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말리는 건망증
나이 오십을 넘으면서 부쩍 건망증이 심해짐을 느낀다. 학창 시절은 물론이고 40대까지만 해도 나의 기억력은 유별나게 정확해서 지인들이 나를 향해 ‘인간 녹음기’라고 부를 정도였다. 어린 시절 학년별 학급 급우 이름들을 줄줄 외울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나이가 드니 기억력이 약해져서 이제 어쩔 수 없다는 푸념을 하곤 한다. 건망증에 관한 생각을 하다가 우리나라 고전에서 건망증 여러 설화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설화 중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건망증 설화의 기법은 삽화 즉 에피소드를 나열하여 사례가 늘어나는 것으로 재미가 반복되는 듯하다. 나를 발견하는 소재가 이야기 끝에 나오면서 웃음 속에 담겨진 철학적인 면이 제시기도 한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던 시대에 자신의 정체성, 즉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 설화다.
이것을 확대하여 생각하면 일반적인 재미와 진지함, 곧 문학과 철학의 공존을 엿볼 수 있다. 조상들이 남긴 이 설화들은 과거를 기억함으로써 자신을 발견하는 이야기로 결국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며 지금도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게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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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이 심한 영감이 길을 가다가 일어서면 툭 떨어질 곳에 자기 갓을 걸어 놓고 똥을 누었다. 똥을 누고 일어나니 갓이 떨어졌다. 영감이 “아따, 갓 하나 주웠다.” 하고 돌아보니 똥에서 김이 나는 게 보였다.
그러자 영감은,
“어떤 놈이 금방 거기다 똥을 누었네.”
라고 하였다. 그 영감이 어느 집에 하룻밤을 묵으러 갔는데 마침 중(스님) 한 명도 그곳에 자러 왔다. 영감이,
“중은 어디에 있는고?”
라고 물으니,
“아무개 절에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영감은 들은 내용을 금방 잊어버려 밤새도록 중에게 했던 질문을 또 했다. 중이 화가 나서 아침에 영감의 상투를 싹 잘라 놓고 도망갔다. 영감이 자고 일어나서 머리를 쓰다듬어 보니 자신이 중이 되어 있었다.
그러자 영감은,
“주인, 중은 여기 있는데 나는 어디 갔소?”
라고 물었고, 주인은 어이가 없어,
“뭐라 했소?”
라고 했다. 영감 본인도 기가 차서 갓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당신 혹시 나요?”
라고 했더니 욕을 하고 가 버렸다.
이 설화에는 똥과 갓, 스님에게 반복 질문, 상투 자르기가 나오며, ‘나는 어디 갔소?’ 라는 해학적인 소재가 연결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하게 한다. 사람에게 기억은 중요하다. 자기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건망증 환자라는 것도 모른다.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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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내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언젠가 아내의 부탁으로 퇴근길 근처의 은행 현금인출기에서 일금 오백만원을 인출하였다. 은행을 나와 10분 정도 흘렀을까. 집으로 돌아오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주머니에 현금이 없는 것이다.
지갑을 열어보니 현금 카드는 지갑 속에 그대로 있는데……. 갑자기 등줄기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현금인출기에서 현금이 나오자 카드를 지갑에 넣었지만 돈은 현금인출기에 그대로 두고 왔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한숨이 나기 시작했고 ‘나 같은 인간은 이제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현금인출기 내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그 돈을 냉큼 들고 갔으리라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졌다. 그래도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은행으로 향했다. 마감 작업 중이어서 객장이 텅 빈 은행에 용감하게 들어가서 행원에게 오늘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 했다. 보안 요원인 듯한 아가씨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내 신분증과 현금카드를 든 채 현금인출기를 열어보고 확인하더니 예의 그 현금을 내게 전해주었다. 현금인출기에서 카드를 넣고 현금을 출금 버튼을 눌렀다 하더라도 일정 시간 돈을 지폐반출구에서 꺼내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투입구가 잠긴다는 것을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휴우……. 해당 은행 그 지점에 근무하는 모든 이를 안아주고 싶었다.
