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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서영은 단편소설 『먼 그대』

by 언덕에서 2016. 3. 15.

 

서영은 단편소설 『먼 그대』

 

 

 

서영은(徐永恩. 1943 ~ )의 단편소설로 1983년 [한국문학]지 5월호에 발표되었고 1983년 제7회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희생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 즉 고통을 통해 영혼이 상승된다는 서영은 소설의 일관된 주제의식이 드러나 있다. 또한 인간 욕망의 원형을 우화적인 틀과 상징적 문체로 그려낸 작품이다. 주인공 문자의 말없는 인내심은 어떤 상황, 어떤 조건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절대 긍정의 자신감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순수한 '나'와 타락한 세계와의 대립으로 존재하며,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아주 자연스럽게 펼친다. 그럼으로써 신화적 세계와 그를 향한 인간의 몸부림을 우화적으로 표현하여 실존적 개인의 삶의 궤적을 통해 진실된 삶의 의미를 추구한다. 물질의 노예가 된 세상에서 의미있는 일이란 정신적인 순결성을 지키는 것이라는 작가의 일관된 주제의식이 짙은 작품이다.

 그러나 꺼꾸로 읽으면 현대사회의 남녀 불평등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나쁜 남자 사랑하기'라는 독특한 습관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하겠는데, 사랑이라는 감정이 알코올 중독이나 도박 중독, 게임 중독처럼 한번 적응하면 끊을 수 없는 습관화가 이루어짐을 증명하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이 사십이 다 되어 가는 '문자'는 아동도서를 간행하는 H출판사에서 교정 일을 보는, 10년 경력의 말단 사원이다. 노처녀인 그녀는 전혀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남루한 옷차림에 비참하고도 힘든 생활을 하지만, 자신의 생활 속에서는 타인이 발견하지 못하는 기쁨과 행복을 가꾸고 누리며 살아간다.

 '한수'라는 사내를 알게 되면서 그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그에겐 이미 처자식이 있음을 알게 되어 결혼을 하지 못하고 그냥 함께 살게 된다. 그녀는 한수의 아이까지 낳게 된다. 그러나 아이는 한수의 본처가 와서 빼앗아 갔다. 사실 한수의 처는 문자와 한수의 살림살이까지 부수어 놓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문자의 방에는 부술 경대도, 화장품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아이만 빼앗아갔다.

 문자는 광산업에 실패한 한수가 자신을 묶어 놓으려고 한수와의 사이에서 낳은 옥조를 데려가도, 세들어 사는 집 주인 여자가 억지를 써 가며 집세를 올려 받아도, 남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자기 맘 속의 어떤 그윽하고 힘찬 그 무엇으로써 생활해 나간다.

 그러나 한수는 무직자가 된 이후로 문자를 찾아오면 소주나 마시고 거기다가 돈을 요구한다. 문자는 직장의 월급을 모두 털어 주고도 모자라면 빚까지 내어다 준다. 어느 날, 한수가 물주를 만나겠다고 거액의 돈을 요구해 왔을 때도 문자는 돈을 구하러 이모네 집을 찾아갔다.

 이모는 문자에게 좋은 신랑감이 있으니 이번에는 꼭 결혼하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녀의 승낙을 받지 못한 이모는 매우 못마땅한 표정으로 돈을 만들어 주었다. 그녀가 이모네에서 돈을 구해 왔을 때 이미 한수는 술에 곯아 떨어진 뒤였다. 그러나 문자는 담담한 얼굴로 한수에게 돈을 내어 준다.

 그녀는 혈육마저도 소유의 집념에서 초극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면서, 또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낙타'를 끌어내어 모든 것을 사랑해야 한다고 여기면서 살아간다. 한수가 끊임없이 요구해 오는 돈을 구해 주면서도 원하면 원하는 만큼 그 물질에 철저한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문자의 말없는 묵묵함은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아래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절대 긍정의 자신감에서 기인된다. 한수의 모질고 험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것을 그녀에게 한층 더 큰 시련을 주기 위해, 더 높은 곳으로 멀어지는 신의 등불처럼 여긴다.

 

 

  

 이 작품의 '문자'는 바로 작가 자신이며 그녀의 작품 세계에서 줄곧 반추되어 온 인간형이다. 작가는 삶에 대한 철저한 인내와 고뇌를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문자는 자신이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 어려움을 따스한 긍정으로 연결시킨다. 그것은 자학이 아니라, 삶에 대해 그녀가 품고 있는 무한히 천진한 감사와 기쁨에서 비롯되는 힘이다. 그 힘에 의해 그녀 속의 샘은 결코 마르는 법이 없다. 마치 낙타가 갈증이 가장 심해질 때 등의 혹을 물로 바꾸는 식이다.

 문자는 이해타산으로 불모지가 되어버린 이 세상에 철저한 사랑으로 헌신한다. 아마 이 헌신적 사랑은 문자의 삶을 지탱해 주는 기둥이기도 하다. 문자는 자기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한수에게 시종일관 사랑으로 대한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직장에서나 이웃에 대해서도 그 헌신적 봉사를 해왔다. 이 작품은 거창한 말로 담을 수 없는 그저 평범한 한 여자의 일관된 행동을 통하여 사랑이 고갈된 현대인에게 특정한 종류의 삶을 깨닫게 해준다. 이 작품에 나오는 낙타는 끈질긴 인내로써 사막을 건넌다. 한수는 그녀의 사랑을 시험하는 시약과도 같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한수는 그녀의 진실한 사랑의 덫에 걸린 불쌍한 동물이나 다름없다. 작품의 제목 '먼 그대'는 한수에 대한 문자의 마음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그녀가 도달해야 할 대상에 대한 역설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은 현실에서 단순화된 몇 가지 재료들을 빌려오지만 그 조형 방식은 소설의 가장 원초적 형식인 우화에서 찾고 있다. 그 우화적인 틀과 상징적 문체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잠재하고 있는 욕망의 원형을 비춰 보이기 때문에 뜻밖의 미적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분노가 필요하다. 노예가 되어도 좋은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말장난일 뿐이다. 심리학에서는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성인이 되어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것을 유독 참지 못하며, 상대가 누구든 간에 관계 속에서 나오지 않으려고 상대방에게 매달린다고 해석한다.

