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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짝신과 그날

by 언덕에서 2015. 6. 26.

 

 

 

 

 

짝신과 그날

 

 

 

20년가량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며칠 지난 날이었다. 송별 회식이 있었는데 부하 직원들 앞에서 취한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서 먼저 일어서 나왔다. 택시 안에서 구겨 신은 내 구두를 보니 한 짝은 내 것이 아니어서 '짝신1'이었다. 취기 때문에 신발 구분이 제대로 안된 탓이었다. 그렇게 짝신을 신고 집에 와서도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취한 모습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노심초사했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이제는 오래된 그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그 오래된 기억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기억나는 장소는 월례리 근처였는데 기장군 칠암리였던가 하는 곳일 것이다. 근처에 고리원자력발전소가 보이고 또 가수 정훈희가 운영하는 카페가 있는 동네였다. '아나고'회라고 불리는 붕장어회가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월드컵의 열기를 넘기고 해(年)를 표시하는 달력을 두어 번 더 바꾸고 난 해의 늦은 가을 '부서원 단합대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승용차를 네 대씩이나 몰고 그곳에 가서 부서원들의 분발을 다짐하며 송구영신하는 회식 자리를 가졌다.

 회사 업무를 마치고 늦게 도착한 관계로 다들 시장한 모양이었다. 내가 부서장 인사말을 마치자마자 소주잔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그러다 술판이 시작한지 한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모두들 만취하기 시작했다. 사실,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지만 다들 이런 시간이 앞으로 없을 것이고 우리들은 어쩌면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묵시적인 공감대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내가 부서장으로 있었던 그 부서는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사 내 전체 최하위의 실적을 기록하여 사고부서로 지목받았고 부서장을 비롯해서 그 아래 간부들도 교체될 것이라는 소문과 풍문이 파다했다.

 부서가 맡은 전체 지역의 목표가 과다하고 채권회수에 있어서 해당 지역의 구조적인 불황이 악성채권을 키운 점, 그해 여름에 대형 태풍이 와서 연체가 극심했던 점 등을 들어 목표 조정을 요구했으나 담당 임원은 듣지 않았다.

 

 

 

 

 

 

 

 

 그날, '단합대회'라고 명명한 술판은 시작한지 한 시간도 못되어 내가 정신을 잃고 인사불성의 상태에 빠져는 바람에 매우 희극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원래 직장의 회식이라는 것이 다 그렇겠지만 윗사람에게 술을 권하는 분위기가 처음부터 달아올라 엉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앞으로 못 만날 것을 다들 예감했기에 자포자기 상태가 되고 말았지 않았느냐 하는 느낌이다. 모든 초급사원이 입사할 때 대한민국 최고의 직장이라며 최면을 걸더니 어느 날 갑자기 근무연수 5년차부터 시작해서 명예퇴직을 받는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사고부서로 지명된 부서의 소속원은 치명적이었다. 무엇이 불안했는지 아니면 우울했는지 나는 부하 직원들이 술을 권하는 데로 마시고 또 마셨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더 이상 마시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판단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의 판단만은 명료했다. ‘직장인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 기억 속의 좋은 상사, 훌륭한 선배로 남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초겨울밤 바닷가 마을의 하늘에는 둥근 달이 빛나고 있었다. 만취 상태였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식당 근처에 예약해 둔 민박집 방에 몸을 누이고 눈을 감자 곧바로 누군가 방문을 열고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그는 내 휘하의 L과장이었는데 유달리 술에 약해서 소주 두 잔 정도만 마시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알코올에 면역력이 없었다. 사색이 된 그는 내가 누운 오른편에 시체처럼 넘어지더니 곧장 신음소리를 내며 정신을 잃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재빨리 변하는 시대, 변하지 않고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시대에 보름달은 어쩌자고 이 지상에 없는 항시성의 경이로운 모델처럼 중천에 떠 있는지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눈을 뜨니 또 한 명의 부하 과장은 내가 누운 왼편에서 탱크 소리를 연상시키는 코골이를 하고 있었다. 주전자를 찾던 나는 옆방 문을 열어보았다. 그 방에서는 중견 사원들, 그들 스스로 아랫것들이라 칭하던 '가장(家長)'이라고 일반적으로 명명되는 일곱 명의 사내들이 부주의하게 진열된 젓가락처럼 이리저리 몸을 누이고 곤한 삶을 확인이라도 하듯 코를 골고 있었다. 갑자기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청춘과 정열을 바쳐 일했던 전 직장은 정치권의 이해다툼으로 인해 외국계 회사로 넘어갔었다. 간신히 인맥을 동원해 옮긴 계열사 금융권의 새 직장 역시 불황의 여파로 구조 조정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어 방문을 열고 나선 민박집 마당 바로 앞 편에는 모래사장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잿빛어둠 속에서 새벽파도는 넘실거렸다.

