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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박두진 시선집『어서 너는 오너라』

by 언덕에서 2016. 3. 25.

 

 

박두진 시선집『어서 너는 오너라 

 

 

 

 

 

 

 

 

 

 

청록파 시인 박두진(朴斗鎭.1916∼1998)의 시집으로 2013년 발표되었다. 표제시 「너는 어서 오너라」는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 쓴 작품으로 몰래 간직해 두고 있다가 해방된 이후 발표한 것이라 알려져 있다. 많은 시인, 작가들이 일제에 굴복하여 친일 문학으로 전향하거나 붓을 꺾었음에 비해, 오히려 시인은 조국 광복의 미래에 대한 분명한 예감과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러한 민족 해방에의 열망을 노래했다. 이와 같은 작품이 존재하기에 동시대의 친일 문학은 상대적으로 설 자리를 잃게 되었고, 친일 문학을 비판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1916년 생의 박두진 시인은 1917년 생의 윤동주 시인보다 한 살 나이가 많다.

「너는 어서 오너라」의 화자가 복사꽃 피는 마을의 모습을 통하여 간절한 소망을 나타내었지만 「묘지송」에서는  정반대의 분위기에서 역설적인 희망을 보이고 있다. 흔히 '묘지'라는 소재는 허무나 소멸의 이미지로 생각되기 쉬운데, 이 시는 그러한 상식적 관념을 깨고 새롭고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 포근한 공간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시에서 그는 쓸쓸한 묘지를 금잔디 기름진 동산으로 미화시키고 있으며, 우리에게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안겨 주는 백골이나 주검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거기에 향기까지 나도록 만들고 있다. 그리고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에의 기다림은 감정의 해방과 더불어 힘을 얻어 확실한 신앙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폭포와 같은 감정의 힘이 시집 「해」에서 해방의 감격을 생동감에 가득 찬 것이 될 수 있게끔 만들어 줄 수 있었다.

 박두진 시인의 초기 시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밝고 희망적인 세계를 나타내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구원의 세계가 꼭 기독교적인 것만은 아니다. 복사꽃은 동양에서 무릉도원의 세계, 곧 이상향의 상징에 가까운데, 이 작품에서는 민족 해방이 복사꽃 핀 한국적인 이상향으로 토착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젊음의 바다」역시 광복의 벅찬 감격을 노래한 작품이다. 특히 이 시에서는 동일한 어구를 반복하거나 쉼표를 이용하여 탄력 있는 리듬감을 조성함으로써 들뜨고 벅찬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는 단순히 국권의 회복의 감격을 노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해방을 통해 민족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해방의 이상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일제의 수탈과 탄압으로 인해 국외를 유랑하던 동포들에게 원래 자신의 실현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이 시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마지막 연에서 그려진 것과 같은 공동적인 축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단순히 일제로부터의 해방으로 모든 언제가 해결되었다는 식의 들뜬 감정을 토로한 시들과는 구별된다. 박두진 시인의 시를 읽으며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버려진 고려인, 독립운동 하러 만주로 떠났던 조선족, 먹고 살기 힘들어서 나라를 등졌던 해외동포들이 모두 하나 되는 날들이 「산맥을 간다」처럼 이루어지길 기원해 본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오래 정들이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도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가에, 나는 어디로 향을 해야 너와 마주 서는 게냐.

 

달 밝으면 으레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서런 가락도 너는 못 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 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 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어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이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난,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워서, 철이야, 너는 늴늴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싯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북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딩굴어 보자.

 

-<청록집>(을유문화사.1946)-

 

 


 

 


 

 

 

 

 

 

 

 

 

 

젊음의 바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바다다 밀어라

땅에서 쏟아지는 바다다 밀어라

바다에서 쏟아지는 바다다 밀어라

무너지는 우리의 사랑을

무너지는 우리들의 나라를

무너지는 우리들의 세기를 삼키고도

 

너는 어제같이

일렁이고

퍼렇게 입을 벌려 삼키는 아침의 저 햇덩어리

퍼렇게 입을 벌려 삼키는 저 달덩어리

달덩어리

 

언제나 모두요 하나로

착한 자나 악한 자

우리들의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꿈도 자랑도 슬픔도

파도 덮쳐

너의 품에 용해하는

 

다만

끝없이 일렁이는

끝없이 정렬하는 무한 넓이

무한 용량

푸르디푸른

너 천길 속의 의지

천길 속의 고요로다.

 

- 시집 <수석열전, 1973)>

 


 

 

 

 


 

 

묘지송(墓地頌)

 

북망(北邙)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루가 빛나리. 향기로운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太陽)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이 배, 뱃종! 뱃종! 멧새들도 우는데, 봄볕 포근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 [문장] 5호(1939. 6)-

 

 


 

 

 

 

 

 

산맥을 간다

 

 

얼룩진 산맥들은 짐승의 등빠디

피를 뿜듯 피날리어 산등선을 가자.

 

흐트러진 머리칼은 바람으로 다스리자.

푸른빛 이빨로는 아침 해를 물자.

 

포효는 절규 포효로는 불을 뿜어,

죽어 잠든 골짝마다 불을 지르자.

 

가슴에 살이 와서 꽂일지라도

독을 바른 살이 와서 꽂힐지라도

 

가슴에는 자라나는 애기해가 하나

나긋나긋 새로 크는 애기해가 한 덩이

 

미친 듯 밀려오는 먼 바다의

울부짖는 파도들에 귀를 씻으며,

 

떨어지는 해를 위해 한 번은 울자.

다시 솟을 해를 위해 한 번은 웃자.

 

 

- [사조195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