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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강성은 시집『단지 조금 이상한』

by 언덕에서 2015. 10. 14.

 

 

 

 

 

강성은 시집『단지 조금 이상한』

 

 

 

 

 

 

이 시집『단지 조금 이상한』은 시인 강성은1의 두 번째 시집이다. 여기에 수록된 시들은 특유의 초현실적인 상상력으로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잠 속에서 꿈꾸는 자아는 의식을 잠정적로 중지시키고 기억을 넘어서는 근원적인 시간을 탄생시킨다. 무의식에서 생겨난 주체는 좀 더 잠재적이고 근원적인 감각으로 자신을 관찰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된 나를 응시하고 기술한다. 매순간 일상과 조금 다른 시간 속에서 자신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서일까?

 

 

 

 

 

 이 시집 속의 작품들은 과도한 수사 없이도 환상적인 공간을 그려낸다. 잠에서 깨어난 뒤 여전히 살아 있는 우리들 삶의 낯섦을 자극하는 이미지들이 다가온다. 그래서 시가 주는 이미지는 놀랍고 두렵다. 흔히들 부조리한 상황을 보여주면 아이러니가 앞서거나 기지와 위트가 결합하게 마련인데, 이 시인의 시에서는 부조리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어 특이하기 짝이 없는 세계가 느껴진다.









환상의 빛


옛날 영화를 보다가

옛날 음악을 듣다가

나는 옛날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생각했다


지금의 나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너무 멀리 와버렸구나 생각했다


명백한 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몇 세기 전의 사람을 사랑하고

몇 세기 전의 장면을 그리워하며

단 한 번의 여름을 보냈을 뿐인데

내게서 일어난 적 없는 일들이

조용히 우거지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


눈 속에 빛이 가득해서

다른 것을 보지 못했다


 


 







환상의 빛

 

등 뒤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았다

희고 가녀린 손으로

입속에서 허연 김을 내뿜으며

나는 손가락을 뻗어

뿌연 유리창 위에 밤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갔다

겨울의 다른 이름들을 써내려갔다

창밖으로 몽유병의 신부와 들러리들이 맨발로 흰 드레스를 끌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두운 거리는 밤새 골목을 만들었다가 숨겼다

어째서 머리칼은 계속해서 자라고 창밖의 폭풍은 멈추지 않는 걸까

드우디에서 악령들이 내 긴 머리를 땋는다

희고 빛나는 물을 뚝뚝 흘리며

낮은 중얼거림으로

어째서 이 밤에는 저 오래된 거리에는

내 몸속에는 불빛 하나 켜지지 않는 걸까

예감으로 휩싸인 계절은 연속 상영되고

새들은 지붕 위에서 오래 잠들어 있다

감기약을 먹고 나는 다시 잠들겠지만

먼지는 밤사이 도시를 또 뒤덮을 것이고

내가 잠들면 시작되는

이 겨울밤의 자막은

내가 쓴 이름들과 기호들과

본 적 없는 빛의 알 수 없는 조합

나는 끝내 읽지 못한다

 











환상의 빛 
 

긴 잠에서 깨어난 외할머니가

조용히 매실을 담그고 있다

긴 잠을 자고 있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나는 차를 너무 많이 마셨나

눈물에 휩쓸려 바다까지 떠내려갔나

하루는 거대해지고

하루는 입자처럼 작아져 보이지 않는다


아픈 내 배를 천천히 문질러주듯

외할머니가 햇볕에 나를 가지런히 말린다

슬퍼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본 적 없는 신을 사랑해본 적도 있다

본 적 없는 신을 그리워해본 적도 있다


그저 외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

긴 겨울을 여행하고 싶었을 뿐인데


긴 잠에서 깨어난 내가 눈물을 참는 사이

밤하늘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이 내려오고 있다


저 눈이 녹으면 흰 빛은 어디로 가는가*


*셰익스피어





 







기일(忌日)


버려야 할 물건이 많다

집 앞은 이미 버려진 물건들로 가득하다


죽은 사람의 물건을 버리고 나면 보낼 수 있다

죽지 않았으면 죽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를 내다 버리고 오는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것만 같다


한밤중 누군가 버리고 갔다

한밤중 누군가 다시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있다


창밖 가로등 아래

밤새 부스럭거리는 소리






 





겨울밤 왕의 잠은 쏟아지고


겨울이 긴 왕국에서

왕은 침대 속에서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다

아내들이 줄줄이 죽고

일 년 내내 제사를 지내야 했지만

잠은 쏟아지고

그 누구도 왕의 슬픔에 다가가지 못했지만

백성들은 왕을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왕이 없으면 왕국도 없는데

잠은 쏟아지고

겨울이 없으면 봄도 없다고

잠이 없으면 꿈도 없다고

파도처럼

잠은 쏟아지고

이 겨울밤의 이상함은 어디서 오는가

잠든 왕의 슬픔이 도처에서 쏟아지는데




 



 

 

 



단지 조금 이상한


아직 이름이 없고 증상도 없는

어떤 생각에 빠져 있을 땐 멈춰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시 생동하는 세계와 같은


단지 조금 이상한 병처럼

단지 조금 이상한 잠처럼


마음 속에서 발생하는 계절처럼

슬픔도 없이 사라지는


위에서 아래로 읽는 시절을 지나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읽는 시절을 지나

이제는 어느 쪽으로 읽어도 무관해진

노학자의 안경알처럼 맑아진


일요일의 낮잠처럼

단지 조금 고요한

단지 조금 이상한

 

 

 

 

 

 

  1. 1973년 11월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책과 음악이 끌어준 길을 따라오다 보니 시를 쓰게 되었고 여전히 책과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 겨울을 좋아하고 눈 내리는 풍경을 좋아한다. 잠을 많이 자고 꿈을 많이 꾼다. 세계의 다양한 캐럴 음반 컬렉션을 갖는 것이 꿈이다. 스물일곱, 심심해서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이후로 홍대 인근에서 십여 년째 살고 있다. 2005년 문학동네 「12월」 외 5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가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