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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우리말, 장난이 아니다?

by 언덕에서 2015. 10. 9.

 

 

 

 

 

 

우리말, 장난이 아니다?

 

 

 

 

 

 

 

 

 

 

 거친 말

 

 퇴근길 동네 입구에서 신호등 때문에 정차할 때 항상 눈에 그슬리는 광고 문구를 만난다. 휴대폰 대리점 진열창(쇼윈도)에다 큼직하게 써 붙인 문구인데 “비싸면 싸대기”라는 표어가 그것이다. 풀어서 이야기하자면 '이 집에서 손님이 비싸다고 생각하시면 저희 종업원에게 뺨을 한대 때려도 상관없습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저희는 가장 싼값에 팔겠습니다’는 표현을 하면 될 텐데 굳이 저렇게 자극적인 표현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원인은 이 시대의 고객층이 웬만한 미사여구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언어표현이 거칠어지니 삶 자체도 그렇게 되는 느낌이다. 최근 유독 포악해지는 범죄 기사를 접할 때마다 고운 언어가 달아난 결과의 산물로 형언하기도 싫은 악질 범죄가 난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장난이 아니다’

 

 '장난이 아니다'는 말은 이제 너무도 대중적인 표현이 되어서 텔레비전의 예능 프로나 교양 프로의 아나운서조차도 태연하게 쓴다. 나는 이 말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진실과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어떤 사실이나 현장을 목격할 때 ‘대단하거나’ '실감이 있는' 경우에 쓰는 표현이 '장난이 아니다'인 듯하다. 이 말을 쓰는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러면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은 장난이란 말인가?  '장난’의 사전적 의미는 ‘주로 어린아이들이 재미로 하는 짓. 또는 심심풀이 삼아 하는 짓’이나 ‘짓궂게 하는 못된 짓’을 의미한다. 우리의 모든 현실은 장난이고 예외적인 상황 몇 가지를 '장난이 아니다'로 정의하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이런 말을 사용함에 따라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장난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최면을 걸고 있는지 모르겠다. 쉽게 만나고 쉽게 이혼하는 모습이라든지 쉽게 목표를 잡았다가 쉽게 포기하는 모습들이 그렇다. 혹자는 이를 불신 사회의 일면이라고 지적한다. '장난이 아니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본인이 사회를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는 책임이 일정 한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만약 본인이 교양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런 이상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정말' 또는 '솔직히 말해서'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유달리 ‘정말’ 또는 ‘진짜’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이를 발견하게 된다.

 좀 더 긴 표현으로는 ‘솔직히 말하면’으로 운을 떼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는 언어 습관으로 굳어져 거의 고치기가 불가능해진 경우도 목격하게 된다. 지금은 텔레비전에 잘 나오지 않던데 몇 년 동안 ‘열린 음악회’ 사회를 보던 여성 아나운서가 그랬다. 그 방송을 보다가 나는 그녀가 유독 ‘정말’이라는 표현을 지나치게 자주 사용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지금 소개하는 가수는 여러분들이 정말 좋아하시는 가수입니다. 정말 미남이고 정말 감미로운 노래를 선사해서 저는 정말 이 분이야말로 정말 가을에 잘 어울리는 진짜 좋은 가수라고 생각합니다. (후략)…….”

 똑같지는 않지만 대충 이런 식으로 가수 소개를 했는데 1분가량의 짧은 소개말에서 그녀는 ‘정말’이라는 단어를 무려 12번이나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맙소사! 아마 그녀는 ‘정말’이라는 명사를 사용하지 않으면 어휘 구사가 제대로 안되는 사람은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거꾸로 생각해보니 그녀에게 세상이란 모두 거짓말('정말'의 반대)로 이루어져 있기에 ‘정말’이라는 표현을 무의식중에 남발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의문을 가지게 했다. 그러나 ‘정말’이라는 표현이 많아질수록 그 사람의 언행은 진실성이 없어 보이는 점은 확실하다. ‘솔직히 말하면’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 사람도 그렇다. 그가 '솔직히'라는 표현을 쓰면 쓸수록 평소의 그 사람은 솔직하지 못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표현들을 즐겨 쓰는 이를 대하는 것은 혼란스럽다. 그런 말을 사용할 필요가 있더라도 최소한이어야 할 것이다.

 

 사투리 또는 외래어

 

 전라도 사투리 중에 ‘거시기’라는 다목적용(멀티플레이어적인) 표현이 있다.

 예를 들어 “오늘은 거시기가 거시기해서 거시기를 거시기 했다.”는 등의 서술이다. 거시기. 이름이 얼른 생각나지 않거나 바로 말하기 곤란한 사람 또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명사. 그런데 이 '거시기'를 남발할수록 그 사람은 표현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마찬가지의 예는 경상도 사투리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가가 가가? 아니면 이기  다 니끼다 이기가?" (그 애가 그 애냐 아니면 이것 모두가 네 것이란 말이냐?) 사투리라 하더라도 그 지역 밖의 사람이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는 피해야 하는 것이 언어 사용의 예의다. 사투리가 우리의 언어 영역에서 다양한 표현력 구사를 가져오고 고유한 지역 문화를 보전하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그 사용처는 표준말의 보조 수단에 그쳐야 한다는 생각이다. 주객이 전도되는 지나친 사투리 남발은 국제화 시대의 외국인에게 그렇지 않아도 배우기 어려운 한국어를 더 어렵게 만든다. 외국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어 어려워요! 그런데 사투리 때문에 더 어려워요!”

