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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옛날의 금잔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by 언덕에서 2015. 4. 17.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중3 때의 일이다. 아주 권위적인 일가족이 운영하는 사립재단 학교를 다녔다. 교사 중에는 이사장의 가족과 친척, 친구가 많았다. 교풍은 엄했고, 재단 이사장은 하늘같은 존재였다. 당시 각 학교마다 있었던 흔한 이순신 장군의 동상은 학교에 없었고 그 대신 학교 창립자의 동상만이 학교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회 시간으로 기억한다. 그 덩치가 무척 큰 그 선생님에 대해서 학생들 사이에 말이 많았다. 이사장의 조카라는 말도 있었고 교사 자격증이 없다는 소문도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시험 답안지를 나눠주던 시간이었는데 급우 한 명이 자신의 성적이 안 좋은 것을 알고 그 답안지를 손으로 구기며 자리에 들어갔다. 그 순간 선생님은 그를 교단 앞으로 나오게 해서 한 시간 동안을 때렸다. 그 장면을 구경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는 공포의 시간이었다. 맞다가……. 맞다 못해 두 손을 모아서 잘못했다고 비는 아이에게 계속 발길질과 주먹을 날렸다. 지금 내 기억으로 그 선생님의 몸무게는 100kg는 족히 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장면을 처음 목격한 것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 두 아이가 싸우는 것을 발견한 담임선생님은 쌍벌죄를 적용해서 둘을 회초리로 때렸다. 그걸로 끝났는지 알았는데 다음날 한 아이의 할머니가 교실로 찾아와 수업 중인 선생님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싸움은 저 애가 먼저 걸었는데 어떻게 우리 성연이를 저 애와 똑같이 때려요!”

 할머니가 교실 문을 나간 지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선생님은 할머니의 손자 성연이를 교탁 앞으로 불렀다. 손목시계를 벗고 있었다. 그 다음은 말하지 않겠다. 참고로 성연이는 국립대 사범대를 졸업하여 지금 고등학교 교장이 되어있다.

 요즘 같으면 신문에 나올 가혹행위였지만 두 사건 모두 그런가 보다 하며 그냥 그렇게 넘어갔다. 권위주의 시대였으므로 아무도 그런 행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원래 학생들이란 맞고 배우는 존재라는 공감대가 사회 저변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1 때로 기억한다. 교련 시간에 20분 정도 ‘차렷 자세’로 교련 교사에게 뺨을 심하게 맞은 적이 있다. 교련 교사는 두 가지 부류가 있었다. 영관 또는 위관급의 제대 군인과  '말뚝'으로 불리는 하사관으로 제대하여 교련 선생이란 직함을 갖고 총검술과 제식훈련을 가르치던 이가 그것이다. 하사관 출신인 그가 나를 무자비하게 때린 이유는 애매했다. 자신을 쳐다보는 눈빛이 기분 나쁘다는 실로 추상적인 이유였다. 사춘기를 심하게 앓던 예민한 시절의 나는 며칠 간 ‘죽고 싶다’는 생각을 끝없이 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 다음 교련시간 같은 성당에 다니는 급우 한 명이 나와 똑같은 이유로 구타를 당하는 것을 본 후 그 ‘죽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그러한 사건의 하이라이트는 고2 때로 기억한다. 학교의 선생님 중 ‘지성인’이란 별명을 가진 독일어 선생님이 있었다('계셨다'는 표현을 쓰지는 않겠다). 헤르만 헤세, 괴테, 토마스 만, 니체, 칸트, 하이데거 등등의 유명 문학인과 철학자의 작품과 메시지는 독일어 시간에 죄다 알게 되었다. 굉장한 독서력을 가진 지적인 분이었지만 깡마른 몸매에 성격은 시그니컬한 면이 강했다. 그런데 유독 우리 반에서 수업을 할 때마다 엄격하고 짜증을 많이 내며 ‘이 반은 구제불능’이야!‘라는 발언을 자주 하셨다.

 그날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급우 B는 평소에도 의협심 같은 게 강한 편이었는데 자신이 한 마디가 급우들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다. B는

 “선생님! 유독 저희 반에만 너무 하시는 게 아닙니까? “

라는 항의를 했다. 그 의견을 듣던 독일어 선생님은 얼음과 같은 표정을 지었다.

 “반장도 아닌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내게 이렇게 따지나? 너, 앞으로 나와!”

