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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박경리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by 언덕에서 2015. 6. 24.

 

 

 

 

박경리 유고 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요즘에는 눈만 뜨면 글을 쓰고 싶다. 글도 참 잘 써진다”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생애 마지막 작업으로 써내려갔던 유작 시 39편을 시집으로 엮은 책이다(2008년 마로니에북스). 이 책『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고 남아 있는 모든 기운을 사르며 그가 남긴, 스스로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미발표 시 36편과 3편의 시를 더한 총 39편의 시, 그리고 젊은 시절과 일상을 담은 사진 30여 컷이 수록된 유고시집이다.

 자신에게 매우 엄격하였지만, 또 가장 자유인이기를 소망하였던 인간 박경리의 모습이 담긴 마지막 노래들은 무거웠던 생의 발걸음들을 하나씩 털어내듯 잔잔하게 퍼져간다. 읽는 이로 하여금 그리움 속에 작은 울림을 전해준다.

 

 

 

 

 

 

 

 

 

 

어머니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는

사별 후 삼십여 년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할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그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 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이 찢겨나가는 듯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환

불효막심의 형벌로써

이렇게 나를 사로잡아 놓아주지도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옛날의 그 집 ​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훵텅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인생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등교하려고 집을 나서면

가끔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조막만 했고

입을 굳게 다문 노파였는데

가랑잎같이 가벼워 보였으며

체구는 아주 작았다

언덕 위 어딘가에 오두막이 있어

그곳에서 혼자 기거한다는 것이었다

지팡이를 짚으며 그는 지나간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밥을 빌어먹기 위해

노파는 이 길을 지나간다는 것이다

 

작량을 잘했으면 저 꼴이 되었을까

젊었을 적에는 쇠고기 씹어 뱉고

술로 세수하더니만

노파 뒤통수를 향해

그런 말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젊었을 적엔 노류장화였던걸까

명기쯤으로 행세했던 걸까

노파는 누가 뭐라 해도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았다

지팡이로 길을 더듬으며 내려가던 뒷모습

물보라는 이름의 노파

 


 

 

 

 

 

 

 

안개 

 

회촌 골짜기 넘치게 안개가 들어차서

하늘도 산도 나무.계곡도 보이지 않는다

죽어서 삼도천 가는 길이 이러할까

거위 우는 소리

안개를 꿇고 간간이 들려온다

살아 있는 기척이 반갑고 정답다

 

화촌 골짜기의 생명 그 안스러운 생명들

몸 굽히고 숨소리 가다듬고 있을까

땅 속에서도

뿌리와 뿌리 서로 더듬으며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있을까

 


 

 

 

 

 

 

 

 

산다는 것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 들면

바쁜 듯이 뜰 안을 왔다 갔다

상처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고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약도 죽어라 안 먹었다

인명제천

나를 달래는 데

그보다 생광스런 말이 또 있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마다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때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 당연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