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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옛날의 금잔디

수난이대(受難二代)

by 언덕에서 2015. 6. 19.

 

 

 

 



수난이대(受難二代)

 

 

 

현재 국립경상대학교의 전신인 진주농과대학 전경 (1948년)

 

 

  


내가 스무 살 때 돌아가신 아버님은 처가를 무척 기피하셨다. 누구에게나 어릴 적 외갓집의 추억은 소중하겠지만 아쉽게도 내 유년의 기억은 어쩌다 한두 번 외가에 잠시 들른 기억뿐이다. 가장 또렷한 기억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낙동강 강변 언덕 아래 숲속의 찌그러진 초가집에 도착했던 일이다. 밤이 되어 잠을 청할 무렵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문밖으로 나가보니 상복을 입은 어머니와 외숙모 단 두 사람이 향이 타오르는 음식상 앞에서 통곡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 있다(외할머니의 초상날이었다). 또 다른 기억은 그 즈음 외갓집에서 외사촌들과 식사하는데 그릇에 담긴 밥은 쌀이 섞이지 않은 새까만 꽁보리밥에다 반찬은 무절임 한가지뿐이어서 밥을 먹지 못하겠다고 앙버텼던 장면이다. 아마 너덧 살 즈음일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 회상해보면 지지리도 못살던 처가에 대한 아버님의 반감은 당신도 먹고 살기 어려운데 자신에게 항상 신세지는 처가 식솔들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감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훗날 내가 좀더 자란 후에 알게 되었지만 외사촌 중에 맏이였던 큰형은 부산에서 공립 공업고등학교에 다녔는데 아버님 슬하에서 기숙하고 통학하면서 권투를 배운 모양이다. 청소년 시절이고 부모 품을 떠나서 학교에 다니는 관계로 비뚤어지기 쉬운 시기였을 것이다. 후일담이지만 외사촌 형은 훈계하는 고모부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철없는 아이였으니 젊은 아버님의 처가기피증은 어느 정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사진출처 : 브리태니카 사전

 

 

 큰외삼촌은 경상남도 김해 지역 토호의 장남으로 광복 전후시기에 남로당 산하 조직인 민청1 경남위원장을 맡은 거물 좌익 인사였다. 진주농과대학2을 졸업한 당시로는 대단한 인텔리였는데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그의 행적은 10년 후배인 나림 이병주3의 소설 ‘지리산’에서 희미하게나마 엿볼 수 있다. 1950년 벌어진 한국전쟁은 한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큰외삼촌의 유일한 남동생인 둘째 외삼촌은 전쟁 중 우익에게 붙잡혀 즉결처형을 당했다. 17살의 소녀인 어머니는 수북이 널린 시체더미 속에서 오빠의 시체를 기어이 찾아내었다고 했다. 그들을 피해 토굴 생활을 하다 휴전을 알게 된 큰외삼촌은 군경에 자수하여 전향을 선언하고 얼마간의 복역 후 출소했지만 이미 한 집안은 박살이 난 상태였다.

 외삼촌은 빨치산과 진배없는 도피생활이 힘들었는지 아니면 토굴생활 때문인지 자수 후의 고문 후유증 때문인지 한국전쟁이 끝난 후 몇 년을 버티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다가 5남 2녀의 자식들과 빚더미만 외숙모에게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아버님은 노가다를 하면서 겨우 연명하는 자신에게 틈만 나면 손을 벌리는 처가 식구들이 싫었을 것이다. 이는 본능적인 것이라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그런 연유로 내게 외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1960년대 중반, 외사촌 큰형은 질풍노도와 같은 청소년기를 방황하다 결국은 공업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입대 후 월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빨갱이였다는 연좌제4 때문에 무엇 하나 마음대로 꿈을 펼칠 수 없는 좌절감, 그것이 원인이 아닐까 한다. 비둘기 부대5. 지금도 그때 형이 편지로 어머니께 보낸 사진을 보관하고 있다(위 사진). 먹고 살기 힘들었던 그때 참전 후 얼마간의 보상금을 받아 집안을 일으키는 방법만이 장남으로서 집안을 살릴 길이라고 판단했었던 듯하다.

 그러나 제대 후 그의 사회생활은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도시빈민으로 살기보다는 고향인 농촌에서 뭔가를 하며 집안을 일으킬 생각을 했었던 것 같은데 농사지을 땅뙈기 하나 없는 상태에서 외숙모와 여러 명의 동생들을 부양하며 생계를 도모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 후 사십이 다 된 나이에 겨우 결혼하여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으나 여전히 직장은 변변치 못했다. 고향의 면사무소 보조직원으로 근무했으니 변변한 수입원일 수 없었다. 이후 그를 만난 곳은 내가 스무 살이 되던 해의 부산 시립병원 중환자실에서였다.

