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인(老人)의 죽음
그가 죽었다는 뉴스는 신문, 방송을 망라해서 계속해서 언론에 보도되었다. 그는 중국이란 이국땅에서 쓸쓸히 삶을 마감한 것인데 보는 이에 따라서 ‘그’라는 인간이 가진 가치에 비해 과분하다고 할 정도의 조문이 이어졌다. 어쨌든 그의 부음은 며칠 동안 실시간 뉴스에 반영되고 있었다. 그의 빈소가 마련된 유명 대학병원 장례식장에는 정계, 재계, 학계의 거물급 인사들이 잇따라 방문해 고인에 대해 애도를 표했다. 대부분의 신문 기사는 유능한 경영인인 그가 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집안에서 파문당한 뒤 분을 삭히며 여생을 보낸 불우한 경영인이라는 표현을 대체적으로 쓰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죽었을 때 비로소 평가된다고 한다. 정치인이나 당대 신망을 받거나 인기를 얻던 공인의 경우가 그러하다. 그러나 그 사람이 죽고 난 후에 몇 십 년 몇 백 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평가를 받는 경우도 허다하다. 고흐의 경우 살아 생전 몇 점의 그림을 팔아보지 못했던 무명화가였다. 해방을 얼마 앞 둔 윤동주는 자비로 시집을 펴냈었고 이후 일경에게 구속되어 의문의 죽음을 당했으나 아무도 그의 죽음을 주목하지 않았다. 시대가 사람의 평가를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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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 휴무제가 도입된 이후 이틀 연속 휴일은 그런대로 좋다는 생각이지만 대체 휴일이 적용되어 3일 연속 휴일인 경우에는 그 3일이 길다는 느낌을 자주 갖는다. 지난 광복절 전후의 3일 연속 휴일도 그랬다. 그래서 상근은 하루를 영화 보는 날로 잡았는데 아내가 골라서 예약한 영화는 ‘베테랑’이란 제목의 영화였다. 매우 쓰릴 있는 영화이며 결말 부분에 와서는 카타르시스가 대단하다는 언론의 평이었는데 상근에겐 킬링 타임용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이와 비슷한 영화를 전에도 몇 번 보았기 때문으로 설경구가 출연한 ‘공공의 적’ 시리즈와 내용과 주제가 흡사한 것으로 여겨졌다. 굳이 차별점을 찾는다면 악마와 같은 재벌 2세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매우 실감났고 극 중에서 그가 자행하는 불법 행위가 일반인의 상상 범위를 뛰어넘는 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후 그것이 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전략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작년 모 항공사의 땅콩 회항 사건이나 금년 모 그룹이 보여준 ‘형제의 난’은 먹고 사는데 지쳐있는 일반 국민들에게 분노를 사게 한 점도 일조를 했음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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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초반, 초급 사원으로서 일할 때마다 바람이 생길 정도로 열심이었던 상근은 삼십대 초반이 되었고 회사에서는 과장 대리라는 직함을 부여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소속과에 울리는‘따르릉“ 울리는 전화를 당겨 받으니 누군가 무거운 목소리로 과장을 바꿔줄 것을 명령했다.
“실례지만 누구라고 전할까요?”
“빨리 바꿔! 이 새끼야!”
누군지는 모르지만 꽤 높은 사람인 듯했다. 상근이 넘긴 전화를 받은 과장은 사색이 되어있었다. 통화를 끝낸 그는 부장에게 내용을 보고하고 있었는데 회의 테이블이 마침 상근 옆자리에 있어서 그는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 하루가 지나자 그가 함구했음에도 그 내용은 사업부 내의 100명가량 되는 모든 직원이 아는 사건으로 되어있었다.
상근이 정리해 본 사건의 대략적인 개요는 이랬다.
