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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by 언덕에서 2015. 12. 28.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뭐니 뭐니 해도 올해 우리 사회를 지배한 키워드로 ‘불안’이라는 낱말일 것이다.

 작년의 세월호 사건의 여파를 필두로 해서 전국민을 전염병 공포로 몰아넣은 메르스 사태, 청년실업과 정리해고, 비정규직 확산에 따른 고용 불안에다 외국에서 잇따라 터진 테러까지 불안이 몸과 마음과 일상을 흔든다. 고단하고 또 고단하다.

 시대의 거울이자 초상으로서 문학은 ‘헬조선’의 절망을 비췄다. 올해 한국 소설 최고의 화제작인 장강명 장편소설 ‘한국이 싫어서’가 그렇고, 미움 받지 않으려면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흔한 충고와는 반대로 미움 받아도 괜찮으니 용기를 내어 행복해지라는 아들러의 심리학을 대중적으로 소개한 ‘미움 받을 용기’가 그렇다.

 용기를 내야만 겨우 살아낼 수 있는 세상은 좋은 세상이 아닐 것이다. 근본적인 해법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겠지만, 그럴 수 없기에 이 책들은 사회적 행동보다 개인적 결단을 요청한다. 한없이 연약해진 자아를 단단한 호두껍데기로 감싸보려는 안타까운 몸짓이도 하다.

 2012년 출간된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다』가 2015년 베스트셀러가 된 데에는 TV의 힘이 컸지만 그 전부터 박준의 시는 트위터나 페이스 북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는 시였다.

 그는 전위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이미지 대신 서정과 서사를 주무기로 삼는 젊은 시인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처럼 보이면서도 독특한 이미지를 구현해내고 있다.  좌절할 수밖에 없는 요즘 젊은이들의 심경을 그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적어가고 있다. 서정이 사라져 버린 시대에서 서정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서글프지만 환영할 일이다. 먼 세계의 일처럼 느껴지는 따뜻하고 조곤조곤한 시어(詩語)가 글을 읽을 수 있는 모든이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이다.

 


 

 

 

 


 


 

옷보다 못이 더 많았다

 

그해 윤달에도 새 옷 한 벌 해 입지 않았다 주말에는 파주까지 가서 이삿짐을 날랐다 한 동네 안에서 집을 옮기는 사람들의 방에는 옷보다 못이 많았다 처음 집에서는 선풍기를 고쳐주었고 두 번째 집에서는 양장으로 된 책을 한 권 훔쳤다 농을 옮기다 발을 다쳐 약국에 다녀왔다 음력 윤삼월이나 윤사월이면 셋방의 셈법이 양력인 것이 새삼 다행스러웠지만 비가 쏟고 오방(五方)이 다 캄캄해지고 신들이 떠난 봄밤이 흔들렸다 저녁에 밥을 한 주걱 더 먹은 것이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새벽이 지나도록 지지 않았다

가슴에 얹혀 있는 일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유성고시원 화재기

 

출입구 쪽 벽면을 제외한 3면이 옹벽 또는 내력벽으로 된 경우에도 가로균열은 사소한 겁니다 ‘실내에서는 정숙해 주세요’ 표어를 끼고 돌면 고시원 총무실이 있었죠 총무는 멸망의 법문들을 속기하고 있었습니다 느리게 발톱을 깎는 것은 일종의 예비행위로 보여지는 바, 이 앞을 지나는 고시생들은 소음, 진동규제법 개정시행령을 되새깁니다 슬리퍼는 절대로 끌지 아니 합니다 재산권을 일부 상실한 호주(戶主)로부터 걸려온 전화에서는 누룩내가 났습니다 일몰 후로 기억합니다 저는 짐을 꾸렸습니다 이번 달은 창이 없는 호실로 갑니다 짐을 운반하는 도중, 과실로 법전 제27페이지 내지 제32페이지의 일부를 손괴하였습니다 접착 테이프를 빌리러 총무를 찾아갔을 때 별다른 점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총무는 채점을 하다말고 잠이 들어있었습니다 매년 이차에서 떨어졌던 그도, 탈출해 나왔다면 내년쯤에는 아마 이등병이 되었을 겁니다 그나저나 왜 결핍의 누대(累代)에는 늘 붉은 줄이 그어졌는지 알고 계실까요? 3층에 사는 목덜미가 허연 여자들이 이차를 마치고 돌아온 듯했습니다. 공동주방실에서 부치는 달걀냄새가 온 방실을 점유하고 있었죠 스탠드등이 나가고 소방벨이 울린 것은 그때였습니다 누전이나 방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단지 그동안 울먹울먹했던 것들이 캄캄하게 울어 버린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중 략-

 

 위의 사람은 유성고시원 화재사건에 관하여 이와 같이 진술하는 바이며 진술내용이 목격 사실과 다를 경우 어떠한 처벌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나의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

 

창문들은 이미 밤을 넘어선 부분이 있다 잠결이 아니라도 나는 너와 사인(死因)이 같았으면 한다

 

이곳에서 당신의 새벽을 추모하는 방식은 두 번 다시 새벽과 마주하지 않거나 그 마주침을 어떻게 그만두어야 할까 고민하다 잠이 드는 것

 

요와 홑청 이불 사이에 헤어 드라이어의 더운 바람을 틀어넣으면 눅눅한 가슴을 가진 네가 그립다가 살 만했던 광장(廣場)의 한때는 역시 우리의 본적과 사이가 멀었다는 생각이 들고 나는 냉장고의 온도를 강냉으로 돌리고 그 방에서 살아 나왔다

 

내가 번듯한 날들을 모르는 것처럼 이 버튼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서 맥주나 음료수를 넣어두고 왜 차가워지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의 낯빛을 여관의 방들은 곧잘 하고 있다

 

"다시 와, 가기만 하고 안 오면 안 돼"라고 말하던 여자의 질긴 음성은 늘 내 곁에 내근(內勤)하는 것이어서 나는 낯선 방들에서도 금세 잠드는 버릇이 있고 매번 같은 꿈을 꿀 수도 있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