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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윤택수 시집 『새를 쏘러 숲에 들다』

by 언덕에서 2015. 4. 21.

 

 

 

 

 

 

 

윤택수 시집 『새를 쏘러 숲에 들다』

 

 

 

 

 


윤택수(1961 ~ 2002)는 1961년 대전에서 태어나 충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충남 홍성의 홍주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했으며, 서울에서 몇몇 잡지사와 출판사 편집장을 역임했다. 또한 울산에서 용접공으로 일했고, 원양 어선 선원이 되어 바다로 나가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독신인 그는 2000년 8월 학원에서 강의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2년 간 투병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시집 『새를 쏘러 숲에 들다』와 산문집 『훔친 책 빌린 책 내 책』이 있다.

 이 시인은 한 권의 시집을 통해 그만의 시 세계를 창조하고 또 보여주고 있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이 시인이 꿈꾼 것은 고요하고 평범한 일상이다. 아래의 시 ‘찬가’에는 아들을 낳고 늠름하게 잘 키워 목욕탕에 가서 등을 맡기는 게 꿈의 전부다. 그것이 부러웠는지 제목도 ‘찬가’. 보통 사람들이 영위하는 작고 소박한 일상이 누구에게는 꿈이었다. 그 세계는 현실 속에 지어졌지만 현실과는 아주 다른 세상으로 그의 노래는 슬프고 아름답다.

 

 










고른 숨결의 사랑 노래


당신은 저가 싫다십니다

저가 하는 말이며 짓는 웃음이며

하다못해 낮고 고른 숨결까지도

막무가내 자꾸 싫다십니다

저는 몰래 웁니다


저가 우는 줄 아무도 모릅니다

여기저기 아프고

아픈 자리에

연한 꽃망울이 보풀다가 그쳐도

당신도 그 누구도 여태 모릅니다


머지않아 당신은 시집을 가십니다

축하합니다 저는 여기 있으면서

당신이 쌀 이는 뒤란의 우물가에

보일 듯 말 듯한 허드렛풀 핍니다

마음 시끄러우면 허드렛풀 집니다


저는 당신의 친구입니까

저가 하는 말이며 짓는 웃음이며

하다못해 낮고 고른 숨결까지도

막무가내 자꾸 친구입니까

저는 몰래 웁니다

 


 

 

 

 


 

벽시1


어둠 속에서

벽을 만난다

사소하고 침중한 벽이 만져지고

간혹 말벌들의 지붕이 탁탁거리며

손바닥을 쏜다

벽이구나

여기 기대어

잠을 자도 되겠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손가락 끝의 둔한 눈들이

더듬더듬 찾아낸

벽의 따스한

등짝이어

거기 기대어

눈을 감는다

 


 

 

 

 

 

 


찬가


나중에 나중에

고요한 시절이 오면

잘생긴 아들을 낳으리라


아들이 자라

착실한 소년이 되면

함께 목욕탕에 가리라


싫다는 아들에게

등을 밀어달라고 하리라


할 수 없어서 나의 등은 밀었어도

아들은 내게 제 등을 맡기지 않으리니


나중에 나중에

내가 늙고 아들이 장성하면


다시 목욕탕에 가리라

싫다는 나에게


아들은 등을 돌리라고 하리라

할 수 없어서 나의 등은 맡겼어도


아들은 내게 제 등을 밀게 하지 않으리니


나중에 나중에

고요한 시절이 오면

 


 


 

 

 

 

 


장마 이전


편의점에서 바나나 우유를 산다 여점원은 시든 안개꽃처럼 말랐다 그녀에게 따귀를 맞아도 변한 것 없는 세상은 퉁명스럽게 햇발을 끌어 내린다 마을버스 뒷좌석에 몸을 접어 넣는다 비어있는 자리는 좁고 다리가 저리다 정류장 푯말이 지나치는 몇 점 풍경에 스트로우를 꽃는다 그때마다 몇몇이 앞문으로 빨려 들어온다 북상 중인 비구름은 오후쯤 서울에 도착할 것이다 내가 보냈던 편지는 어느 하늘쯤 가다가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온 것일까 기우뚱 차가, 차창 밖 하늘이 돌아눕는다 기점과 종점이 맞물린 하루가 스트로우 끝에서 그르릉 그르릉 빈 바닥을 헤집는다

 


 

 

 

 

 



코스모스


이것은 숫제 감격입니다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날아들다가는

멈춰 서버리는 춤판입니다

어쩌다가 그 속에서 숨이라도 들이킬라치면

잎 진 산같이 어깨를 들썩이다가

혹은 낮게 기침하다가

눈썹에 내린 하늘빛이라니 아예 침묵입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아 어디선가

흰새 새끼들이 날개치는 소리가 있습니다

여기는 그만 바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