얼마 전 싱가포르 여행에서의 일이다. 그곳의 멀라이언 파크라는 곳의 대형 사자 조각상 입구에는 사람 크기의 유명 배우 밀랍상이 있었다. "who do you want to meet(누구를 만나고 싶어요)?"라는 안내문 뒤에 있는 '다이 하드'의 주연이었던 그 대머리 배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저 양반 이름이 뭐였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또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집착이었을까? 두 시간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겨우 그 이름을 기억해내었다.
'브루스 윌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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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블로그 친구인 열무김치님께서 아래와 같은 글(http://blog.daum.net/14935/7016991)을 올려놓으셔서 나와 상대적인 비교가 되어 마음의 위로를 다소 받았다. 내용은 이렇다.
강원도 원주에 사는 선생은 여느 때처럼 장을 보기 위해 부인과 마트에 갔다. 장보기를 마친 두 분은 물건을 포장하는 포장대에서 중간 박스 하나를 펴서 간단하게 포장을 했다. 승용차로 와서 문을 열기 위해 포장한 박스를 차 지붕에 얹었다. 출입구를 향해 출발을 하고 조금 뒤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지만 이층에도 주차장이 있기에 대수롭지 않게 마트를 빠져나왔다는 것이다. 부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집에 도착한 뒤 포장한 박스를 꺼내게 위해 차량 트렁크를 열었는데 박스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다음의 장면은 직접 옮겨보겠다.
“여보, 마트에서 산 거 뒷좌석에 있어?”
“당신이 트렁크에 싣지 않았어요?”
“없는데.”
“뒷좌석엔 아까부터 아무것도 없었는데……. 트렁크에 실었잖아요.”
아뿔싸 ……. 승용차 어디에도 장을 본 박스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당신은 뭐했어요? 확인을 했어야 할 것 아니요.”
“뭘 확인을 해요. 당신이 들고 왔잖아요. 당연히 트렁크에 넣은 줄 알았지.”
포장한 박스를 잃었다는 마음보다는 나와 아내가 갑자기 허수아비가 되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하얘졌다. 아니, 아무리 건망증이 심해도 이럴 수가 있나. 아내는 심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승용차 문을 열기 위해 포장한 박스를 차 지붕 위에 얹고 문을 연 뒤, 차 지붕에 있는 물건은 그대로 두고 사람만 타고 온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출발 후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는 내가 차 지붕에 얹어놓은 박스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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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어서 아이들이 집에 있을 시기에는 별 약속이 없으면 일주일에 한 번 꼴로 함께 저녁 식사를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 그것도 마음대로 잘 되지는 않는다. 두 녀석 모두 바쁘고 하는 일이 분주하며 나 역시 그러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부재했음에도 모처럼 마련한 자리의 화제는 건망증이었다. 언젠가 아내가 가스렌지의 불을 끄지 않고 출근하는 바람에 군복무 중 휴가 나온 아들아이가 연기 자욱한 집에서 가열된 냄비를 진화한 적이 있다. 몇 달 후에도 같은 이유로 딸아이가 불을 끈 일이 있었다. 그 일 이후 심각성을 느낀 나는 멀쩡한 가스렌지를 철거하고 불날 염려가 없는 전기렌지를 설치해야만 했다.
아이들이 몇 년 전의 일어난 아찔한 '가스렌지' 사건을 꺼내자 나는 최근에 있었던 CD기(현금인출기) 사건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열무김치님의 사례를 제시하며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일'이라는 첨언까지 보태며 의기양양해했다. 그때 딸아이가 나를 흘겨보며 한마디 했다.
“아빠! 오 년 전에도 똑 같은 일이 있었어. 이번은 어째 돈을 찾아왔지만 그땐 아예 못 찾아왔잖아!”
자기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건망증 환자라는 것도 모른다. 미안하지만 내가 대단한 건망증 환자라는 것을 인정해야겠다.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내 스스로 말하지 않았는가.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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