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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최영철 시집 『금정산을 보냈다』

by 언덕에서 2015. 8. 5.

 

 

 

 

최영철 시집 『금정산을 보냈다

 

 

 

 

 

 

이 시인은 꾸준한 작품 활동을 해오면서 시집과 산문집, 청소년 소설 등을 통해 인간을 포함한 삼라만상의 평등한 가치와 존엄을 그려내고 있다. 그가 그리는 대상들은 대부분 배려와 소통으로 화해롭게 조우하지만 최근 작품은 상처받고 버려진 타자들의 갈등에 주목하고 있다. 이 시집은 생성과 파멸, 환희와 비명이 교차하는 시편들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은 물질과 속도에 중독된 우리에게 마주해야 할 세계의 진면목은 무엇인지 어둠을 직면하며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진다.

 최영철1 시인의 시 [금정산을 보냈다]는 아들이 중동 갈 적에 가슴 주머니에 쥐어 보낸 무언가에 대해 쓴 것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금정산은 화려한 산은 아니지만 부산 사람들에게는 언제든지 마음먹으면 갈 수 있는 넉넉한 산이다. 시인은 아들이 나고 자란 부산의 모태와도 같은 금정산을 시로 선물한다.

 금정산은 우리를 품은 자연 같기도 하고, 그 자연이 머금고 있는 어떤 적막 같기도 하고, 힘 넘치는 거친 청년과 삶을 다독거리며 이모저모를 모색하는 중년 같기도 하다. 시인은 고지가 없는 사막에서도, 밀려오는 파국에도 우리가 지켜야 할 세계가 무엇인지 시로 당부한다.


 

 

 

 

 

 

 

 

 

 



서면 천우짱(天優莊)


지금도 서면 천우장 앞이라고만 하면 다 통한다

삼십 년 넘은 약속장소

비밀스런 상처를 서로 덧내지 않으려고

누구도 ‘그거 옛날에 없어졌잖아’ 하고 말하지 않는다

천우장 앞에서 시작하고

끝낸 사랑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십 년도 전에 이십 년도 전에, 그 전의 전에도

천우장이라는 고급 음식점에는

도통 들어가 본 적이 없지만

서면 천우장 앞이라고 하면 다 통한다

그 길목 모퉁이 엉거주춤

어떤 자세로 서 있으라는 건지도 다 통한다

큰길 버스 내리는 녀석의

구부정한 어깨가 잘 보이는 지점

저쪽 뒤편 시장골목을 지나

치맛자락이 나풀대며 걸어오는 지점

서면 천우장 앞은 그렇게 걸어온 것들이 와서 멈추는 곳

주머니에든 몇 닢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한번은 환하게 달려와 줄 것 같은

사랑을 하염없이 기다린 곳

없어진지 오래인 서면 천우장

그때 매정하게 돌아서 간 청춘이 불쑥 돌아올 것 같아

푸른 시절이 걸어 나간 길 저편을 악착같이 바라보며

조금 두둑해진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데

천우장 자리 들어선 새 건물 삼층 천우짱 노래방이

하염없이 목을 빼고 있는 첫사랑을 비틀고 있다

천우짱 천우짱 숨 가쁜 맥박소리로

쿵덕쿵덕 흘러간 세월을 비틀고 있다

 


 

 

 

 


 



문이 생기고 난 뒤


문이 없었을 때는 아무 일 없었다

문이 없었을 때는 열고 닫고 잠그고 부수고

몰래 넘어갈 일 없었다

모두 문이요 모두 안이요 모두 밖이었으니

들어오시오 나가시오 들어오지 마시오 나가지 마시오

문이 없었을 때는 이런 말도 없었다

고독 불안 단절 공포 잠입 점령 탈출

엿듣지 마 엿보지 마 문이 없었을 때는

이런 말도 없었다

바야흐로 금세기 모든 재앙은

오래전 안팎을 나누고 알뜰하게 문을 잠그면서 시작되었다

커다란 자물쇠와 열쇠로 버티고 서서 합격 불합격 입장 퇴장 상승 하강

다시 오시오 돌아서 가시오 다른 방법으로 오시오 다시는 이 근처 얼씬도 마시오

판정 내리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바야흐로 그 문을 넘어보고 싶어 밀쳐보고 싶어 넘보고 싶어 부수고 싶어 벼르고 벼른 사이