 칠암리, 그해 연말이 다가오고 회사의 구조조정이 임박하여 낭떠러지에 서있다고 생각하여 뭔가를 정리하기 위해 그날 우리가 찾았던 곳이다. 마음은 어지러이 중심을 잡지 못해 밤새도록 해매이고 이튿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회사로 돌아왔지만 끝없는 막막함 때문에 현기증이 계속 나곤 했다.

 

 

 두 달 후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돌아왔다. 자신만을 믿으라고 했던 임원은 내 부서를 때어서 타 임원 휘하로 돌려버렸다.

 “윤팀장 덕을 좀 보려했는데 도움이 안 되는군. 그냥 이전으로 돌아가야겠어.”

 그가 나를 건드리지 않고 이전 사업부에서 고유의 업무를 그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면 꼴찌 운운하는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니 새삼 세상살이의 비정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맡은 부서 고과를 하위로 그려놓은 그는 겸연쩍어 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세상살이의 일면이기도 하지만 평소 정치적이지 못했던 스스로의 모습이 후회스럽게 떠올라 한숨이 났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렇지만 부하 직원들은 또 어떻게 하란 말인지 걱정이 끝없이 번져갔다. ‘계급이 깡패’라는 말이 또다시 실감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나는 타 관계사에서 전입한 ‘굴러온 돌’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더욱 비감스러웠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문에 의하면 내가 명퇴 대상이라는 설과 대기발령설, 담당 간부로서의 타부서 전출설 등 회사에서 살아남을 길은 전무할 정도로 절망적이었다. 더 이상 비참한 꼴을 당하기 전에 내가 먼저 사표를 제출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내 전임자가 퇴사를 거부하자 그의 책상을 복도 엘리베이터 앞에 두어 망신 준 경우도 있었기에 나만은 부하 직원들 앞에 그런 모습만은 보이지 말자고 평소 다짐하곤 했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행동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쓸쓸한 사람들이여, 쓸쓸함에 이끌려라. 삶은 결국 쓸쓸함의 한 뼘 길이가 아닐 것인가? 오 쓸쓸함이여, 그대도 인생의 진실 하나를 보게 하는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지만, 제반 양식에 따라 사직서를 작성하고 사원증, 간부 카드, 의료보험증 등을 반납하고 회사를 나서니 시야가 갑자기 하얗게 보였다. 소문을 들은 몇 명의 여직원들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나를 배웅하며 울고 있었다. 아내와 아직 어린 아이들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고 또 눈에 밟혔다. 19C의 서구 지성인들은 과다한 감정 유입을 경계해 근대적 이성의 과잉조차 거부하고 이성의 탈근대적 도살을 주장하는 자신을 부정했다. 그러다 신의 이름으로 신을 죽이는 오류를 범하는 일인지도 몰랐다. 내게도 비이성과 불합리성의 범람을 탓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지도 몰랐다.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회사를 그만 두고난 후에 휘하의 L과장은 내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사표를 제출해 수리된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 부서장 서무를 맡았던 여직원 두 명도 무슨 이유였는지 회사를 떠났다고 했다. 함께 근무하면서 좀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리는 사람들이다. 아아, 막차에서 만난 그리운 길동무들. 지금은 모두들 어떻게 지내시는가.

 

 

 

 

 

 

 

 

  1. 양쪽이 서로 제짝이 아닌 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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