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Ⅰ. 싱가포르의 절과 사원
지난주 엿새 동안 아내와 함께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 빈탄 섬 여행을 했다. 젊은 시절 아내와 나는 나이 오십이 지나면 해마다 한 번 정도 해외여행을 가자는 다짐을 하곤 했고 그런대로 이행해온 느낌이다. 올해 봄에도 이미 홍콩을 여행했으니깐. 계획에 없는 갑작스러운 여행은 책장 구석에서 굴러다니던 책 한 권 때문에 시작되었다. 아내가 지인으로부터 선사 받은 <싱가포르의 절과 사원>이라는 이상한 책을 읽은 나는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은 무책임하다’는 막말 투 의견을 표시하고야 말았다. 저자는 모 기업의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틈을 내어 싱가포르 내의 불교 사원과 도교 사원 현황을 저술했는데 책 전체의 절반을 불교 사원 12곳과 도교 사원 7곳을 소개하고 있고 나머지 반은 도교 경전을 원문을 해설 없이 따분하게 게재하고 있었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는 이런 책에는 저자가 주장하는 부분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 종교의 본질에 관한 언급은 물론이고 동아시아 종교의 기본 성격에 관한 개념, 불교나 도교의 유래에서부터 현재의 모습을 서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그러한 과정을 모조리 무시하고 그 나라 어느 지역에 어떤 절이 있고 그 절의 특징은 어떠하다는 정도의 단편적인 서술만 담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책 전체의 반 이상은 생뚱맞게도 뜬금없는 도교 경전 원문을 실어놓았기에 뭔가 독자를 기만한다는 느낌까지 받게 되었다.
몇 해 전부터 나는 ‘다민족 국가에서 분쟁 없는 여러 종교의 공존은 어떻게 가능한가?’ 에 대해 구체적으로 글을 쓰고 싶었다. 그 조사 대상으로 도시국가인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등을 꼽고 있었다. 그리하여 내년에 혼자서 일주일 정도 싱가포르 자유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고 그 명분을 찾고 있던 차에 불쑥 그 계획을 던져버린 것이다. 아내 역시 살기 좋고 경치 좋으며 게다가 선진국이라는 싱가포르라는 나라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진작 말을 던져 놓고 이후론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아내는 여행사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며 싱가포르 여행상품을 찾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평소 가격의 반값으로 '땡처리'하는 싱가포르 여행상품을 찾았노라며 의기양양해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 기회에 한 번 가보자!"
항공사마다 부산에서 싱가포르까지 가는 정기노선이 없는 모양이다. 따라서 싱가포르 여행상품은 대부분 인천공항을 이용하는 모양인데 H투어라는 여행사가 500명이 타는 싱가포르 대형 전세기를 몇 대를 임대하여 수차례에 걸친 부산 ↔ 싱가포르 간의 직항 여행상품을 판매 중이었다. 그런데 날짜에 따라 때로는 모객(募客)이 되지 않아 염가에 판매 중인 상품이 있었던 모양이다. 금년 여름은 부부 양쪽이 바빠서 여름휴가를 사용하지 못했는데 이리하여 계획에는 없던 싱가포르 여행을 하게 되었다.
Ⅱ. 더 늙기 전에
어쨌든 책을 쓰기 위해 사전 조사를 해야겠다는 거창한 계획과는 무관하게 여행을 가게 된 것이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여행을 감행한 다른 동기도 있다. 지금의 내 나이는 젊은이들처럼 자유여행을 하기에는 만만찮은 나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항상 단체여행 상품을 구매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단체여행은 일행인 그 구성원과 불편하지 않은 상태여야 하는데 항상 민폐 끼치는 사람을 발견하곤 했다. 그것은 여러 유형이 있겠지만, 대다수의 구성원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분이 있는 경우 여행 내내 어색했던 경험도 그중의 하나다. 타인이 내게 불편을 주는 것은 감수할 수 있지만 나 자신이 누군가에 피해를 준다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 결과, ‘더 늙기 전에 가보고 싶은 국가를 여행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되었다.
이번 여행을 함께한 일행은 모두 23명이었다. 구성은 이랬다.