 몇 년 전 베트남 호찌민의 한국 문화원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다. 그곳 지인의 부탁으로 강의실에서 그곳 학생들과 자유 대화를 할 기회가 있었다(그는 내가 교양 있고 고급스러운 한국어를 구사하는 대표적인 사람으로 소개했다). 내 나름대로 표준말과 문법에 맞는 한국어를 구사하려 애썼지만 그곳의 학생들은 내 말이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운전 습관을 이야기하면서 ‘핸들을 이빠이 틀어서’라는 표현을 썼는데 4년제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 중인 학생들조차 이해하지 못 했던 것이다. ‘핸들을 이빠이 튼다’는 표현 속에는 영어, 일어, 한국어가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운전대를 가득 틀어서' 라고 말했어야 옳았다. 그 경험으로 인해 이후부터는 각별히 어휘 구사에 신경을 쓰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역사에는 우연의 일치가 많다. 구텐베르크가 태어난 같은 해에 세종대왕도 태어났다. 구텐베르크는 활판인쇄술의 개발로 물질적인 상품의 대량생산, 대량소비에 앞서 정신적인 서적의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가능케 한 매스커뮤니케이션 역사의 기원, 원년을 열었다. 그는 한 사람의 인쇄업자요 전문기능인이었다. 알프레드 웨버가 ‘유럽의 생활 기술 혁명의 서막’을 열었다고 한 15세기 알프스 북부의 수공업자들, 수익의 증대와 노동의 경감 외엔 어떤 다른 관심도 없었다는 수공업자의 한 사람에 불과하였다.

 그에 비해 세종대왕은 구텐베르크와 같은 반열에서 비교할 수 없는, 비교해서도 안 될 거인이요, 보편인(generalist)이었다. 세종대왕의 수많은 업적 중에서도 으뜸 되는 것이 훈민정음의 창제라 할 수 있다. ‘바른’글자인 훈민정음의 창제로 해서 이제 배운 사람이나 못 배운 사람, 어린이나 어른, 사내나 계집 할 것 없이 누구든지 지껄이는 모든 말은 그대로 글자로 옮겨 쓸 수 있게 한 데서 세종대왕의 위대성이 있다. 국어의 완전하고 전면적인 문자화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 사실을 집현전의 대석학(大碩學) 정인지는 “비록 바람소리와 학의 울음이라든지, 닭울음소리나 개 짖는 소리까지도 모두 표현해 쓸 수 있게 되었다.”고 적어 놓고 있다.1 이렇게 우리말은 위대하다.

 


  

 이상한 말

 

 근래에 가장 많이 듣는 불편한 말은 “대박이다!”라는 표현이다.

 물론 이전에도 개업의 축하 인사로, 청소년들이 ‘굉장하다’ ‘놀랍다’는 의미로 많이 써왔지만 요즘 와서 빈도가 더 많아지는 듯하다. 텔레비전을 보노라면 젊은 세대들이 사용하는 가장 짧고 담백한 감탄사가 “대박!”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대박!’이라는 표현이 좋은 상황에만 쓰이는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거나, 어떤 일이 지나치게 심할 경우 등 부정적 상황에서도 쓰이는 것을 보았다. 지하철에서 옆에 앉은 대학생들의 다음과 같은 대화를 들은 적이 있다.

 “야, 알아? 요번 시험에서 오류가 떠서 시험을 망쳤다. 와! 대박, 아놔…….”

 그런데 이 ‘대박’이란 말은 노름 용어 ‘박’에서 많이 따는 것에서 전래되었다고 하고, 혹자는 흥부에게 횡재를 안겨준 ‘큰 박’에서 왔다고도 하며, 또 다른 주장에는 ‘큰 배(大舶)’곧‘큰 배가 조선에 올 것이다(大舶來鮮)’란 18세기 조선 민중의 희망이 실린 단어라고 하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좋은 일에 사용되어야 하는 말이 무분별한 감탄사로 바뀌어 엉뚱한 말이 되어 고유한 길을 잃고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찾아보기 드문 성군인 세종대왕께서 만든 귀한 우리말을 잘 가꾸어 나가야 하는 일은 우리 후세들의 책임이다. 최근에 유시민이 쓴 '글쓰기 특강'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런 표현이 좋았다.

‘잘 살아야 잘 쓸 수 있다.'

 

  언젠가 전 직장의 부하 직원이었던 아가씨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좋은 사람이 되려 노력하면 좋은 남자를 만날 수 있지.”

  마찬가지다.

  우리말이 좋은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잘 가꾸어야 한다.

 

  1. - 최정호(연세대 교수):[조선일보](1997. 6. 3) -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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