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Assassination)』을 보고...
재미있었지만 영화가 끝난 뒤 두 가지 생각만 남았다. 일제 시대의 거리 모습 고증이 잘된 영화라는 것과 김원봉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다. 최동훈 감독은 이 영화의 모티브를 이봉창 의사의 의거에서 착안했다고 했다. 이봉창 의사는 당시 한인애국단 소속이었다. 물론 영화라는 것은 픽션에 불과한 것이지만 김원봉이 백범 김구 주석이 지휘하는 한인애국단에 관여했는지도 궁금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김원봉의 의열단은 1919년에 시작되었고 김구의 한인애국단은 1931년에 조직되었으며 좌파 성향의 김원봉과 우파 성향의 김구의 조직은 별개로 움직였다. 김원봉은 자신이 속한 신흥무관학교1가 일개 마적 떼에게 습격당하는 수모를 당한 뒤 의열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후 의열단은 박재혁ㆍ최수봉ㆍ김익상ㆍ김상옥ㆍ김지섭ㆍ나석주 의사 등 전 세계 식민지 역사에서 찾아보기 줄기찬 무력투쟁을 펼쳤다. 1931년 김구 선생이 세운 한인애국단은 이봉창ㆍ윤봉길 양 의사의 의거로 민족의 기개를 만천하에 알렸다.
김원봉은 김구와 필적할만한 대표적인 항일 독립 운동가였으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6년여에 걸쳐 대규모 암살계획 및 경찰서,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에 대한 폭탄 투척사건 등을 배후에서 지휘했고, 이후 김구와 함께 공동으로 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문을 발표하는 등 좌우 연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당시 일제는 ‘김구’에게 60만원의 현상금을, ‘김원봉’에게는 10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었다고 전해진다. 현재 기준으로 따지면 약 200억~300억에 달하는 금액이라고 한다.
참고로 김원봉의 삶을 아래에 요약해보았다. <두산백과>와 <위키 사전>을 참고를 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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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의원을 지냈다. 1918년에는 김약수ㆍ이여성 등과 난징(南京)의 진링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면서 중국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였다. 3ㆍ1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귀국한 김약수ㆍ이여성 등과 헤어져 길림(吉林)을 거쳐 서간도에서 폭탄제조법을 습득하는 등 일제와의 무장투쟁노선을 분명히 하였다.
1919년 12월 윤세주ㆍ이성우ㆍ곽경ㆍ강세우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의백(義伯: 단장)에 피선되었다. 의열단의 암살대상은 이른바 칠가살(七可殺)에 해당되는 자들로서 조선총독 및 총독부 고관, 군부 수뇌와 매국적 친일파 거두 등이었다. 그들은 본거지를 만주와 상해ㆍ난징 등지로 전전하면서 국내의 경찰서 폭파, 요인 암살 등 무정부주의적 투쟁을 지속하였다.
영화에서 '김원봉' 역을 맡았던 조승우
1927년에는 중국 국민당의 북벌에 합류하였고, 1929년 상해에서 정치학교를 개설하고 1932년 난징에서 조선인혁명청년간부학교를 창설하는 데 중국 국민당계의 도움을 받았다. 1930년경 북경에서 조선공산당 엠엘파(朝鮮共産黨ML派)인 안효구와 제휴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하고, 레닌주의정치학교를 개설하고 기관지 [레닌]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1933년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2(對日戰線統一同盟)을 결성하여 혁명세력의 결집을 꾀하였다. 1935년에는 신한독립당ㆍ한국독립당ㆍ대한독립당ㆍ조선혁명당ㆍ의열단의 5개 단체를 규합하여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을 조직하였다. 1937년 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한(武漢)으로 가서 조선민족혁명당이 중심이 되어 전위동맹ㆍ혁명자연맹ㆍ민족해방연맹 등 단체와 조선민족통일전선연맹을 결성하여 대일선전전에 주력하였다.
1938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고 대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장개석의 주선으로 김구와 함께 각 혁명단체가 공동정강하에 단일조직을 만들 것을 제의하는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서간>을 1939년 5월 발표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과 부인 박차정
따라서 중국 공산당으로부터는 ‘소시민적 기회주의자이며 개인영웅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자신이 조직한 조선의용대의 대원들이 이탈하여 김두봉3(金枓奉)의 독립동맹으로 흡수되기도 하였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에 취임하고, 광복군 제1지대장 및 부사령관 등을 역임하였으며, 1945년 12월 임시정부 귀국 시에는 군무부장의 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전에 발표된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의 군사부장으로 명단에 올랐으며, 귀국 후 계속 환국한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도하던 임시정부측이 좌우합작을 거부하자 비상국민회의에서 탈퇴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의장단의 한 사람으로 피선되어 임시약법기초위원(臨時約法起草委員)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6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을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고 지속적으로 연합전선구축에 노력하였으나, 여운형(呂運亨)이 암살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본격화되자 월북하여 1948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세칭 남북협상)에 참가하였다. 그 뒤 북한에서 국가검열상ㆍ내각 노동상ㆍ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등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 11월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하였다.
