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게으름 병이 도져 '옛날의 금잔디'를 계속 쓰지 못했다. 심기일전하여 100편까지 잘 마무리 할 참이다)
권력 언저리
며칠 전 신문은 전직 고위 장성이 뇌물을 받은 사건으로 10년 형이 선고된 것을 보도했다. 패가망신(敗家亡身)의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며 아들도 함께 쇠고랑을 차게 만들었으니 아버지로서도 부끄러운 일이다. 궁금증이 생겼다. 별 네 개로 오를 수 있는 최대의 명예와 군대 내에서 최고의 권력의 자리까지 올라간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일을 했을까 하는 점이다. 인간은 끝없는 만족을 추구하는 탐욕스런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설명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완전히 평등한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한 ‘갑과 을’은 항시 존재하기 마련이다. 누군가 ‘갑’이 가진 자리의 대단함을 내세워서 그의 견물생심(見物生心)을 건드렸고 그는 ‘갑’이라는 절대우세의 자리에 취해서 이성을 잃은 것은 아닐까?
스물여덟 살 때의 여름이었다. 외국에서 수입하여 자체조립한 중장비를 판매하던 시절이었다. 대부분 영세한 중기1(重機) 업자를 상대로 얼마의 선금을 받은 후 근저당2 설정 후 잔금을 할부로 판매하는 식이었는데 그날은 사일로3(silo)가 있는 양곡부두의 하역업체에서 연락이 왔다. 국적선을 가진 C상선이라는 우리나라 국적의 세계적인 선박회사에서 부른 것이었고 페이로더라는 장비를 사겠다는 것이다. 그 회사 사장실에서 사장의 아들로 보이는 ‘실장’과 단 둘이 면담 후 계약하게 되었다. 당시 그 기계의 가격은 오천만원(요즘 가치로 5억 정도 될 것이다)이었으며 10% D/C는 관례였으나 실장이 가격 인하를 요구하지 않아서 100% 현금 박치기로 계약하는 횡재를 얻었다.
다음날 그 회사의 담당 계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40대 후반의 배불뚝이 아저씨는 ‘이렇게 비싼 장비를 구입한 건데 상식적으로 뭐가 없느냐’며 노골적으로 댓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눈치로 사태를 파악한 나는 ‘원하는 것이 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는 만나서 천천히 이야기하자고 했는데 막상 만나니 일단 자신이 좋아하는 잉어회를 먹으면서 한잔하자고 했다. 강 근처의 '가든'이라는 음식점에 데리고 가서 잉어회를 대접했더니 이후 좋은 데로 가서 이차를 하자는 것이었다. 아, 이 자식은 오늘 뿌리를 뽑으려 하는구나!
내가 이야기했다.
“계약서 작성할 때 제 옆에 있었던 그 실장님이 사장님 아드님이죠?”
“그렇지요. 사장 후계잡니다.”
“저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던데 계장님이 제게 이렇게 하시는 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는 갑자기 사색이 된 표정이었다.
영업적으로 따져볼 때 당시의 나와 같은 류의 언행은 곤란한 것이다. 언제 어디서 영업적으로 또 만나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당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외치던 너무 젊은 시절이었기 때문이라고 얼버무리는 것이 낫겠다. 그렇게 해서 그날 그와의 만남은 끝났는데 며칠 후 다시 전화가 왔다. 또다시 술타령, 선물타령, 봉투타령이리라 짐작했는데 차량등록이 문제라고 했다. 페이로더4(PAY LOADER)라는 그 장비를 차량등록사업소에 ‘중기’로 등록해야 하는데 경험이 없으니 꼭 한번만 도와달라는 것이다. 내가 직접 등록을 한 후 그 등록증을 그에게 전달만 해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 일마저 거절하면 과도한 '배짱 영업'이란 생각이 들어 그 요청을 수용하기로 했다. 선배들에게 차량등록 방법을 물으니 간단했다. 해당 서류를 구비해서 인지를 붙여 차량등록사업소에 제출하고 담당 공무원에게 승인 도장을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소정의 해당 서류를 완벽하게 구비하고 차량등록사업소에 가서 담당자에게 제출하니 심사 후 발급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접수한 서류는 속속 등록증이 나왔으나 내가 제출한 서류만 유일하게 발급증이 나오지 않고 계속 반려되었다. 공무원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서류를 잘 살펴보시오.”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꼼꼼히 살펴보니 서류 상 하자는 전혀 없었다. 담당자가 뭘 착각했거니 하고 다시 제출했으나 한 시간 후에 또다시 반려되었다. 몇 백 대의 일 경쟁을 뚫고 들어간 회사의 엘리트 초급사원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유를 따지니 서류에 붙인 사진이 완전히 착 달라붙지 않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 그 곳에서 내가 잘 아는 중기업체(重機業體)의 여사원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도 나처럼 중기 등록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내게 그날 일어났던 이야기를 쭉 듣더니 안타까운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빠, 원래 서류 접수할 때 서류 속에 급행료 만원을 넣어야 하는데 그걸 빠뜨리셨네요.”