 월남전 고엽제 후유증 때문인지 뚜렷한 병명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위독하다는 소문을 듣고 어머니와 병문안 간 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때 어머니는 봉투에 십만 원을 넣어서 쾌유 후 몸보신에 사용할 것을 당부했는데 형은 만원 지폐 열 장을 두 손으로 세고 또 세면서

 “고모, 내 나으면 이 돈 꼭 갚을 깨요!”를 반복했다.

 어머니는 그 모습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는 푸념을 이후에도 여러 번 하시곤 했다.

 

 

 외삼촌의 나머지 자식들, 즉 나의 외사촌 형제들의 삶 역시 곤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명의 누이는 이촌향도 하여 대구의 방직공장에서 일하던 중 ‘여호와의 증인6’에 빠져 직장을 그만두고 외가와의 소식을 끊고 말았다. 외숙모는 우리 집에 들를 때마다 손아래 시누이인 어머니에게 ‘이것들이 살아는 있는지’라며 눈물을 짓곤 했다.

 외사촌 큰형 바로 밑에는 두 살 터울의 동생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도 나보다 열 댓 살가량 많은 그 형님은 술을 너무 마신다는 선입견으로만 남아있다. 도시의 유일한 혈육인 고모의 집에 가끔 들릴 때에도 항상 만취한 상태였으며 어떤 날에는 밥 대신 진로 포도주 두 병 정도를 대낮에 마시곤 했다. 고향에서 목수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형은 결혼하였으나 슬하에 자식을 두진 못했다. 선전적으로 약골의 체질에다 술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 형 역시 사십 살을 넘기지 못하고 단명하고 말았다.

 내가 서른여섯 살이던 해, 근무하던 회사의 숙원사업인 자동차 공장이 지금은 부산시 강서구 신호공단으로 알려진, 과거 경남 김해시 녹산면 지역에서 완공되었다. 당시 공장 총무과장으로 일하던 나는 식당에서 일할 조리보조원을 수십 명 뽑을 일이 있었는데 주로 회사 식당의 설거지나 식자재 세척, 조리실 청소나 잔반 처리 등의 궂은일이었으나 대기업의 정식 직원으로 대기업 기준의 월급이 만만찮았고 고용이 보장되며 근무시간이 8시간이라는 점에서 공장 주변의 주부들에게는 선망의 직장이었다. 며칠 동안 면접을 보던 나는 구직자들 대부분이 내 외가 근처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갑자기 혼자 된 외가의 둘째 형수가 생각났다. 형이 죽고 난 다음 여자 혼자 힘으로 동네의 궂은일을 하며 힘들게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는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퇴근한 나는 어머니에게 그 형수에게 연락하여 면접을 보러오라고 전할 것을 요청했다.

 “면접하러 가믄 합격이 되나?”

 “별 하자 없으면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어머니는 온 얼굴에 화색을 띄며 기뻐하셨지만 실제로 통화를 하고 난 후에는 표정이 바뀌셨다.

 “갸한테 전화했떠니만 안할라꼬 하드라.”

 “이유가 뭐죠?”

 “너무 하고 시푼 일인데 지같이 무식한 년이 그기를 니 빽으로 들어가서 그 사실이 소문 나믄 대럼('도련님'의 경남 사투리)한테 폐만 끼칠 꺼 같다고 그라네.”

 

 

 


 시간이 흘러 10년 후, 내가 사십 대 중반이 되었을 때 외사촌 형제들을 다시 만날 기회가 생겼다. 내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외사촌 5남 2녀 중 두 명은 죽었고 세 명의 형제와 두 명의 누이를 만나게 된 것이다.

 두 명의 누이는 여전히 여호와의 증인을 믿고 있는 듯했다. 외사촌 셋째 형은 다섯째인 동생과 함께 목수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내가 구입한 시골 촌집을 자신이 개조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급공무원인 넷째는 나와 동갑인데 외삼촌들과 죽은 형들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했다. 문상을 마친 그가 내게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었다. 내가 말을 꺼냈다.

 “살다보니 이런 일이 있어야 만나게 되네?”

 그가 답했다.

 “그렇군. 사는 게 뭐 이렇노.”

 어머니 돌아가신지 10년이 다 되어간다. 외사촌들, 이제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만나질지 모르겠다.

