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운영 단편소설 『바늘』
천운영(千雲寧, 1971~ )의 등단작으로 2001년 11월에 출간된 소설집 <바늘>의 표제작이기도 하다. 단편소설 『바늘』은 문신 시술을 하는 여주인공 화자와 그녀의 홀어머니, 그리고 거세된 남성성을 상징하는 암자의 주지승, 강인한 남성적 힘을 갈망하는 청년이 엮어내는 밀도 있는 단편이다.
소설의 말미에서 ‘바늘 - 여성 성기 - 틈새’는 변신에 관한 모든 존재론적 가능성을 품고 있는 악마적인 힘을 보유한다. 바늘이 어떤 변신도 실현할 수 있다면, 여성의 틈새야말로 어떤 존재도 태어나게 하는 창조적 부재의 자리이다. 그곳은 우주를 흡수하고, 우주를 거듭나게 하는 틈새이다.
스토리의 흐름이 주지승의 살해사건을 둘러싸고 팽팽하고 긴장감 있게 사건이 전개되는 가운데, 작가는 "제도화된 여성성과 거세된 남성적 문화를 돌파하는" 특유의 힘을 보여준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라는 여자는 꼽추다. 게다가 어릴 적 간질에도 걸렸다. 간질을 고치기 위해 어머니와 함께 미륵암에 들어가 기도를 드렸고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간질은 완쾌되었다. 침수에 무늬를 놓는 일을 하던 엄마는 어린 나를 버리고 절에서 현파 스님의 일을 도우며 살기로 결정한다. 삽시간에 부모에게 버림 받은 나는 김사장의 권유로 어머니와 같이 바늘을 잡게 되지만 천이 아닌 사람의 살갗에 문신을 뜨는 기술을 배우고 직업으로 삼게 된다.
어머니가 계시는 절의 주지가 죽었는데 어머니는 '내가 주지를 죽였다.' 라며 자수를 했다. 결국 시간이 지나고 어머니는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지만, 아마도 어머니는 '내가 잘 챙겨드리지 못해서 스님이 돌아가신 거다'라는 발상으로 자수를 한 것이 아닐까? 대충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 지으며 나를 버린 어머니의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기로 했다.
어느 날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남자를 만난다. 친절하게도 그는 나의 추한 모습에도 크게 놀라거나 거부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당연하게도 별다른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열린 엘리베이터 문을 비집고 나온 우리는 복도의 반대편에 있는 각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들어가서 생각하니 잊어버리기로 했던 어머니의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과연 어머니가 주지를 죽였을까? 나는 어머니의 행동에서 강한 폭력을 느꼈다. 이 폭력의 근원은 어디일까.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찾아와 문신을 부탁하지만 그들은 보다 강인해지고 싶다는 욕구를 가진 한없이 연약한 사람들이다. 반대편 집에 사는 유약한 이미지의 남자도 나에게 강인한 무기를 몸에 새겨두고 싶다고 부탁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를 몸에 품기 원하는 남자를 위해 고심하던 내게 어머니가 현파 스님을 죽이지 않았는지 조사 중인 문형사가 찾아온다. 자연사로 사건이 확정된 이후 나는 어머니의 비밀을 알아채게 된다.
경찰에서 전화가 와 어머니의 자살 소식을 전했다. 왜 자살을 했지? 나는 의아했으나 역시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추억할 겸 그녀의 유품인 바늘함을 꺼내 바늘을 하나하나 뽑아들었다. 이상하게도 바늘 끝이 뭉툭하다. 그 순간 떠오르는 어머니의 목소리.
'바늘을 잘게 잘라 매일 녹즙에 넣어 먹이면 상대는 아무도 모르게 내상을 입고 죽는단다.'
흘리듯 이야기하던 그녀와의 기억을 떠올린 그 순간. 비로소 파악되는 바늘의 진면목, 바늘은 약하고 가늘지만 어느 순간 폭력의 화신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가슴에 작은 바늘 문신을 선물했다. 그 문신의 작은 틈 속으로 우주가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이 소설「바늘」에는 문신을 하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나’에게 문신을 부탁하는 남자들은 “나에게서 협각류의 단단한 외피를 얻으려 한다.” 협각2류의 외피를 얻는 것은 외부세계의 위협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는 힘을 갖게 되는 존재전환을 의미한다. 그들은 강인한 외피를 갈망한다. 그래서 그들은 거미나 전갈 따위의 문신을 원한다.
문신을 할 때의 남자들은 성적으로 흥분한다. “남자의 성기는 내가 바늘을 댄 순간부터 조금씩 단단해지기 시작해 밑그림이 끝날 즈음이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성이 나게 마련이다.” 다른 존재로의 전이를 갈망하는 변신의 욕망은 일종의 성적 에너지를 포함한다.
그런데 ‘나’는 “쌀밥처럼 하얗고 말끔한 남자의 얼굴”을 만난다. 옆집에 사는 805호 남자다. 그 남자가 “내 몸을 가장 강력한 무기들로 가득 채워줘”라고 요구했을 때, “나는 그의 가슴에 새끼손가락만한 바늘 하나를 그려주었다.” 이때 바늘은 어떤 변신도 가능하게 하는 미지의 강력한 힘이다. 그 미지의 힘에 화자는 여성성기의 이미지를 새겨 넣는다.
♣
“티타늄으로 그린 바늘은 어찌 보면 작은 틈새 같았다. 어린 여자아이의 성기 같은 얇은 틈새. 그 틈으로 우주가 빨려들어갈 것 같다.”
우주를 빨아들이는 틈새로서의 ‘바늘 - 여성 성기’는 어떤 무기보다 강하다. 가령, 바늘로 ‘현파스님’을 죽인 어머니의 행위는 스님으로 상징되는 제도적으로 거세된 남성적 문화에 대한 살해로 해석될 수 있다.
여자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새겨달라는 손님의 가슴에 새끼손가락만한 바늘을 하나 새겨넣는다. 바늘 끝은 작은 만큼 강력해서 사람의 몸 속을 헤집어 목숨을 빼앗기에 충분하다. 작가는 몸에, 특히 등뼈에 집착한다. 소의 몸에, 곰장어의 몸에 꽂히는 작가의 시선은 과연 바늘 같다. 또 시선은 세상의 몸에 꽂힌다. 겉치장을 벗기고 드러난 세상의 등뼈는 포식자와 피식자의 쫓고 쫓김, 먹고 먹힘이다.
천운영의 이 소설은 따뜻하지 않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실적이지만 기괴하다. 이와 반해 남자들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연약하고 무너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작가는 페미니스트인가?
- 천운영은 1971년 생으로 1994년 한양대학교 신방과를 졸업했으며 1997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현재 고려대 국문대학원에 재학중이다. 지난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바늘」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2001년 제 9회 대산문화재단 문학인 창작지원금을 받았으며 같은 해 등단작을 표제로 한 소설집 『바늘』을 출간했다. 2004년 소설집 『명랑』을 출간했고, 지난해 장편소설 『잘 가라, 서커스』를 발표하며 평단과 독자들의 찬사와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1990년대 들어 문단의 전면을 장식하며 등장했던 일군의 여성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작품 세계와 작가관을 선보여 새로운 여성 미학의 선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3년 신동엽창작상, 2004년 올해의 예술상을 수상했다. [본문으로]
- 집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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