그날은 세상살이에 관한 처세 방법을 한 가지 더 배우게 된 날이었다.
오기(傲氣)가 생긴 나는 딱풀을 사진 뒷면에 떡칠하듯 발라 다시 제출했다. 그날 어떤 이유로 반려당하더라도 그들의 퇴근 시간까지, 그래도 안되면 내일 또 해 볼 요량이었다. 세 번째 내민 서류를 훑어보더니 (만원 지폐가 없는 것을 재차 확인했을 것이다) 마지 못해 도장을 찍었다. 당시 공직자의 부패가 심하고 공무원 뇌물이 횡행하는 것을 알았지만 이 정도였는지는 상상하지 못했기에 씁쓸한 마음뿐이었다.
이후 같은 그룹의 타 계열사로 옮긴 나는 세관을 상대로 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다. 관세사5라는 전문 업체에게 통관6 업무를 외주하였다고는 하나 그들은 화주(貨主)7로서의 권한이 없기에 세관직원은 화물의 주인인 우리 회사 직원을 부르기 십상이었다. 그리고 신속히 통관해야 할 화물이나 단가가 많이 나가는 수입화물에 대해서 통관을 지연하며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했다. 해당 부서의 주무 대리로 일하던 나는 세관의 주무급 공무원이나 계장에게 수시로 불려가서 ‘급행료 얼마를 달라’라는 주문을 받는 일이 주 업무 중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한번은 지나치게 과다한 금액을 요구하기에 ‘도대체 왜들 이러시냐’며 따진 적이 있었다. 담당자의 답변은 간단했다. 자신이 단가 높은 화물의 수입면장8에 그냥 도장을 찍으면 윗분들이 분배 없이 혼자서 뇌물을 착복한 것으로 판단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경찰이나 검찰에 고발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랬다가는 회사 문을 닫지 않는 한 두고두고 보복을 받을 것은 뻔한 상황이니까 말이다.
육십이 훨씬 넘은, 퇴직을 앞둔, 노계장이 어느 날 관세사를 통해 나를 불렀다. 자동으로 양복 만드는 기계를 독일에서 수입한 건에 대해서 문제를 삼고 있었다. 그는 해당 세관에서도 돈을 밝히기로 악명이 자자했다. 그는 내게 노골적으로 자사에서 판매 중인 최고급 양복을 지명하며 두 벌을 요구했다.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보십시오. 이건, 해도 너무 하시는 거 아닙니까?”
그가 대답했다.
“대리님, 인생을 더 살아봐야 당신이 뭘 알지. 내 자리에 앉아봐. 당신도 그럴 걸!”
♣
외근 나가는 길에 시내 고속도로를 자주 이용한다. 그날은 오전에 회사를 나온지라 ‘동서고가도로’라고 불리는 그 길은 통행량이 한산해 거의 텅 비어 있었다. 평소 과속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어떻게 운전을 하다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규정 속도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100M앞 도로 위에 사람 한 명이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옆에는 순찰용 오토바이. 교통경찰이었다. 차를 세우게 만든 그는 거수경례를 하며 아주 친절하게 내게 말했다.
“선생님, 바쁘신 모양이네요?”
“…….”
“자! 운전면허증 내보세요!”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이럴 땐 만원 지폐를 건네면 해결된다는 속설이 떠올랐다. 지갑에서 운전면허증을 꺼낸 나는 별도로 만원 지폐도 꺼냈다. 지켜보던 그가 말했다.
“돈은 접어서 면허증 뒤에 밀착해서 주세요. “
면허증을 슬쩍 보던 그는 돈은 주머니에 넣고 면허증을 돌려주었다. 다시 경례를 하며 그가 말했다.
“2km앞에 우리 직원이 또 있습니다. 하하, 우리 선생님! 조심해 가세요.”
시속 100km를 밟았던 속도를 60km로 줄여서 천천히 운전하니 앞쪽에 또 한 명의 순찰오토바이와 교통경찰이 보였다.
