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이야기

아하, 건축학개론!

by 언덕에서 2015. 10. 22.

 

 

 

 

아하, 건축학개론!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시쳇말로 '쪽 팔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잡지나 신문의 문화면을 보면 '건축학개론처럼'이라는 말이 꽤 많이 나오는데 정작 나는 영화가 어떤 내용인지를 몰라서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주변의 친구들에게 영화 '건축학개론'을 봤느냐고 물어보기도 했는데 열의 아홉은 봤다고 했다. 그러니까 무식한 표시를 내지 않기 위해 억지로 이 영화를 찾아보았다고 하는 것이 맞겠다. 영화를 보면서 요즘 뜸했던 눈물 흘리기 증세를 일으키기 시작했고, 영화를 보고 난 후 며칠 동안은 아득하고 슬픈 느낌 때문에 답답해하기도 했음을 고백해야겠다.

 

 2013년 발표된 영화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이라는 감성적 소재를 ‘건축’이라는 소재와 접목시켜 기존 한국 영화에서 한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독특한 방식으로 첫사랑 이야기를 펼쳐낸다. 1980년대 관객들의 감수성을 적셨던 영화 <겨울 나그네><기쁜 우리 젊은 날>을 비롯하여, 2000년대 개봉된 <클래식> 등 ‘첫사랑’을 소재로 삼은 영화들의 클래식한 감성을 이으면서도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색다른 방식으로 첫사랑 기억을 자극하는 독특한 멜로드라마이다.

 또한 이 영화 <건축학개론>은 담아낸 서울 도심 로케이션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해온 곳곳의 재발견하여 관객에게 제시한다. 평범한 듯하지만 옛 정취가 살아있는 정릉과 창신동 골목길, ‘승민’과 ‘서연’의 감정이 켜켜이 쌓여가듯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옥집, ‘승민’과 어머니의 삶의 터전을 그려낸 수유동의 시장 골목 등은 스크린을 통해 사연을 지닌 흥미로운 공간이다. 건축학도 출신으로서 ‘집을 짓는 것만큼, 공간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는 감독의 미적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라져가는 낡은 건축물들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러한 <건축학개론>의 공간미학을 짚어보는 것은 이 시대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서연과 승민의 학창시절 첫사랑의 진행과 파국, 현재의 재회 후의 이야기가 반복되면서 진행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모 대학교 공대 건축학과에 입학한 신입생 승민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음대생 서연을 보게 된다. 한눈에 사랑에 빠지지만 숫기가 없는 그는 그녀 곁을 맴돌기만 한다. 그렇지만 둘은 같은 동네에 살고 학교 내 동아리도 같아 서서히 친해진다.

 승민은 친구인 재수생 납득의 조언을 받아 서연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보려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 그래도 단 둘이 떠난 여행에서 남몰래 뽀뽀도 하는 등 서로 표현을 안 할 뿐 사실상 풋풋한 연애를 하고 있다.

 승민은 서연에게 사랑을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고, 서연이 원하던 집 설계모형을 만든 후 종일 기다린다. 하지만 만남은 엇갈리고, 서연은 동아리 선배 꾐에 빠진다. 선배는 만취한 서연을 부축하여 그녀의 집안으로 들어간다. 선배는 미남에다 부잣집 아들로 여학생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지만 이쁜 신입 여학생만 골라 만취시켜 겁탈하는 습성이 있다. 승민은 긴 시간을 서연의 집 앞에서 기다리나 선배는 서연의 집에서 나오지 않는다(술 취한 서연이 겁탈 당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심하게 충격을 받은 승민은 서연을 향한 마음을 접는다.

 이후 서연이 승민에게 계속 연락을 하지만 승민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서연이 승민의 강의실에 찾아간다. 둘이 결국 만나게 되자, 승민은 CD플레이어를 서연에게 돌려주며 이제 그만 꺼지라고 말하며 돌아선다. 그는 돌아서 걸으면서 계속 울고 있다.

 시간이 흐른다.

 30대 중반이 된 서연. 의사의 아내인 그녀는 홀로 사는 병든 아버지를 위해 본인의 고향 제주도로 귀향할 생각을 하고 있다. 귀향 후 살 집을 짓기 위해 졸업 이후 처음으로 건축사 사무소에 근무하는 승민을 찾아간다. 서연의 갑작스런 등장에 승민은 당황하고, 그 제안을 거절하려 하지만 회사가 하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건축을 맡게 된다.