- 1920년 만주(滿洲) 유하현(柳河縣)에 세운 독립군 양성기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소속된 신흥학교(新興學校)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지청천(池靑天)ㆍ오광선(吳光鮮) 등을 포섭, 5월에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고, 적극적인 무력 양성을 목적으로 발족하였다. 교장에 이시영(李始榮), 교성대장(敎成隊長)에 지청천, 교관(敎官)에 오광선ㆍ신팔균(申八均)ㆍ이범석(李範奭)ㆍ윤경천(尹敬天) 등을 임명하고, 군인을 양성, 1920년까지 2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매일 14시간의 훈련을 실시, 하사관반(下士官班)은 3개월, 장교반은 6개월, 특별반은 1개월로 기한을 정하고, 학과(學科) 1할, 교련(敎鍊) 2할, 민족정신 5할, 건설 2할의 비율로 훈련을 배정하였다. 이들 졸업생은 후에 신흥학우단(新興學友團)을 조직, 독립운동을 위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본문으로]
- 1920년대 후반에는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결성을 위한 협동전선운동이 진행되었으나 노선의 차이와 이념적 편차로 무산된 바 있다. 그러나 세계적 경제공황, 일제의 만주 침략, 상하이(上海)훙커우(虹口) 공원에 있었던 윤봉길(尹奉吉)의 투탄 의거 등은 한국독립운동계 내부에 새로운 국면전환의 계기를 제공했다.이에 따라 1932년 11월 10일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대표 이유필(李裕弼)·송병조(宋秉祚)·김두봉(金枓奉),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대표 최동오(崔東旿),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대표 윤기섭(尹琦燮)·신익희(申翼熙), 조선의열단(朝鮮義烈團) 대표 한일래(韓一來)·박건웅(朴建雄), 한국광복단동지회(韓國光復團同志會) 대표 김규식(金奎植) 등 9명의 발기로 결성되었다.이에 앞서 만주사변 직후인 1932년 10월상하이 민국로(民國路) 소동문(小東門) 소재 동방여사(東方旅舍)에서 발기인 9명은 회합을 가져 각단체연합주비위원회(各團體聯合籌備委員會)를 결성했다. 김규식·김두봉·박건웅·신익희·최동오 등 5명을 위원으로 선정하였다. 준비위원들은 10월 23일 같은 곳에서 모임을 가져 ① 각 단체 연합회의 명칭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으로 할 것 ② 동맹의 성격은 오직 협의기관으로만 할 것 ③ 대표는 9명으로 하되 자격은 해당 단체의 전권신임장을 가지고 오는 자로 할 것 등을 의결하였다. 10월 25일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하, 통일동맹)’의 명칭을 정식 채택하고, 11월 5일최동오·신익희·김두봉·김규식·박건웅을 상무위원으로 호선하고, 비서부·조직부·선전부·군사위원회·경제위원회·외교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11월 10일 통일동맹의 결성을 공식 선포하였다.통일동맹은 중국 내 독립운동단체의 결합을 위한 협의체로서 역할을 수행하다가 1934년 7월 5일 각 단체의 대표들이 대동단체로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결성함에 따라 발전적으로 해체했다. [본문으로]
- (1889 ~ 1961)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한글학자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한글학자이다. 경상남도 기장군 기장읍 출생이고, 호는 백연(白淵)·백련(帛連)이며, 별명은 '태항산의 호랑이'였다.구한말기에는 한글학자 주시경의 수제자로 유명했다. 일제강점기 시절 중국으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잠시 활동하였다. 일제 강점기의 한글 사전인 《조선말본》과 《깁더 조선말본》의 저자였으며 《말모이》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이다.중국에서 학자 활동과 무장투쟁 활동을 하다가 1935년 김규식, 김원봉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창당 조직하였다. 1940년 이후 화북으로 가서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으로 추대되었고, 광복 뒤에는 38선 이북으로 귀환,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고 북한의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46년 10월부터 1948년 9월까지 김일성종합대학의 초대 총장이기도 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이라는 것은 조선의 심장부이니 우리 몸에 심장보다 중요한 것은 없으니 심장을 장악하고 8월까지는 기어코 통일 정부를 구성하자며 한국 전쟁에 동조했다. 1958년에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확한 사망 시점은 미상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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