리를 내기도 하고, 문짝을 긁기도 했다. 그 소리를 들은 주인이 호롱불을 들고 창고 문을 열었다. 순간 아들은 호롱불을 손으로 쳐버리고 달아났다. 그러다가 캄캄한 마당 한가운데에 빨랫돌에 걸려 넘어졌다. 바로 그 옆에는 깊은 우물이 있었다. 그는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했다. 그 빨랫돌을 들어 우물에 던졌고 풍덩 소리가 났다.
"도둑이 우물에 빠졌다!"
주인이 소리쳤고 집안사람들이 모두 불을 밝히고 우물에 빠진 도둑을 잡기 위하여 몰려갔다. 그 틈을 이용하여 담을 넘어 집으로 돌아간 아들은 아버지에게 울분을 쏟아냈다.
아버지는 웃으면서 말했다.
"너는 이 아비보다 훨씬 훌륭한 창조적인 도둑이 되었다!"
- 강희맹, <도둑의 교훈> 중에서
☞ 강희맹(姜希孟.1424.세종 6∼1483.성종 14) 조선 초기 명신(名臣). 자 경순(景醇). 호 사숙재(私淑齋)ㆍ운송거사(雲松居士)ㆍ국오(菊塢)ㆍ만송강(萬松岡). 본관 진주(晋州). 시호 문량(文良).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석덕(碩德)의 아들. 1447년(세종 29) 문과에 급제, 세조 때 형조판서, 예종 때 남이(南怡)를 죽인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고, 성종(成宗) 때 이조판서(吏曹判書),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경사(經史)에 밝고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 이홍직 : <국사대사전>(백만사.1975) -
'살며 생각하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만날 때까지 (0) | 2015.11.06 |
---|---|
가을은 가고 (0) | 2015.11.03 |
삶의 향기로운 반전 (0) | 2015.10.20 |
후끈 뜨끈 매끈 싱가포르 여행 (0) | 2015.10.13 |
우리말, 장난이 아니다? (0) | 2015.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