아무 생각 없던 생각이 꼬리친 생각의 오합지졸들이 용기백배

도둑 강도 강간 살인으로 세를 불리면서 시작되었다

안에 무엇이 있는지 기웃거린 사이 무엇이 있기에 저리 문 꽁꽁 닫아걸었나 엿보는 사이

문제의 싹이 손을 내밀었다

궁금해 미치기 일보 직전

모두 문이 아니고 모두 안이 아니고 모두 밖이 아니게 되었을 때

어디가 어딘지 몰라 다들 기웃거리게 되었을 때

참 이상하게도 문이 너무 많이 생기고 나서

긴 파국은 시작되었다  

 


 

 

 

 

 



한때 시


그때는 뜨겁고 생생했으나

그때는 서로 앞서가겠다고 야단법석이었으나

마을 입구 공동수도 끝없이 줄선

양동이 다 채우고도 철철 넘치던 봇물이었으나

산동네 꼭대기까지 나누어 쓰던 한 바가지 선심이었으나

비수처럼 번득이던 표적이었으나

잠든 그대 머리통 쥐도 새도 모르게 지나간 기별이었으나

이제는 흘러갈 곳 잃은 도랑물

천리길 한달음에 와놓고 남은 백리 앞에 주저앉은

아무도 받으러 오지 않는 헌혈 차량의 사과 반쪽

부끄럼만 늘어난 미지근한 침묵

출처를 알 수 없는 비행물체로 진화한

겨울 탕자 당신만이 입 훔치는 후식

이 엄동설한 떨지도 않고 배회하는 해독 불능의 허기

그래, 좋아, 죽어도, 당신만이 받아먹고 배 두드리다

어디 먼 곳 적선할 수도 내다버릴 수도 없게 된 미지근한 정표

그래도 괜찮다고 찾아오셨으니 천천히 꼭꼭 씹어

천리만리 가시다 배고픈 동무 만나면

아직 저 길모퉁이 끝집 아무 술꾼이나 받아주는

만만한 주막거리 하나 있더라 전해주시길

다 타버린 꽁초로 떠내려가다

마지막 남은 재로, 흐릿한, 문질러진 자국

 



 

 

 

 


 

 

 


향긋한 양극화


배추 한 포기 오백원입니다 허리 한 번 숙인 값 오원입니다 땅을 향해 절한 값 오원입니다 비지땀 한 방울 오원입니다 도어보이 치어걸 하루 삼만원입니다 허리 숙여 웃어준 값 삼원입니다 어서 오라 또 오라 인사한 값 삼원입니다 손 한 번 내어준 값 십만원입니다 가슴 한 번 드러낸 값 백만원입니다 지랄발광 물리치지 않은 값 천만원입니다 요리조리 배팅 한 번 억입니다 아무렇게나 내던져 굴러온 십억입니다 밑져도 그만이라고 던져놓은 수백억입니다 한 끼 오백원입니다 저 흑장미 요염한 웃음 한 번 억입니다 백의 눈물과 억의 웃음 뼛속 깊이 사무칩니다 그 먼 거리를 넘나드느라 세상은 이토록 바쁘고 아득합니다 그 먼 거리를 은폐하려고 세상은 이토록 빛나고 향긋합니다

 


 

 

 

 

 

 

 

 



하얄리아부대2 -1950년-2006년


집과 학교 사이 가로막고 있던 하얄리아부대

하루 두 번 빠른 길 두고 빙 돌아 오가며

세상에는 바로 지나갈 수 없는 길이 있다는 걸 알았다

지름길 막아선 총부리에 걸려

엎어지면 코 닿을 길을 빙빙 돌아서 갔다

내일까지 외어야 할 영어단어 중얼거리며

머리와 가슴은 모국어로 빚어야 할 시 생각뿐이었다

부대를 관통한 길로 다른 나라는 제집처럼 드나들었지만

우리나라는 아무도 그 길을 통과하려고 하지 않았다

딱 한번만 가보자고 우기지도 않았다

어른들은 빠르고 바른 길을 다 잊어버린 듯 했다

수업시간 벌서며 내려다본 병영은

알파벳이 우쭐대며 날아다니는 비밀 요새였다

스무 살 무렵 부대 담벼락에 오줌을 갈기기도 했으나

언젠가부터 나는 그 길을 피해서 걷고 있었다

밤이 되면 앞집 옆집 양공주들이 붉은 등으로 걸리고

양키들이 낄낄대며 그 등을 하나씩 거두어갔다

버터냄새 풍기는 불빛들이 다 잦아든 뒤에도

양공주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십년 훌쩍 지나 길은 뚫렸지만

동강 난 길은 여전히 이어지지 않았다

 