한 달 전, 상근이 다니는 무역회사의 ○○물품 수입부서장 앞으로 중년의 신사가 찾아왔다. 그룹 총수 형님의 처가 친척이라는 것이었다. 신사는 자신이 운송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총수 형님의 청이니 해당 영업부서에서 수입하는 물량을 운송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영업부서의 책임자인 K부장 입장에서는 자신의 고유 업무에 고위층 연줄이 찾아와서 청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일언지하에 거절한 듯한데 같은 사무실 내의 동료들이 보기에도 그 표현이 좀 과했다.
“그가 누군지 모르겠고, 그가 내게 월급 주는 것도 아니고, 그가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할 위치도 아니고, 안됩니다!”
이것이 사건의 시발이 되었다.
소위 ‘왕회장’으로 불리는 총수의 친형이 한 부탁은 총수가 거느린 수많은 관계사 중 일개 회사의 간부에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고, 당사자의 발언에서 ‘그가’ 운운하는 내용이 그대로 보고되었을 것이다. 격노한 총수 친형은 일요일 아침 해당 부서로 전화를 걸었는데 마침 상근이 속한 부서의 P과장이 당직으로 근무 중이었던 것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이사 바꿔!”
라고 하자 P과장은
“누구십니까? 용건은 무엇입니까?”
라고 대응했다. 일개 과장이 임원이라는 높은 분에게 무조건 전화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누군지 무슨 용건인지를 대략이라고 확인하고 그것을 전하며 전화를 돌리는 것이 직장의 전화 예법이기 때문이다.
“나, 왕회장 ○○○이야! 그런데 너 뭐하는 놈이야?”
라고 하자 P과장은 장난 전화로 판단했다. 회장의 형이라니 그렇게 높은 양반이 비서를 통하지 않고 직접 전화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ROTC 출신으로 한 깡다구 한다고 평가받던 그는 곧장 반격에 나섰다.
“야, 이 자식아. 네가 왕회장이면 나는 대통령이야! 장난 전화질 하지 말고 빨리 끊어!‘
하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당시는 휴일이더라도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오전 열시 즈음에 상당수의 인원들이 출근하는 것이 상례였다. 이후 동일인으로부터 여러차례 전화가 왔는데 그에게 전화 받은 타 직원들 역시 P과장과 동일하게 대응했던 것이다.
며칠 후 전화를 건 문제의 인물은 ‘왕회장’으로 불리는 총수의 형 본인임이 확인되었다. 그룹 창업자의 맏아들, 비운의 황태자 아무개. 다음날 그의 비서이자 집사 역할을 하는 이가 사업부에 찾아와서 사업부장인 이사를 만났다. 소위 왕회장은 두 차례에 걸쳐 자신에게 불손하게 대한 직원들을 직접 친국1(親鞫)할 것임을 통지했다. 첫째는 일요일 자신이 건 전화에 못 알아 본 직원 4명이었고 둘째는 제3자를 통해 자신을 모욕한 K부장을 친히 문초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두 차례의 만남은 약 일주일 간격으로 이루어졌다. 4명 중 1인으로 호출을 당한 P과장은 그에게 닥쳐오는 두려움을 상근에게 이렇게 피력했다.
“소문을 들으니 전에도 누군가 그에게 말대꾸하다가 골프채로 머리를 맞아서 입원했다는데...”
첫 번째 부류와의 만남은 회사에서 멀지 않은 교외의 그룹 소유 골프장의 접견실에서 이루어졌다. 집사가 방 내부에 있는 유리 재떨이나 골프채 등 무기가 될만한 것을 치운 상태였다고 했다. P과장을 비롯한 4명의 직원은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빈 끝에 다행히 폭행을 면했다.
그것으로 그 사태가 마무리되는 줄 알고 사업부 간부들은 안도했으나 그는 집요했다. 두 번째의 친국, 즉 K부장을 자신의 별장으로 올 것을 요구했다. 이제야 사업부장인 H이사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파악했다. 그러나 오너 형님의 호출을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H이사는 사태가 확대될 것을 우려해 K부장의 직속 부하인 C과장을 동행케 했다. C과장은 185cm가 넘는 장신으로 운동으로 다져진 몸매의 소유자인데 상근에겐 대학 선배이기도 했다.