라는 말이 끝나자 말자 손목시계를 풀었다. 윗저고리도 벗었다. 선생님이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해서 많이 배웠다고 해서 그것에 비례하여 인품과 인격이 훌륭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차마 쓰지 못하겠다. 위의 저 사진과 비슷한 장면인데 문제는 한 시간 동안 계속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 이 나이에서 반추해 보면 그 선생님의 행동은 교육적이지도 못했고 비겁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두 가지의 얼굴을 한, 짐승 같은 인간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행하던 만행일 뿐이라는 생각이었고 사실이 그랬다.

 당시의 친구들은 요즘 만나더라도 내게 많은 아쉬움을 표시하곤 한다. 박학다식함이나 논리정연한 언변, 무엇보다도 동정심이 많고 따스한 성품이어서 교육자가 되었으면 참 좋았겠다 라는 평이 그것이다. 특히 교사나 교수인 친구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내게 전달하는 헌사(獻辭)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때까지 장래 희망이 교사였던 나는 꿈을 바꾸었다. 커서 절대 하고 싶지 않은 일에 교사를 올렸다.

 대학에 들어가 보니 B는 학교 연극부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친구의 친구를 통해 들어보니 학교 수업은 아예 포기하고 연극에 완전히 미쳐있었다. 뭔가를 잊고 살고 싶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그를 만난 날, 그와 악수를 하다 눈을 쳐다보니 ‘광기’같은 게 흐르고 있어 섬뜩한 기분을 느낀 날이기도 했다.

 이후 모두들 군대를 갔다 오고, 두어 해가 지나고 졸업을 몇 달 앞 둔, 늦은 가을날이었다. 누군가 연락책 역할을 하여 같은 대학 다니던 고교 문과반 동창들이 학교 앞 술집에서 8명 정도 만나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다. 사범대 다니던 성연이도 함께 했다.

 스물여섯. 몇 달 후면 사회인이 될 것이고 결혼을 앞 둔 친구들도 있었다. 막걸리가 한잔씩 두어 순배가 돌아가니 B가 말을 꺼내었다.

 “얘들아, 있잖아……. 나 지금도 괴로워……. 그래서 잊으려고 연극을 했는데……. 독일어 선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죽이고 싶어…….”

 내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 누구보다 기억력이 좋았고 당시 그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에이……. 빨리 잊어라. 언제 때 일인데……. 자꾸 생각하면 너만 힘들잖아.”

 그때 지켜보던 다른 친구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잠시 밖으로 좀 나가자는 것이다. 밖에 나가니 그가 입을 열었다.

 “얼마나 힘들면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저러겠니? 좀 답답하더라도 들어주자. 우리라도 들어주지 않으면 쟤는 미치고 말거야.”

 아, 미안하고 부끄러운 날이었다. 아무 일도 없는 듯 자리에 들어온 둘은 그의 절규에 가까운 푸념을 계속 들었다. 또 그래야만 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30대 중반에 B의 근황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순전히 우연한 기회였다. 당시 나는 모 자동차 회사의 공장 총무 과장이었는데 근무자 작업복을 발주하여 견적서를 접수받고 있었다. 여러 견적서에는 유니폼을 입은 모델 사진이 부착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 B의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입찰자는 합성 직물을 만드는 ○○합섬이라는 대기업이었는데 그 제조사는 봉제업체에다 재발주를 한 모양이었다.  ○○합섬 영업과장은 사진 속의 B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사진 속의 인물은 봉제공장 주인의 친척으로 하는 일 없이 봉제공장을 자주 방문하는 이라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뚜렷한 직업이 없을 뿐만 아니라 무슨 이유인지 결혼도 하지 않고 홀로 외로이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교사 한 명의 무책임한 행동이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황폐하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쓰고 싶었다. 스파르타식 교육법에 의해서 그와 같은 폭력이 이뤄졌다면 좀 다른 문제일 것이다. 최소한 감정적으로 제자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니깐. 어쨌든 새삼 한국 사회에 교육이 얼마나 민감한 화두인지 내 스스로 실례를 통해 확인한 건 분명했다. 누구에게나 있는, 폭력 교사에 대한 트라우마는 이래서 괴롭다.

 글의 앞 부문에 ‘참고로 성연이는 사범대를 졸업하여 지금 고등학교 교장이 되어있다.’라고 썼다. 묻지는 않았지만 성연이는 국민학교 4학년 때 당한 그 일로 힘들게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폭력의 기억은 항상 아프다. 그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서 교사를 지망했고 평교사들이 되기 어렵다는 교장의 자리에 오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성연이는 좋은 교장 선생님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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