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시집 감상

이병률 시집 『바람의 사생활』

by 언덕에서 2015. 6. 10.

 

 

 

 

이병률 시집 『바람의 사생활

 

 

 

 

 



비장한 그리움과 기다림의 시어들이 절제된 감성으로 빛나는 시집이다. 가닿을 수 없는,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함부로 이야기할 때 그리움과 기억의 원형은 훼손된다. 이 시집 속의 시편들은 사실은 왜곡되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섣부른 감상을 뛰어넘어 한 생애의 쓸쓸함과 어긋나기만 하는 인연에 대해 천착한다. 그리고 기다리고 견디는 법을 극지까지 다다르는 여행과 풍경들을 통해 눈부시게 형상화해낸다.

 누군가 그의 시를 이렇게 평했다.

 “이병률1은 헤어짐의 풍경, 공기, 기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면서 ‘헤어짐을 짓는’ 시인이다(신형철).”

 단독자의 외로움을 품고 쉬지 않고 길을 떠나는 시인이 들려주는 시의 갈피마다 남아있는 생과 사에 걸친 사랑과 이별, 기다림, 침묵은 적막하고 쓸쓸하다.




 

 

 

 

 

 


 



바람의 사생활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 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도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엇이 대신해줄 것 같지 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 차가와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 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 년 흘렀을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저녁 풍경 너머 풍경


일 마치고 돌아오는 길가 황혼에 눈길을 주다 보면 저 멀리 풍경이

강가에 다리 놓는 모습 보입니다


강 저편에서 강 이편으로, 강 이편에서 강 저편으로 서로 각자의

기둥을 놓고 손을 내뻗는 모습에 무작정 속이 아리다가도 그 속도가

아름답기도 하고 장해 보이기도 하여 창자가 휘둘립니다


며칠에 한번 쯤 통장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神은 자꾸 자리를

만들고 허문다는 생각입니다


많은 당신들도 지워졌으므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당신은 당신들의

장엄한 일들을 해야 합니다


당신도 목숨 걸고 자본주의의 풍경이 되는 일을 합니까


한 풍경이 등짐 지고 일 갔다 돌아옵니다


자꾸 먼 데를 보는 습관이 낸 길 위로 사무치게 사무치게 저녁은 옵니다


다녀왔습니다

 





 

 

 

 


동유럽 종단 열차

왜 혼자냐고 합니다

노부부가 호밀빵 반절을 건네며

내게 혼자여서 쓸쓸하겠다 합니다

씩씩하게 빵을 베어물며

쓸쓸함이 차창 밖 벌판에 쌓인 눈만큼이야 되겠냐 싶어집니다

노부부는 내리고 나는 잠이 듭니다

눈을 뜨니 바깥에는 눈보라치는 벌판이

맞은편에는 동양 사내가 앉아 나를 보고 있습니다

긴긴 밤 말이 많던 사내가 아침이 되어서야

자신은 베트남 사람인데 나더러 일본사람이냐고 묻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을 뿐 그에게 왜 혼자냐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 어디를 가냐고 물으려다 가늠할 방향이 아닌 듯해 소란을 덮어둡니다

큰 햇살이 마중나와 있는 역으로

사내는 사라지고 나는 잠이 듭니다

매서운 바람에 차창은 얼고 풍경은 닫히고

달려도 달려도 시간의 몸은 극치를 향해 있습니다

바르샤바로 가려면 이 칸에 있고

프라하로 가려면 앞 칸으로 가라고 차창은 말 하는 것 같습니다

어디로든 가지 않아도 됩니다

어디든 지나가도 됩니다

혼자인 것에 기대어 가고 있기에

 




 

 

 

 





견인


올 수 없다 한다

태백산맥 고갯길,눈발이 거칠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답신만 되돌아온다

분분한 어둠속,저리도 눈은 내리고 차는 마비돼 꼼짝도 않는데 재차 견인해

줄 수 없다고 한다


산 것들을 모조리 끌어다 죽일 것처럼 쏟아붇는 눈과

눈발보다 더 무섭게 내려앉는 저 불길한 예감들을 끌어다 덮으며

당신도 두려운 건 아닌지 옆얼굴 바라볼 수 없다


눈보라를 헤치고 새벽이 되어서야 만항재에 도착한 늙수그레한 견인차 기사

안 그래도 이 자리가 아니었던가 싶었다고 한다

기억으로는 삼십년 전 바로 이 자리,

이 고개에 큰길 내면서 수북한 눈더미를 허물어보니

차 안에 남자 여자 끌어안고 죽어 있었다 한다


세상 맨 마지막 고갯길,폭설처럼 먹먹하던 사랑도 견인되었을 것이다


진종일 잦은 기침을 하던 옆자리의 당신

그 쪽으로 내 마음을 다 쏟아버리고

나도 당신 품을 따뜻해하며 나란히 식어갈 수 있는지

 

 


 

 

 

 

 

 

 

 

 

 

 

황금 포도 여인숙

 

1

혼자 죽을 수는 없어도 같이 죽을 수는 있겠노라고

한 눈빛이 한 눈빛에게 말을 걸자

눈빛이 눈빛을 따르는 해질녘 과일시장

먹겠다며 산 반 상자의 포도를 물린 여자는

역에서 기차표 두 장을 끊어 사내를 따르게 했고

어딘가로 향하는 기차 창 밖으로 수십 마리 비둘기가 따른다

난 다시 태어날 거예요

아니, 난 다시 태어나지 않으렵니다

더이상 말도 눈빛도 교환해서는 안 되는 두 사람은

오로지 죽자고 한 손을 묶고 있을 뿐

뒤를 당부할 일 없으므로 이름도 모른다

기차 선반 위에 가지런히 두고 내린 두 사람 가방 위로

수십 마리 감정이 내려앉아 가방 속을 어를지라도

먼 길이 혼자가 아니라면 그 얼마나 마땅히 다시 돌아올 길인가

 

2

당신 그리 되어 화장하던 날, 마음가짐 몸가짐을 못 하겠는지

당신이 머리카락인지 나뭇잎인지를 뚝뚝 잘라

화장터 사방으로 내버리던 날

한 사람은 당신 가족에게 이렇게 말했지

젊디젊은 분한테 어쩌다 이런 변이

우리 아들도 밤길 운전하다 사고로 그만

아직 결혼을 못 올렸는데 둘이 같이 잘 살으라고

영혼이라도 결혼식이라도 올려주자고

가마 속으로 두 시신이 밀려들어간다

생에서는 알지도 만나지도 못했던 영혼이

여인숙으로 들어가 나란히 꽃으로 타고 금으로 타니

베고 누울 것 없어도 되겠다

당신과 당신의 당신을 감싼 흰 보자기를 묶거나 풀 즈음

생은 몇 방울 포도물로 번져도 되겠다

 

 

 

 


 

 

 

 

 

 

 

  1. 시인이자 방송작가인 이병률은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그날엔」이 당선되어 등단했다.‘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바람의 사생활』『찬란』 등과 여행산문집 『끌림』(2005) 등이 있으며, 제11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