그들이 ○○시 인근의 교외에 위치한 그의 별장에 다녀온 결과는 실로 참담했다. 그를 만나러 정장 차림에 흰 드레스셔츠를 입었던 둘의 옷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한 시간 동안 K부장에게 주먹을 날렸고 K부장은 두 팔로 얼굴을 가린채 일방적으로 맞기만 했다고 했다. 그의 주먹에 K부장의 안경이 깨어지고 유리에 피부가 찢어져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말리던 C과장 역시 피투썽이가 되었던 것이다.
‘카더라’ 소문으로 그날 그곳에서 일어난 내용을 알게된 사업부 직원들은 아연실색했다. 사업부장인 H이사는 내용을 요로(要路)로 보고한 모양이었는데 결과는 이렇게 정리되었다. 동생인 그룹 총수는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내가 K부장에게 대신 사과말 한다고 전해달라.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
그렇게 해서 그 사건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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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상근이 속해 있던 부서의 부장은 그의 얼굴을 보며 이렇게 혼잣말을 했다.
“60년대에 ‘유리성’이라는 소설이 있었어. 시중에 판매 중이던 것을 그룹에서 전량 매입해서 폐기했지만 말이야. 그때는 그가 아버지와 동생에 의해 제거된 정의롭고 훌륭한 사람으로 되어있었지. 저런 사람인지 누가 알았겠나…….”
정신병원 병동에 정통한 이들에 의하면 어느 병원이든 그곳에는 자신을 '○○그룹 회장의 자식'이라고 소개하는 이가 있다고 한다. 의사들은 이러한 경우를 '망상 장애'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아버지가 대통령, 안기부장이란 환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은 재벌 회장들이 등장하는데 사회적 권력이 옮겨감에 따라 대상이 달라지는 실례라고 했다.
'베테랑'이란 영화를 단순히 재벌과 경찰의 싸움으로 국한할 수 없는 것도 그런 사회적 분위기 탓일 것이다. 어쨌든 세상의 을(乙)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어떻게 갑(甲)을 이길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가업을 승계받지 못했고 법적으로도 동생이 물러받은 아버지의 회사와 무관한 이였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일군 회사들은 심리적으로는 자신의 회사였고 그러한 자신에 무엄한 이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망상 장애'를 겪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후 상근은 같은 그룹 타 관계사에 근무 중인 이들로부터 그가 행한 비슷한 유형의 많은 사례들을 들을 수 있었다. "정의가 없다면 인간은 수치다"라고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지만, 마찬가지로 그도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법적으로는 아니지만 정서적으로는 자신은 '왕회장'이었고 이를 무시하는 이들에게 상식 밖의 잔인한 린치를 가한 것은 자신만의 방식인 정의 구현 방식이었을 것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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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근이 바로 옆에서 생생하게 보았던 거짓말 같은 그 사건은 요즘이었으면 '땅콩 회항 사건'의 몇 십 배 폭발력 있는 화제가 되어 만인의 공분을 사게 되었을 것이다. 당시는 이런 세상이 아니었으니 어쩌겠는가. 지금 와 생각해보니 K부장은 임원이 되고 싶어서 그 일을 더이상 문제 삼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후 그가 임원이 되었다는 소문을 상근은 듣지 못했다.
며칠 전 모 신문의 논설위원은 지면을 통해 '영화 '베테랑'은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관객이 1100만을 넘어선 것은 한국 사회가 얼마나 정의에 목말라 있는지 말해준다.'라고 평했다. 상근은 그 기사를 읽으며 혼자서 웃고 말았다. '현실의 인생살이가 소설보다 더 극적이다'라는 표현이 있다. 상근이 그 영화를 본 후에 자주 생각하는 옛기억이다.
- 임금이 중죄인을 몸소 신문하던 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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