우리 부부를 필두로 시어머니와 며느리 둘과 슬하의 네 자녀로 이뤄진 가족, 노처녀 공무원 딸과 어머니, 엄마와 두 명의 초등학생 딸 , 영화감독과 자칭 시인인 중년 남자, 직장 선후배 사이인 아가씨 둘, 단체여행 애호가라는 중년의 부인들 일곱 명, 그리고……. 얼핏 보아도 한눈에 정체를 짐작할 수 있는 20대 후반의 깡패와 호스티스 아가씨 커플. 그러니까 단체여행 구성원은 전체 23명 중의 4명만 남자고 나머지는 모두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과거 1990년 초반, 에로 비디오 시장을 주름잡았던 '유호 프로덕션'의 에로물 '야시장'>
Ⅲ. 애로영화 감독과 시인
고향 친구인 두 남자, 영화감독과 자칭 시인은 한 명이 키가 크고 한 명은 작았다. 키 작은 영화감독이 내게 물었다.
“선생님은 학자이시지요?”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학자는 무슨 학자입니까? 그냥 그래 보였겠죠.”
“에이, 우리 나이에 척 보면 알지요. 말씨가 예사롭지 않잖아요. 그러니까 교수 아니면 교사시겠지요.”
나는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잘못 보셨네요. 저는 그냥 날라리랍니다. 하하”
키 작은 이는 자신이 영화 쪽의 일에 종사하고 있다고 소개했는데 예전에 비디오 가게가 있던 시절, 에로 비디오로 유명한 ‘유호 프로덕션’ 출신이라고 했다. 에로 비디오가 인기가 없어지는 통에 지금은 방송국 하청업을 하고 있다는데 유들유들한 모습이 매우 재미있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키가 큰 그의 친구는 자신이 시인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우리나라는 유독 모텔과 시인이 많은 나라인데 우째, 시집은 내셨습니까?”
라고 내가 묻자
“아,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선생님은 분명 학자가 맞아요. 시집은 못 내었고 그저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어제도 한 편 적었는걸요.”
라고 대답했다.
일행 중 주변에 모인 중년 부인들이 그 시를 읽어달라고 한마디씩 하니 용감하게도 수첩을 꺼냈다. 곁눈으로 보아 여러번 수정에 수정을 가한 메모를 또박또박 낭송하기 시작했는데 끝까지 귀 기울여 들으니 유행가 가사 비슷한 그것을 그간 상당량 습작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번 여행에는 단체여행이라는 상품을 이용하는 이들 중에는 ‘가족과 함께’가 아닌 친구들끼리 여행 온 이들이 유난히 많았다. 영화감독과 시인 외에도 중년 여성 세 팀이 그랬는데 한 팀은 이웃의 친한 언니 동생이, 또 한 팀은 고향 친구가, 나머지 한 팀은 여고 동창으로 세 명 모두 남편을 집에 두고 여행을 온 사람들이었다. 영화감독과 시인은 '물 만난 고기'처럼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일곱 명의 여성들에게 농담을 걸고 사진을 찍어주는 등의 호의를 표현해서 마지막 날에는 모든 중년여성들과 마치 한가족이라도 된 듯한 느낌이었다. 둘은 여행에서 처음 만난 이 중년여성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일이 예사였는데 ‘과연 저래도 될까’하는 생각은 나만의 것인지는 모르겠다. 영화감독의 유연하기 짝이 없는 여성 다루는 솜씨와 시인의 녹록치 않은 입담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행 이튿날부터 본격적인 투어가 시작되었는데 일행에서 항상 겉도는 한쌍의 남녀가 있었다. 남자는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없이 틈만 나면 여자의 허리를 감싸 안고 키스를 했으며 어떨 때는 짧은 치마나 바지에 드러난 미끈한 허벅지를 주무르기 일쑤였다. 미혼 남녀가 연장자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보이는 이런 모습을 이른바 “눈꼴사나운” 모습이고 '더러운 장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20대 후반의 그들은 부부로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깍두기 머리에 눈매가 매서운데다 콧수염을 가르고 있었고 여자는 초미니 치마나 핫팬티로 불리는 짧은 하의나 등짝이 다 파여진 상의만을 입었고 화장 역시 지극히 난했다.
일행에서 뒤처진 영화감독과 단 둘이 걸을 때 내가 물었다.