 

 

 

 

 

 

  1. 해방 전후 결성된 남노당 산하 청년 조직. 조선민주청년동맹 [본문으로]
  2. 이후 진주농업대학으로 불리었으며 현재 국립경상대학교의 모체이다. [본문으로]
  3. 1921 ~1992) 경남 하동 출생. 서울. 소설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를 마치고,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불문과로 전학했다가 학병 문제로 중퇴했다. 진주농과대학·해인대학 교수를 지냈고, 1955년부터 〈국제신보〉 편집국장으로 있었으나 5·16군사혁명 때 노동조합과 관련된 필화사건으로 신문사를 그만두었다. 그뒤 한국외국어대학 강사, 한국농약사 사장 등을 지냈다. 장기간 미국에 머물며 대하소설 〈제5공화국〉을 집필하던 중 지병이 악화되어 귀국한 지 1개월 만에 죽었다.1965년 〈세대〉 7월호에 〈소설 알렉산드리아〉를 발표해 등단했다. 이어 발표한 〈관부연락선〉(월간중앙, 1968. 4~1970. 3)은 일제말부터 해방직후까지를 배경으로 양심적 지식인의 비극적 행로를 그렸으며, 이러한 작품세계는 대표작 〈지리산〉(세대, 1972~1978. 8)에 이어졌다. 〈지리산〉은 일제강점기에 항일의식을 지녔던 진보적 지식인이 해방 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선택하고 그 선택으로 인해 현대사의 커다란 비극의 담지자가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실을 그려냈다. 〈지리산〉에 이어 발표한 〈산하〉(신동아, 1974. 1~1979. 8)·〈그해 5월〉(신동아, 1982. 9~?)은 현대사의 격변기를 배경으로 했다. 소설집으로 〈관부연락선〉(1972)·〈지리산〉(1978)·〈행복어사전〉(1980)·〈바람과 구름과 비〉(1982) 등이 있다. [본문으로]
  4. 한 사람의 죄에 대하여 특정범위의 사람이 연대책임을 지고 처벌되는 제도. 6·25전쟁과 남북분단이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에서 사상범·부역자·월북인사 등의 친족에게 사실상 불이익처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예를 들면 해외여행이나 공무원 임용에 있어서의 불이익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행은 형법상의 자기책임의 원칙에 반할 뿐만 아니라, 헌법에 보장된 개인의 기본권과도 충돌을 빚게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점이 인식되어 1980년 헌법은 제12조 3항에서 연좌제 폐지를 헌법적 요청으로 규정했다. [본문으로]
  5. 베트남에 처음으로 파병된 약 2,000여명 수준의 육군 건설지원단. 베트남 파병을 목적으로 공병단 위주로 구성된 비전투부대였고, 이후 미국의 요청에 따라 해병대나 육군보병사단과 같은 전투부대를 파병하게 되었다. [본문으로]
  6. 19세기 미국에서 시작된 기독교계의 신종파이다. 1872년 찰스 테이즈 러셀(Charles Taze Russell)이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설립한 국제성서연구자협회(International Bible Students Association)가 그 기원이다. 현재는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한국에는 1912년 R. R. 홀리스터에 의해 처음 전파되었다.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은 1931년 조지프 러더퍼드(Joseph Rutherford)가 러셀의 뒤를 이으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러셀의 후임자인 네이선 노어는 뉴욕 사우스랜싱에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학교(WatchTower Bible School of Gilead)를 세워 선교사와 지도자를 양성했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전도를 할 수 있도록 성인교육 과정을 두었다. 그 뒤 1977년 프레더릭 프랜츠가 뒤를 이었고, 1992년 밀턴 헨첼이 후임으로 선임되었다.여호와의 증인은 기독교의 중심 교리인 삼위일체, 지옥, 영혼불멸 등을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라 이교의 혼합된 교리라고 보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를 하느님과 동일하거나 동등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정부의 권위를 존중하지만, 모든 정치적인 활동에서 분리되어 중립을 유지한다. 병역을 거부하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데, 그것이 평화와 사랑을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이며, 성서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신념 때문이다. 신학적인 면에서 그들은 성서 전체의 주제가 '하느님의 왕국'에 대한 것이라고 보며, 하느님의 신정국가 대리인인 예수를 통해 죄인이 하느님과 화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의 교회는 왕국회관(Kingdom Hall)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데, 이 곳에서 예배를 하고 성서 교육을 받는다. 여호와의 증인은 매우 엄격한 도덕적 행동을 강조하는데, 간음을 제외하고는 어떤 경우에도 이혼을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성서를 근거로 무수혈 치료만 수용한다.신도들은 구역을 나누어 호별방문, 성서와 성서 출판물 발행, 배부 등의 활동을 한다. 달마다 잡지 형식의 《파수대 (The Watchtower)》와 《깨어라! (Awake!)》를 발행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여호와의 증인 [Jehovah's Witnesses, ─證人] (두산백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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