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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세월(歲月)

by 언덕에서 2015. 6. 5.

 

 

 

 

세월(歲月)

 

 

 

 

 

오랜만에 들른 선배의 회사에서였다.

차()를 내어오는 여직원의 유달리 앳된 얼굴이 특이했는데 선배가 그녀를 부르는 호칭이 이상했다. '아무개씨'가 아니고 ‘셀렝게’ 이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형, 셀렝게라니, 왜 그렇게 불러?”

 “아, 저 아가씨... 몽골에서 한국에 유학 온 대학생이야. 이름이 셀렝게고. 오전에 파트타임으로 우리 사무실에서 서류 정리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지.”

 “아, 한국인이 아니구나.”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니 오지랖이 넓은 표시가 났다. 선배의 딸 나이와 비슷해서 그럴 것이다. 선배는 셀렝게의 치아가 부실해서 충치로 고생을 많이 하고 있는데 밤잠을 못잘 정도로 통증이 심하며 음식을 도저히 씹을 수 없는 상태라며 걱정했다. 의료보험 적용이 안되는 외국인이어서 제대로 치료받으려면 유학생의 용돈으로는 어림없을 것이다. 게다가 몽골에서 교사생활을 하는 그녀의 부모님 가정 사정도 그리 넉넉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후배, 너 아는 사람 중에 치과의사 있니? 어려운 사람 도우는 거니 염가에 치료가 가능한지 부탁 한 번 해보자.”

 “몇 있긴 하지. 그런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가만 생각해보니 아내의 여고 동창인 우리 동네 치과의원의 강원장과 나의 고등학교 동기인 백원장이 동시에 떠올랐다. 강원장은 나와 아내뿐만 아니라 우리 아이들 어릴 때부터 치아를 보살펴 주었던 우리 가족 치과 주치의기도 하다. 그런데 망설여졌다. 내가 젊은 여자를 데리고 지인에게 치료를 부탁하면 ‘어떤 사이일까?’하며 누구라도 색안경을 끼고 볼 수 있는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교 동창인 백원장에게 전화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줄 수 있을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고교 1학년 한 해 동안 나와 나란히 옆자리에 앉았던 친한 친구였다.

 “뭐 어쩌겠어? 어려운 사람인데 도와야지.”

 

 

 

 

 

 

 그러니까 그를 20년 만에 만나는 셈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 취직해서 처음으로 불려간 예비군 훈련에서 그를 만난 것인데 내가 사는 곳의 이웃동네에서 그는 정약용 선생의 호를 딴 ‘다산치과’라는 치과의원을 개업하고 있었다. 20대 후반의 나이 어린 치과 의사여서 그랬는지 예비군 훈련장 근처의 호프집에서 간단하게 맥주를 마신 기억만 남아있다.

 그가 현재 운영하는 치과 의원은 우리가 다니던 모교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데 외견상 일반적인 치과 의원과 별 다를 바 없이 보였으나 간호사들의 지나치게 짧은 치마와 짙은 화장은 좀 상식적으로 흔하지 않은 장면이었다. 젊은 남자가 치아 치료 받다가 심장 쇼크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라고 생각한 것은 공연히 해 본 나만의 생각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가씨의 치아 사진을 찍고 구강 내를 구석구석을 살피고 난 후 그는 충치가 여섯 개인데 의료보험 적용이 안 되므로 치료하고 때우고 하려면 치료비 백만 원은 쉬이 들겠다고 했다. 내가 난처해하니 반으로 깎았고 또 난처해하니 거기서 다시 반으로 깎았다. 어차피 그 금액은 선배가 지불해야 할 것이고 그는 월급에서 제하겠지만 세상에 공짜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 날이기도 했다.

 

 

 

 셀렝게를 선배의 회사로 보낸 후 둘이서 차를 마시게 되었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 그가 내게 ‘치과 의사’가 되겠다고 했을 때 내게 공짜 치료를 해주겠느냐고 물었던 게 생각났다. 당시 그는 보철은 안 되고 재료가 들지 않는 치료는 그냥  하겠다고 대답했는데 세월이 흘러 생각해보니 어릴 때부터 ‘금전 개념’이 철두철미한 사람이라는 생각과 어쩌면 나와는 근본적으로 과(科)가 다른 이라는 판단마저 들었다. 그날 그는 나를 진료용 의자에 앉게 한 후 내 치아를 봐주겠다고 했다. 당시 나는 아랙턱 치아 안쪽 두 개(아랫턱어금니)를 모두 발치한 상태로 지내고 있었는데 그는 있어야 할 곳의 치아를 없이 어떻게 지내느냐며 임플란트 수술을 종용했다. 혹을 떼려다 붙이고 온 셈이었다.

 그렇게 해서 며칠 후 나는 고가의 임플란트 수술을 하게 되었고 매주 한 번씩 통원하며 경과를 체크하게 되었다. 그날은 대기실에서 동창 ○○이를 만나게 되었다. 충치가 심해서 아말감을 때워 넣는 치료를 한다고 말한 것 같다. 내가 진료를 받고 나니 손님이 뜸해졌다. 초미니 스커트를 입은 간호사에게 커피를 청한 후 치과 원장은 담배를 피우며 거만하고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이, 저 새끼 입에서 냄새가 어찌 저리 심하니? 오버히트 할 것 같았다!”

 병원을 나서며 곰곰 생각해보니 다른 경우의 상황이 부여될 때 그가 타인에게 할 말들이 상상되어졌다. 예를 들면 내가 치료받은 후 나를 아는 다른 친구가 그에게 진료 받고 그렇게 차를 마시는 순간이면 말이다. 아까 들었던 그 말에서 내 이름만 바꾸어서 같은 말을 되풀이 할 것이다.

 

 

 

 

 

 

 

 

 어린 시절, 오로지 진리만을 추구하고 도산 안창호 정신을 공유했으며 어려운 사람을 돕는 슈바이처를 존경하던 꿈 많은 날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그 꿈은 줄어들어 모든 사람이 애초의 다짐처럼 그런 좋은 사람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나이듦에 따라 세상에 대해 점차 자신감을 잃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꿈을 잃어버리고 소시민이 되어 가며, 그 소시민은 자신의 소시민성을 감추기 위해서 허풍, 오기 따위의 위선의 세계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우리는 세월의 선물 앞에서 생활인이라는 표찰을 붙인, 조금은 뻔뻔스러운 얼굴들을 통해서 그러한 깨달음을 확인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독백하게 된다. 초등학교에선 천사로 불리던 이가 중학교에 가면 착한 애가 되고 고등학교에선 좀 양심적인 학생, 대학에선 무던한 사람이었다가 결국은 사회에서 영악한 인간이 된다고. 그리고 자신이 사는 바닥에서 일이십년 구르게 되면 꿈도 우정도 이상도 없는 속물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 도저한 비관주의 밑에는 아마도 삶의 영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뿌리 깊은 물신주의가 도사리고 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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