“저 젊은 사람 둘은 부부일까요?”
기다렸다는 듯 그가 대답했다.
“보면 모릅니까? 깡패와 술집 아가씨지요. 옆에서 봤는데 남자의 손이 크더군요. 매서운 눈빛하며 전형적인 깡패네요. 얼굴에 칼자욱도 있구요. 둘이 대화하는 것을 봤는데 여자도 짙은 화장과 교태 넘치는 말씨가 여염집 규수는 아니더군요.”
그도 나와 같은 판단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때 곽경택의 ‘친구’를 비롯해서 폭력배를 소재로 한 영화가 우후죽순처럼 극장가를 점령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조직폭력배를 미화하던 영화도 본질을 따져보면 건전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부류를 극으로 만든 사회문제의 일부일 따름이다. 일제강점기 전설처럼 존재했던 ‘김두한’이라는 건달의 향수 때문이었을까. 국가는 행정력을 동원해서 그들을 퇴치하려하지만 독버섯처럼 그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우리 주변에 남아있음을 알게 된다. 아무리 미화해도 깡패는 깡패일 뿐이기 때문이다.
Ⅳ. 일등 국가, 일등 국민
흔히들 싱가포르를 '일등 국가'로 부르고 그 국민을 '일등 국민'으로 부르는 것을 자주 들었다. 나는 그야말로 상대적이고 객관적이지 않은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쓰레기를 발견할 수 없는 깨끗한 거리, 계획적인 조경과 건물이 아름다운 도시의 풍경, 국가가 솔선한 결과 청년실업을 거의 발견할 수 없는 점 등은 인상적이었다. 도시국가 내 대기오염을 우려해서 자동차 구매에 과중한 세금을 물려서 공기가 깨끗하고 도로에 차량이 많지 않은 점, 음주와 흡연에 관대하지 못한 점, 공동체 절대다수의 삶에 방해가 되는 제반 행동에 엄격한 점 등은 본받을 만하다. 리콴유주의(李光耀 主義)라는 독재자가 만든 법률은 그들에게 정의일 것이다.
그러나 비판받아 보지 않고도 자명한 정의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끝없이 하게 된다. 그 어떤 주의(主義)건 간에 ,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화려한 선전과 이상의 겉치레를 하고 있건 그 본질은 국가 이기주의였을 것이다. 집단이건 개인이건 주의(主義)란 그것을 주장하는 자의 이익에 봉사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콴유는 지금도 무덤에서 말할 것 같다.
“어쨌든 내가 국민을 잘 살게 했으니 그 이기주의에 손가락질하지 말게들!”
Ⅴ. 세상은 넓고 별의 별 사람은 많다
용기 있는 사람들 혹은 단순한 사람들은 한쪽만을 선택해보고 그쪽만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집단 어떤 주장도 온전하게 선할 수 없는 것처럼 온전하게 악하지도 않은 것은 확실하다. 거기서 우리는 그 정도를 참고하여 어떤 선택을 하곤 한다. 그러나 매우 철저한 신념을 가진 사람은 미덥지 않은 그 정도의 차이에 현혹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한쪽에다 자기를 던지기를 거부한다. 이때 그 두 개의 상반된 집단이나 주장의 원들 사이에 겹치는 부분이 넓으면 넓을수록 그들이 설 자리도 넓다.
싱가포르라는 나라는 세계 경제의 불황 속에도 홀로 유아독존 식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이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를 양분하고 있는 두 개의 원은 이제 겹치는 부분이 없거나 없어져 가는 중이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지만 '절대선'을 공유하는 세상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여행을 마치고 귀국행 비행기에서 내려 김해공항을 빠져나와 택시 승차장으로 향할 때였다. 예의 깡패와 호스티스라고 불렸던 남녀가 앞에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언제 그랬냐 싶게 둘 사이의 거리를 유지한 채 걷고 있었다. 단체 여행상품을 살 정도였으니 대단한 급수의 깡패는 아니고 그냥 조무래기 양아치였을 것이다. 여자는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철부지 처자이거나 반복되는 생활에 지친 호스티스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말했지만, 이 여행을 통해 ‘세상은 넓고 별의 별 사람은 많다’라는 것을 또 다시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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