♣
그 시절 한 살 아래의 먼 친척 동생은 지방자치단체의 말단 건축 공무원으로 근무 중이었다. ‘형님아, 한잔하자’는 전화를 받고 그를 만나기로 했는데 전화를 끊고 나니 그가 정한 약속 장소가 귀를 의심케 했다. 왜냐하면 그곳은 호사가들은 모두 알만한 유명 룸살롱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곳에서 마셔도 되느냐’고 물으니 그는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형님, 여긴 내 집과 같은 곳이야. 아무런 걱정 말고 맘껏 드세요!”
그날 그는 만취했는지 언젠가 K회장을 독대했다는 사실을 이야기 했다. 지금은 세인의 기억에서 희미해졌지만 한때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는 책을 내기도 한 사람이다. 나는 그가 사실을 터무니없이 부풀려 친척형인 내게 과장하고 있다고 결론내리고 있었다. 나 자신이 사기업에 다니고 있기에 말단의 쥐꼬리 권력을 가진 실무 공무원과 국내 1~2위를 달리는 그룹사의 오너간의 독대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저 녀석, 술에 취해 분명 허세를 부리고 있는 거야…….’
이후 은퇴한 대기업 CEO 한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K회장이라면 능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지요. 또 받는 공무원 입장에서는 월급 사장보다 오너에게 받는 것이 뒤탈이 없어 좋기도 하구요.”
라고 짤막하게 내게 대답했다.
♣
구약성경의 ‘레위기’에는 “이방인을 너희 동족같이 여기며 너희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한 때 이집트에서 외국인이었음을 기억하라”라는 대목이 수차례 나온다. 자신보다 약한 이에게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말라는 의미다. 세상을 원만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보다는 조금 손해를 보고 살아야 한다. 지금 당장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게 되면, 언젠가는 알게 모르게 그만큼의 손해를 보게 된다.
다들 하는데 좀 나도 해먹으면 어떠냐고? 그렇게들 하다보면 우리 사회의 여러 공동체와 국가가 끝없이 썩게 되어있다. 국제적인 국가 경쟁력은 영원히 하위권이 될 것이고 젊은 세대의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게 되어 있다. 그리고 스스로 물어보자. 부끄럽지 않은가? 이러고서도 우리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 중장비 [본문으로]
- 장래에 생길 채권의 담보로서 저당권을 미리 설정함. 또는 그 저당권. [본문으로]
- 사일로는 겨울철에 옥수수 · 호밀 · 보리 따위의 수분이 많은 가축 먹이를 마르지 않게 저장하는 시설이다. 돌 · 벽돌 · 콘크리트 및 철재 등으로 만든다. 자운영 · 토끼풀 따위를 베어 사일로에 넣고 다져서 50~60일쯤 두면 저장 사료가 된다. 이것을 엔실리지 또는 사일리지라고 하며, 푸른색과 풀 향기가 그대로 있고 영양분이 많아 저장해 두고 다른 사료와 섞어 먹인다. 겨울철에 생풀이 모자라는 추운 지방에서 많이 이용된다. [본문으로]
- 대형 블레이더나 동력삽을 앞에 탑재한 굴착기 [본문으로]
- 수출입 통관절차를 이행하거나 화주 또는 납세의무자를 대리하여 관세법상 관련된 행정업무를 처리한다. 세액비율의 분류과세가격 확인 및 세액의 계산, 수출입 신고와 관련절차의 이행, 관세법에 의한 이의신청, 소원 및 심판청구의 대리, 관세에 대한 상담업무 등을 한다. [본문으로]
- 관세법의 규정에 따라 화물 수출입 허가를 받고 세관을 통과함. [본문으로]
- 화물의 임자. [본문으로]
- 수입승인서(import approval , 輸入承認書)수입이 제한되는 물품을 수입하고자 할 시에는 당해 물품을 관장하는 기관에서 수입승인을 받아 수입하여야 한다. 수입승인을 받은 후 수입자는 수입 승인 유효기간 내에 수입대금을 지급하고 당해 물품을 수입할 수 있다.수입승인서란 수입승인을 신청하기 위해 작성하는 문서를 말한다. 수입승인서 작성 시에는 수출자와 위탁자의 상호, 주소, 성명 등의 정보를 정확히 기재해야 한다. 또 당해 수입물품의 원산지, 선적항을 비롯하여 결제 금액과 자격 조건 등을 빠짐없이 작성하도록 한다.상대방과의 계약변경이나 기타 사유로 승인 내용을 변경할 필요가 있을 시에는 변경 승인 신청으로 수입승인 사항을 변경할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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