 건축 설계 및 시공을 지휘하는 승민은 자주 제주도로 내려온다. 서연도 내려온 어느 날 서울행 비행기가 끊겨 둘은 술을 마시게 된다. 승민은 서연이 의사 남편과 이혼한 상태임을 알게 된다. 서연 역시 승민에게 결혼할 여자가 있음을 진작부터 알고 있다. 둘은 과거의 이야기는 덮어둔 채, 현재 삶의 어려움만 털어놓는다.

 집이 완성되는 날 둘은 맥주를 마시며 드디어 과거 이야기를 꺼낸다. 서연은 학창시절 승민이 만든 집 설계도와 모형을 여전히 가지고 있고 승민이 자신의 첫사랑이었음을 고백한다.

 그 시절 서연이 자신에게 준 상처에 과거 이야기를 숨기던 승민은 결국 감정을 되살리고 둘은 키스를 한다. 이후 승민은 결혼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고 서연은 아버지 곁에서 제주도에 완성된 집에 산다.

 마지막 장면. 서연은 이민가기 전 승민이 보낸 CD플레이어를 택배로 받는다. 둘의 사이가 틀어지기 전인 크리스마스 때 서연과 승민이 같이 가자고 했던 고아한 한옥 빈집이 있었다. 둘 사이가 단절된 후 서연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혼자 그곳에서 승민을 기다린다. 승민이 오지 않자 CD플레이어를 그곳에 두고 온다. 그녀 역시 잊기 위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버려질 줄 알았던 CD플레이어를 승민이 송부한 것은 당시 승민도 그곳에 들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서연이 승민에게 소개시켜 준 '기억의 습작'이라는 노래가 CDP를 통해 흐르면서 영화는 끝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나 자신, 수많은 여자로부터 차이기만 했다는 기억을 희석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어 모처럼 지나간 젊은 시절을 반추해 볼 수 있었다. 철없던 시절의 취기어린 나의 행동 때문에 상처받았을지도 모르는 내 젊은 시절의 그녀들은 혹 없었을까. 헤르만 헤세의 단편소설 '청춘은 아름다워라'에서 형상화되었듯 어떤 모습이었다 하더라도 청춘은 아름답다.

 

 

 

 평생을 한 곳에 머물던 남자 그리고 계속 떠돌아다니던 여자가 10여 년 후 다시 만난다. 떠돌던 여자는 이제 정착을 준비하고 머물렀던 남자는 떠나는 준비를 한다. 극 중 정릉 토박이 ‘승민’, 그리고 고향 제주도를 떠나 정릉 친척집에 잠시 머무는 ‘서연’, 두 사람은 우연히 발견한 동네 빈집 툇마루에서 풋풋한 데이트를 시작한다. 그러나 ‘서연’이 꿈에 그리던 강남 개포동 반지하방으로 독립하면서 버스 남쪽의 종점과 북쪽의 종점의 먼 거리만큼 둘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기고 영화는 안타깝게 흘러간다.

 

 이 영화는 엇갈림을 담담하게 표현하여 더 슬픈 영화다. 승민과 서연의 엇갈림에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은 이랬다.

 승민이 서연을 포기하게 되었던 계기는 ‘신입 여학생(겁탈) 킬러’로 소문난 동아리 선배가 술에 약한 서연을 만취시킨 후 부축하여 서연의 집으로 들어간 뒤 나오지 않았던 장면이다.

 승민이 진정 서연을 사랑했다면 극중처럼 야비한 방법으로 서연을 유린하는 선배에게 그러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설득으로 불가능하다면 돌멩이로 상대의 면상을 후려 갈기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라도 응징해야만 하는 것 아닐까. 육탄 돌격을 하든 설득을 하든 간에 자신의 사랑이 부서지는 것을 그 어떤 방법으로든 막아야만 했다. 그런데 승민은 소심하게 숨어서 지켜보고만 있다가 무너지고야 만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는 서글픈 영화로 존재하는 것이다. 세상의 일 중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모두 다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