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도는 물레방아
초급사원 시절, 임원의 운전기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로 글을 시작해 보겠다. 출근하면서 복도에서 만난 임원에게 공손히 인사했는데 그의 얼굴에 반창고가 붙어있었다. 외근하기 위해 기사실에서 회사 공용차를 빌리던 나는 회사 차량을 담당하는 그에게 물어보았다.
“○이사 얼굴이 왜 저래? 술 마시고 넘어지신 건가?”
“하하~ 아니야. 당신만 알고 있어야 한데이.”
임원의 사생활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전속 운전기사인 그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정치인들이 운전기사를 채용할 때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 친인척을 기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 '카더라' 소문을 퍼트리는 원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만 빼고 모두들 그 사건을 다 알고 있는 듯했다. 사건의 전모는 이랬다.
가족들을 서울에 두고 부산지사에 단신(單身)으로 내려온 ○이사는 체질적으로 술을 매우 좋아하며 바람기1가 많다고 알려져 있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부장의 직위로 뉴욕지사에 근무할 때도 뉴욕에 출장 온 사장을 술집으로 데려가 늘씬한 백인 미녀에게 술시중을 하게 했고 그 공로로 사장의 눈에 들어 이사가 되었다는 또 다른 ‘카더라’설도 있었다.
수많은 거래업체와의 상담(商談)을 지휘하던 ○이사에게 접대성 주연(酒宴)은 심심찮게 많았는데 남편의 바람기에 노심초사하던 부인은 사택 아파트의 경비원에게 매월 수고비를 송금하며 감시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남편의 '동거'나 '현지처'를 걱정한 듯한데 남편이 ‘여자’를 데리고 집에 오거나 기타 수상한 낌새가 발견되면 즉시 전화해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매월 만만찮은 금액을 받아오던 경비원은 어느 날 만취한 ○이사가 자정 경에 젊은 여자를 안고 아파트에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서울의 사모님에게 연락을 취했다. 전화를 받은 부인은 서울에서 즉시 장거리 택시를 대절2(貸切)하여 질풍노도처럼 달려와 새벽녘 경에 두 남녀의 현장을 덮친 것이다.
○이사의 말년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연말 인사가 발표되고 신임 임원이 부임했으나 그에게 후속 인사명령은 나지 않았다. 자리를 후임자에게 물러준 그는 한 달가량을 텅 빈 회의실에서 책과 신문을 읽으며 소일했으나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부하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공장이 완공된 모 자동차 회사 생산공장에서의 일이다. K전무 산하의 사업본부에 속한 모든 임직원이 모여 연말 망년회를 하고 있었다. 회식 겸 망년회는 알코올 없이 사이다에다 삼겹살을 구워먹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나는 대역죄인(大逆罪人)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맡은 과(課)의 사원 한 명이 음주운전으로 도로를 청소하던 청소원을 치어 숨지게 했고 그의 직속 상사 자격으로 나는 징계받을 대비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사장은 전사(全社) 직원에 무기한 금주(禁酒)를 명했다.
술이 없으니 회식 자리는 김 빠진 맥주 같았다. 분위기를 살리려 그랬는지 K전무는 망년회 자리에서 간부들을 한 명씩 호명하며 내년의 포부를 밝혀보라고 명했다. 모두들 생산 대비 차질 없는 업무나 철저한 공정관리에 매진하겠다는 그야말로 입에 발린 말들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이번엔 윤과장, 이야기해봐.”
“내년에는 훌륭한 아버지가 되겠습니다.”
“오호, 그래? 그런데 어떻게 하면 훌륭한 아버지가 되는 거야?”
간단하게 한마디 하면 끝날 줄 알았는데 그 내용을 설명해야 되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잠깐 머뭇거리자 내가 운영하는 과(課)의 주무 대리가 끼어들었다.
“잘하면 됩니다!”
모두들 크게 웃는 소리가 커다란 식당 홀에 번져갔다.
"그렇구만. 다음 사람 또 해봐."
위기를 모면하는 순간이었다. K전무는 단구(短軀)에다 일본어 실력이 원어민 이상이며 그가 맡아왔던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전문 분야에 있어서 그룹 내의 최고 전문가로 손꼽히고 있었다. 그런데 몇 개월 후 그가 소리 소문 없이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모두들 그 이유에 대해 궁금해 했지만 딱히 똑 떨어지게 납득하게 만드는 풍문 또한 없었다.
♣
“아니, 선배님은 그 이유를 정말로 몰랐단 말입니까?”
“나같이 변방에 있는 자가 높은 양반들 동정을 어떻게 알겠소?”
그 시절 직장에서 친하게 지내던 C라는 대학 후배가 있었다. 같은 동네 살면서 출퇴근 통근버스에서 인사하다 어느 날 우연히 회사 근처 술집에 만나 통성명하면서 친하게 된 사이였다. 그는 내가 다닌 대학의 2년 후배로 전자제품을 만드는 회사에 근무하다 고향에 근무하기 위해 지방으로 온 것인데 속한 부서가 ‘감사팀’이었고 맡은 직무가 직원들의 비리나 비위(非違)를 감찰하는 일이었다.
