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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신미나 시집 『싱고, 라고 불렀다』

by 언덕에서 2015. 4. 29.

 

신미나 시집 『싱고, 라고 불렀다』 

 

 

  

 

이 시인은 섬세하고 살가운 몸의 언어와 우리의 옛 연시들을 떠올리게 하는 고전적인 구조와 상상력, 그리고 개성적인 화법과 어투”(이홍섭, 해설)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감각적 이미지의 세계를 선보인다.

 수록된 시들은 단아하기 짝이 없고, 조용히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미지나 관념을 범벅한 이른바 시기법이 없는 전통적인 시로 편안하게 읽을 수도 있다. 촌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이면의 울림은 단순한 서정이나 농촌 정서를 넘어선 현대성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인 소재를 쓰기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옛것이 아니라 현재 삶의 재료다. 시인의 시선이 향하는 것은 농경적인 삶 자체라기보다 동시대의 변두리, 거기를 맴도는 동경과 좌절이다. 현대의 몸으로 과거를 부르는 솜씨가 아름답다.

 평범한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는 감각적인 시선과 사물에 생기를 불어넣는 풍요로운 상상력, 언어를 부리는 빼어난 솜씨가 돋보이는 가운데 “농경적 삶의 배경과 지난 연대의 서정시 쓰기가 달성했던 언어와 미감의 한 진수”(김사인, 추천사)를 보여주는 단정한 시편들이 고요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싱고

 

십년 넘게 기르던 개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나는 저무는 태양 속에 있었고

목이 마른 채로 한없는 길을 걸었다

그때부터 그 기분을 싱고, 라 불렀다

 

싱고는 맛도 냄새도 없지만

물이나 그림자는 아니다

싱고가 뿔 달린 고양이나

수염 난 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 있지만

아무래도 그건 싱고답지 않은 일

 

싱고는 너무 작아서

잘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다

풍선껌처럼 심드렁하게 부풀다가

픽 터져서 벽을 타고 흐물흐물 흘러내린다

싱고는 몇번이고 죽었다 살아난다

 

아버지가 화를 내면

싱고와 나는 아궁이 앞에 앉아

막대기로 재를 파헤쳐 은박지 조각을 골라냈다

그것은 은단껌을 싸고 있던 것이다

 

불에 타지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이상하게도

 


 

 

 

 

 

 

 

 

눈 감으면 흰빛

 

살 무르고 눈물 모르던 때

눈 감고도 당신 얼굴을 외운 적 있었지만

한번 묶은 정이야 매듭 없을 줄 알았지만

시든 꽃밭에 나비가 풀려나는 것을 보니

내 정이 식는 길이 저러할 줄 알아요

 

그래도 마음 안팎에 당신 생각을 못 이기면

내 혼은 지읒 시옷 홑겹으로 날아가서

한밤중 당신 홀로 잠 깰 적에

꿈결엔 듯 눈 비비면 기척도 없이

베갯머리에 살비듬 하얗게 묻어나면

내가 다녀간 줄로 알아요, 그리 알아요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기차

 

언젠가 당신이

내 손이 차다고 말했을 적에

 

연밥 위에

무밭 위에

아욱 잎 위에

서리가 반짝였지

 

고양이 귀를

살짝 잡았다가 놓듯이

서리, 라는 말이

천천히 녹도록 내버려뒀을 뿐인데

 

꼭 당신이 올 것처럼

마을회관을 지나

비닐하우스를 지나

버스정류장을 걸어가네

 

덜 말라서 엉킨 머리카락이

마를 때까지 걸어가네

 


 

 


 

 

 

 

 

연 

 

아버지는 고드름 칼이었다

찌르기도 전에 너무 쉽게 부러졌다

나는 날아다니는 꿈을 자주 꿨다

 

머리를 감고 논길로 나가면

볏짚 탄내가 났다

흙 속에 검은 비닐 조각이 묻혀 있었다

 

어디 먼 데로 가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동생은 눈밭에 노란 오줌 구멍을 내고

젖은 발로 잠들었다

뒤꿈치가 홍시처럼 붉었다

 

자꾸만 잇몸에서 피가 났고

 

두 손을 모아 입 냄새를 맡곤 했다

왜 엄마는 화장을 하지 않고

도시로 간 언니들은 오지 않을까

가끔 뺨을 맞기도 했지만 울지 않았다

 

몸속 어딘가 실핏줄이 당겨지면

뒤꿈치가 조금 들릴 것도 같았다

 


 

 

 

 

 

 

 

 

 

첫사랑

 

큰물 지고

내천에 젖이 불면

간질간질 이빨 가는

어린 조약돌 몇개 씻어

주머니에 넣고 가지요

상냥하게 종알거리고 싶어

나는 자꾸만 물새 알처럼 동그래지고

그 어깨의 곡선을

이기지 못하겠어요, 라고

쓰고 싶은

 

 

 

 

 

 

  1. 1978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200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