 정신의학자 자크 라캉1은 상담 경험을 통하여 '상대방의 학대에 저항하지 않고 견디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어린 시절에 형성된 자기모멸의 감정을 만회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니까 학대하는 사람보다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즐기려는 일종의 마조히즘적인 태도라는 것이다.

 이 소설을 다 읽으면 이 세상의 많은 '문자'들이 눈에 어른거린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빈익빈 부익부 사회. 40%에 가까운 사상 최대의 청년 실업률에도 분노하지 못하게끔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책을 팔고 있는 대학 교수, 그리하여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청년들, 반액등록금으로 대학생들의 표를 갈취한 멋진(?) 정치인들. 작금의 우리에겐 나쁜 이를 좋아하는 습성이 이미 몸에 배어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영은(徐永恩.1943∼ ) 은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한 상징적이고 우화적인 수법으로 자아의 갈등을 그리는 소설가로 알려져 있다. 1983년 단편 <먼 그대>로 이상문학상을, 1990년 <사다리가 놓인 창>으로 연암문학상을 수상했다.1968년 <사상계> 신인작품 모집에 단편 <교>가 입선하고, 1969년 <월간문학>에 <나와 '나>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1972년 <당신은 잠이 잘 옵니까> 등을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자신감을 얻었다. 1973년 11월에 창간된 <한국문학>에 입사하여 발행인 김동리와 편집장 이문구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소설 <사막을 건너는 법>(1975), <황금깃털>(1980), <먼 그대>(1983)등을 발표하며 대중적으로 알려졌다. 1987년에는 원로 소설가 김동리와 결혼해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14년 자전적 소설 <꽃들은 어디로 갔나>를 발표했다.

  1. Jacques Lacan 프랑스 정신 분석 학자. 정신 분석과 철학, 문학 이론 형성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파리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자격 취득 후 1932년부터 평생을 정신분석가로 활동했다. 젊었을 때부터 초현실주의자들과 광범위하게 교류했으며, 파리에서 열린 코제브의 헤겔 강독 모임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최초 공개 낭독회에 참석하는 등 정신분석 외에도 20세기의 다양한 지적 흐름과 교류를 계속했다. 국제정신분석학회(IPA)에서의 데뷔는 1936년 마리엔바트에서 열린 제13차 국제정신분석 총회에서 ‘거울 단계’를 발표한 것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 발표가 어니스트 존스에 의해 중단된 것은 그의 이후 활동과 관련해서도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이후 1951년부터 매주 사적으로 열리던 세미나가 1953년부터 생탄 병원에서의 공개적인 세미나로 전환되면서 그 뒤 사망하기 직전까지 이어진 긴 ‘세미나’가 시작된다.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시기 라캉의 입장은 당시 IPA를 연상시키는 소피스트들에 맞서 제자들에게 산파술을 가르치던 소크라테스의 입장과 흡사한 것이었다. 이 해는 분석 실천 방법에 관한 의견의 불일치로 라캉이... 프랑스 정신 분석 학자. 정신 분석과 철학, 문학 이론 형성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 파리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자격 취득 후 1932년부터 평생을 정신분석가로 활동했다. 젊었을 때부터 초현실주의자들과 광범위하게 교류했으며, 파리에서 열린 코제브의 헤겔 강독 모임과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최초 공개 낭독회에 참석하는 등 정신분석 외에도 20세기의 다양한 지적 흐름과 교류를 계속했다. 국제정신분석학회(IPA)에서의 데뷔는 1936년 마리엔바트에서 열린 제13차 국제정신분석 총회에서 ‘거울 단계’를 발표한 것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 발표가 어니스트 존스에 의해 중단된 것은 그의 이후 활동과 관련해서도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이후 1951년부터 매주 사적으로 열리던 세미나가 1953년부터 생탄 병원에서의 공개적인 세미나로 전환되면서 그 뒤 사망하기 직전까지 이어진 긴 ‘세미나’가 시작된다.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는 이 시기 라캉의 입장은 당시 IPA를 연상시키는 소피스트들에 맞서 제자들에게 산파술을 가르치던 소크라테스의 입장과 흡사한 것이었다. 이 해는 분석 실천 방법에 관한 의견의 불일치로 라캉이 동료들과 함께 파리정신분석학회(SPP)를 떠나 프랑스정신분석학회(SFP)를 결성한 해이며, 1960년대는 IPA 내에서의 SFP 지위에 관한 협상으로 시작되는데, 이는 결국 라캉의 ‘대파문’으로 끝난다. 하지만 이러한 파문과 무관하게 라캉은 알튀세르와 레비스트로스의 후원하에 생탄 병원을 떠나 고등사범학교라는 프랑스 지성계의 최고 기관에 새로운 ‘기지’를 마련하고, 1959~1960년의 세미나인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우리 시대의 윤리’를 욕망과 관련해 새롭게 탐색하기 시작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