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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윤대녕 단편소설 『상춘곡』

by 언덕에서 2016. 4. 5.

 

 

윤대녕 단편소설 『상춘곡』

 

윤대녕(尹大寧.1962 ∼)의 단편소설로 1996년 간행된 단편소설집 『상춘곡』의 표제작이다. 벚꽃이 만발한 봄날에 좋아했던 여인한테 띄우는 한 남자의 편지에 관한 이야기다. 사랑의 감정은 미묘하고 아름답다. 더욱이 그러한 감정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는 건 참으로 애틋하고 따뜻하다. 화창한 봄날, 활짝 핀 벚꽃들 사이로 자신의 첫사랑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소설이다.

 그런 면에서 단편소설 『상춘곡』은 인간이 어떤 길을 향하여 떠나는 그 도정의 완성편이라고 해도 좋을 아름다운 작품이다. 또한 『상춘곡』은 한국인의 피 속에 흐르는 귀촉도의 피울음 같은 정서를 토해낸 절창, 서정주의 시  ‘선운사 동구’를, 소설로 풀어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선운사 골짜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3월이 하순으로 기울어질 무렵, 선운사의 동백은 아직 꽃망울을 머금고 있을 뿐 봉오리를 터뜨리지 않고 있었다. 주인공 ‘나’는 이 동백이 피기를 기다리면서 선운사 동구(洞口)의 한 여관에 머문다. 그리고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자신의 발걸음을 7년 만에 이곳 선운사까지 이끈 여인, ‘란영이’에게 편지를 쓴다. 단편소설 『상춘곡』은 바로 그 편지글이다.

 ‘나’는 결국 동백도 벚꽃도 개화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란영과의 10년 세월 만남과 헤어짐을 스스로가 쓰는 편지로 돌아본다. 서른여섯의 사내 ‘나’는 동백의 개화는 목도하지 못했지만 단 하나 진실의 개화를 자신의 내부에서 보게 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열흘 전 나는 고교 시절 미술 선생님이었던 화가 인옥이 형으로부터 작품전 초대를 받고 란영의 소식을 듣는다. 란영은 10년 전 스물여섯 살 때 인옥이 형의 소개로 알게 된 그의 고종사촌 여동생이다. 만나는 날 둘은 늦게까지 술을 마시게 되고, 나는 란영에게 불같이 치솟는 연정을 느낀다.

“하필이면 왜 이런 때 사람한테 승부를 걸어요”라는 란영에게 나는 그녀의 고향인 고창의 “선운사로 내려가겠다”고 객기 넘치며 과격하게 선언한다.

 내가 머리 깎고 선운사의 요사채로 내려간 지 보름쯤 지난 날, 연둣빛 봄 햇살처럼 나의 방으로 찾아와 “이제 속이 후련해? 니가 뭔데”라며 가슴을 치는 란영과 나는 ‘괴로운 젊은 중생 두 것들이 부처님 발아래서 물과 불이 다 타고 마를 때까지’ 정사를 치른다. 란영은 당시 열심인 운동권의 대학생이었고, 재수생이었던 나와는 결국 헤어져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고, 이혼했다. 7년 만에 인옥이 형의 손에 이끌려 란영을 만난 나는 다시 선운사를 찾고, 미당 서정주를 만나게 되고, 란영에게 편지를 쓴다.

 “우린 진실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깨달은 지 이미 오랩니다. 그것은 한편 목숨의 다른 이름일 겁니다. 그러니 이제는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아무한테나 함부로 그것을 들이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멀리서 얘기하되 가까이서 알아들을 수 있는 나이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야 서로의 생에 대해 다만 구경꾼으로 남은들 무슨 원한이 있겠습니까. 마음 흐린 날 서로의 마당가를 기웃거리며 겨우 침향(沈香)내를 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된 것이지요.”

 침향내 같은 진실의 냄새를 맡은 나는 동백꽃의 개화를 보는 대신 동백기름을 한 병 사서 란영에게 보낼 작정을 하며 “당신은 여인이니 부디 어여쁘시기 바랍니다”라고 편지글을 맺는다.

 

 

 길을 떠나고 길 위에서 여자(혹은 남자)를 만나고, 둘의 인연이 겹쳐지고, 헤어지는 과정에서 얻는 생에의 깨달음이야말로,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이 작가 소설의 기본적 틀이다. 혹은 ‘시원(始源)’이라고도 하고 혹은 ‘우리 소설에 나타난 생물학적 상상력’이라고도 이름 붙은 순수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 작가가 항상 추구하는 소설적 주제다. 소설 문장이라기보다는 시구(詩句)처럼 운율을 담고 예스런 맛으로 이어지는 그의 글솜씨는 이런 주제에 대한 아름다운 실체를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은 봄의 서사(敍事)라고 불러야 할 듯하다. 기나간 겨울이 지나고 꽃이 피고 식물의 싹이 트고 새가 노래하는 봄의 풍경을 첫사랑에게 보내는 편지로 만들어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아름다운 봄의 절경 뿐만 아니라 선운사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여 그곳에 머무는 사람들과의 대화, 오래전 추억으로 남은 일을 떠올리게 만든다. 진실은 세월이 흐른 뒤에 무엇으로 남는지 이야기한다. 그리고 미당 서정주 시인을 만난 인연을 소개하면서 작은 인연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도 깨닫게 한다.

 주인공은 오래전에 끝나버린 첫사랑이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아이를 잃고 이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것을 알게 된 남자의 심경은 편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에게 첫사랑은 영원한 첫사랑으로 봄꽃 같이 푸르고 화사함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미당의 시로 살아나고, 다시 작가의 소설에서 되새겨진다. 이렇듯 핏속에 박힌 우리의 정서는 언제나 선운사를 동백과 육자배기를 기억하게 한다. 『상춘곡』의 주인공인 내가 란영에게 보낸 편지구절 ‘벚꽃도 만세루가 불탄 검은 자리에서 피어나는 것이 더욱 희고 눈부시다’는 깨달음의 장소로도 기억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