 

 

 

 



지옥천국 천국지옥


지옥지옥 천국천국 만원

미안하지만 더 받을 손님 없음

미안하지만 더 내보낼 손님 없음

급한 대로 내일은 천국행 쾌속질주

급한 대로 글피는 지옥행 쾌속질주

즉결심판장이 꽉 차

재수없으면 오늘은 모두 천국

운수대통 내일은 모두 지옥

죽고 싶어 안달 난 사람 할 수 없이 천국

살고 싶어 애가 탄 사람 할 수 없이 지옥

어딜 가나 지옥천국 천국지옥 만원

지긋이 눈감고 묵비권만 행사해도

오늘까지 이승저승 내일까지 저승이승 만원

하루는 하품만 나오는 천국

하루는 신바람 나서 미쳐버릴 지옥

오늘 같은 내일이 절대 없을 천국지옥

내일 같은 오늘이 꿈에도 없을 지옥천국

 


 



 



금정산을 보냈다 
 

언제 돌아온다는 기약도 없이 먼 서역으로 떠나는 아들에게

뭘 쥐여 보낼까 궁리하다가

나는 출국장을 빠져나가는 녀석의 가슴주머니에 무언가

뭉클한 것을 쥐여 보냈다


이건 아무 데서나 꺼내 보지 말고

누구에게나 쉽게 내보이지도 말고

이런 걸 가슴에 품었다고 함부로 말하지도 말고

네가 다만 잘 간직하고 있다가

모국이 그립고 고향 생각이 나고 네 어미가 보고프면,

그리고 혹여 이 아비 안부도 궁금하거든 이걸 가만히 꺼내놓고

거기에 절도 하고 입도 맞추고 자분자분 안부도 묻고

따스하고 고요해질 때까지 눈도 맞추라고 일렀다


서역의 바람이 드세거든 그 골짝 어딘가에 몸을 녹이고

서역의 햇볕이 뜨겁거든 그 그늘에 들어

흥얼흥얼 낮잠이라도 한숨 자두라고 일렀다

막막한 사막 한가운데

도통 우러러볼 고지가 없거든 이걸 저만치 꺼내놓고

그윽하고 넉넉해질 때까지 바라보기도 하라고 일렀다


그 놈의 품은 원체 넓고도 깊으니

황망한 서역이 배고파 외로워 울거든

그걸 조금 떼어 나누어줘도 괜찮다고 일렀다

그렇게 쓰다듬고 어루만지며 살다가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때는

무엇보다 먼저 그것부터 잘 모시고 와야 한다고 일렀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네가 바로 그것이라고 일렀다

이 아비의 어미의 그것이라고 일렀다.

 

 

 

 

 

 

  1.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성장했다. 1984년 무크 [지평], 무크 [현실시각],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등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가족사진] [홀로 가는 맹인악사] [야성은 빛나다] [일광욕하는 가구] [개망초가 쥐꼬리망초에게] [그림자 호수] [호루라기] [찔러본다], 육필시선집 [엉겅퀴], 어른을 위한 동화 [나비야 청산 가자], 성장소설 [어중씨 이야기], 산문집 [우리 앞에 문이 있다] [나들이 부산] [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을 냈다. 백석문학상, 최계락문학상, 이형기문학상을 받았다 [본문으로]
  2. 캠프 하야리아 (캠프 하이얼리어, Camp Hialeah)는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범전동 및 연지동에 설치되어 있는 주한 미군의 기지였다. 면적은 약 543,360 제곱미터이다.(약 0.543제곱킬로미터)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경마장으로 사용하다가 1945년 UN 기구,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주한 미군 부산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2006년 8월 10일 공식적으로 폐쇄되었고[1], 이후 주한 미군과 반환 협상이 이어지다가 2010년 1월 27일 부산시에 반환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