“선배님께만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K전무의 비위에 대해 감사를 했고 감사 마무리 즈음에는 사표를 쓰더군요.”
“아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이 그런 경우겠지요. 비서인 ○○이를 아시지요?”
“재작년에 내가 서무로 데리고 있었지. 키 크고 통통한 걔 말이지?”
“굳이 죄명을 정한다면 성추행과 성폭력 사이의 행동을 석 달 동안 지속한 것이지요. 괴로움을 견디다 못한 ○○이가 부모님에게 고통을 털어놓았고 아버지가 감사팀에 전화하는 바람에 제가 조사를 하게 되었어요.”
“아니, 도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육십을 바라보는 양반이?”
“결재서류나 차(茶)를 들고 ○○이가 전무 방에 들어가면 치마나 가슴에 손을 넣고 또 입을 맞추고……. 얘가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하면 호출하고……. 서울의 집에 다녀온 월요일에 심하게 그러다가 하루 쉬었다 수요일 또 그러다가 서울 집에 가는 휴일을 앞 둔 토요일에는 가장 심하게…….”
“영감쟁이 그거, 미친 거 아냐?”
“그래서 제가 인면수심이라 했지 않습니까? 그래도 제가 제보 받은 내용을 조목조목 추궁하니 그 자리에서 ‘알겠다’며 사장실에 가서 사표를 내더군요.”
♣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그간 보직 변경이 생겼고 하늘처럼 믿던 임원이 타관계사로 전출되는 바람에 중간에 나는 그야말로 '붕 뜨는' 신세가 되어 전혀 생소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 즈음에 전 직장에서 업무상 알고 지냈던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게 되었다. 선배의 아내는 해수욕장으로 유명한 해변 동네에서 ‘공인중개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C과장이라고 아시죠?”
“잘 알지요. 제 후뱁니다. 감사팀에 근무 중이지요.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C과장이 일으킨 문제에 대한 자초지종 이야기를 듣고 나니 놀란 마음에 머리가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했다.
내 후임자가 사택을 구입하면서 선배의 부인이 운영하는 부동산중개업소가 밀집한 동네에서 많은 불미스런 일들을 저질렀던 것이 시발점이었다. 그것이 제보되자 사실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C과장이 그곳에서 실사를 했는데 거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인데요?”
“C과장이 비리를 캐기 위해 부동산 업소 여사장들과 한잔하면서 뭘 알아내려고 한 것 같은데 너무 많이 마셨나봐. 여러 여사장들이 그날 그에게 성추행 당했다고 분개하고 있어요. 후배 회사에 아는 사람이 후배뿐이어서 내 이렇게 전화했어. 어떻게 시정조치를 해보쇼.”
우선 인지상정이 발동하여 C과장이 다치는 일이 생겨서는 곤란하겠다는 판단이 섰다. C과장은 나를 믿고 의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행동은 상식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웠다. 회사의 녹을 먹는 입장에서 분명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기도 했다.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나는 감사팀의 다른 선배에게 사실을 털어 놓고 C과장에게 비밀로 할 것과 그를 이해하면서 일을 처리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세상에 비밀은 없는 듯해 보였다. 눈치를 챈 C후배는 자신이 감사팀 내에서 감찰을 받고 있는 사실을 내게 이야기하며 자신에게 직접 해결토록 하지 않은 점에 대해 내게 서운해 했다. '돌고 도는 물레방아'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일주일 후, 감사팀장이자 책임자인 J부장이 나를 불렀다. 사무실 밖 벤치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며 그는 내손을 꼭 잡았다.
“그 일은 잘 해결했네. 그분들에게 충분히 사과했고 어느 정도 이해를 하더군. 자네도 잘 알겠지만 이번 일이 상부에 알려졌더라면 임원 진급을 앞 둔 내 직장 생활은 끝났을 것 같군. 신세졌네. 자네에게 이렇게 고맙다는 말 전하며 내 언젠가는 이 빚을 갚도록 하지.”
이후 세월이 지나 8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조간신문 경제면을 펼치니 젊은 베르테르의 연인 이름으로 유명한 유통 / 관광 계열 회사집단인 L그룹 사장단 인사 발표 내용이 눈에 띄었다. 기사에는 그간 잊고 있었던 이름 하나가 눈에 띄였다. J부장은 임원이 된 후에 나와 함께 프랑스계 자본이 접수한 그 회사를 떠났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L호텔 사장으로 임명된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 즈음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했으나 그야말로 고전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을 시기였다. 갑자기 그가 내게 ‘언젠가는 이 빚을 갚도록 하지’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J사장과 나와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후배 한 명이 나에게 말했다.
“연락을 한번 해보시죠. 밑져봐야 본전 아닙니까?
내가 답했다.
“연락은 무슨……. 그렇게 하면 내가 쪽 팔리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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