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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옛날의 금잔디

벚꽃 엔딩

by 언덕에서 2015. 4. 10.

 

 

 

 

 

벚꽃 엔딩

 

 

 

 

 

 

 

 

 

 

세상에는 참 우스운 일도 많다. 얼마 전 내가 휴대폰을 잃어버린 사건도 그런 우스운 사건 중의 하나다. 우습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일반적인 분별일 뿐 알고 보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세상살이에는 우스운 일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람 사는 일을 진지하고 냉정한 눈으로 관찰하고 염려해본 사람이라면 내가 겪은 ‘휴대폰 분실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에 대해서도 당연히 우스운 일만은 아니구나 하는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기억력이 줄어들었다는 것, 봄이 좋아진다는 것 이 두 개의 팩트가 만들어낸 사건은 비극인지 희극인지 구분조차 애매하다. 늙는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고 추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온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날 창밖을 보니 백목련 꽃더미가 담장 위 하늘에 아직 몇 남아있고 벚꽃은 외가닥 깃대 위에 살짝 얹힌 뭉게구름처럼 크고 화사하게 눈부셔 봄꽃의 절정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날 저녁 왜 그렇게 술이 마시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아마 벚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고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부슬비 때문에 봄밤 벚꽃 그늘 아래서 한잔하자던 계획이 무산될 것 같다는 예감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내가 알코올중독자로 비춰질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아름다운 경치에서 혼자 술 마시는 경지가 주도유단1((酒道有段))의 급수 중에서 가장 높은 단계라고 믿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물론 친한 친구와 아름다운 경치 아래서 한잔하는 것은 더 좋겠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던 내 친구 S는 40대 중반의 어느 날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귀촌했다. 그는 내가 살고 있는 도시와 가까운 농촌의 전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데 문제는 서로가 사는 거리가 멀어서 자주 만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둘이 살고 있는 도시의 중간 지점 쯤 되는 철도역 앞에서 매월 마지막 주 화요일을 회식날로 정해서 만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한창 농사일이 바빠지면 그가 시간이 나지 않고 또 어떤 달에는 내가 시간이 나지 않는 경우도 있어서 매월 마지막 주는 서로에게 나름대로 신경이 가는 주간이기도 했다. 지난달은 내가 장염을 열흘 이상 앓는 통에 또 만나지 못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의 미안한 마음은 이번 달에는 별고가 없기를 바랐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 달은 S에게 사정이 있어서 만남이 어렵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아파트 베란다를 열어놓고 창밖의 벚꽃을 내려보는 한이 있더라도 그날 꼭 술을 마시며 아름다운 봄밤의 정취를 즐겨야겠다는 당찬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퇴근하는 중이었는데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액정화면에 S의 이름이 떴다.

 “그래, 계획을 바꿨다. 지금 열차 타고 내려가고 있다.”

 전화를 받는 즉시 나는 그러자고 동의를 표하고 타던 전철에서 다른 호선으로 갈아탔다.

 이후 둘이 만난 기차역 앞도 벚꽃이 부슬비 속에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둘은 자주 가던 식당에 들러서 매월 하던 식으로 술상을 주문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의 집에 아내의 친구들이 꽃구경하러 많이들 놀러온 탓에 번잡함을 피해 오히려 도시로 내려온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둘의 성사되지 않을 뻔한 그달 행사는 이루어졌다. 주문한 도다리 회는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는 속설처럼 과연 절정의 맛을 보이고 있었다. S는 집에서 전작이 있었는지 제법 얼굴이 붉어보였다.

 그렇게 시작된 술자리는 각자 소주 1병 이상 마친 후에야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열심히 담소하는 동안 S의 집으로 향하는 마지막 기차는 이미 떠나버렸고 그는 부득불 여관 신세를 져야만 할 처지가 되었다. 그렇게 잠자리를 찾아가는데 한잔 더하지 않겠느냐는 제의가 있었고 내가 흔쾌히 응하는 통에 시내 중심부의 제법 분위기 있는 클래식 바(Bar)에서 술자리가 또 이루어졌다. S는 근처에 사는 친구를 불러서 합석을 했는데 서로 명함을 주고받다 보니 그가 경찰서 강력계 형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쨌든 술자리에서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지만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전날 밤을 복기해보니 저녁 시간 도시의 변경인 열차역 앞에서 친구 S를 만나서 마신 것과 그와 자리를 옮겨 시내에서 형사랑 또 다시 마신 것이 생각났다. 그러다 친구를 숙소에다 재우면서 귀가한 기억에서 내가 지난밤 휴대폰을 잃어버려서 당황해 하던 기억을 떠올리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휴대폰은 금년 1월에 장만한 신형인 고가인데다 작년 딸아이가 휴대폰을 잃어버렸을 때 야단치던 기억까지 떠올라 갑자기 심기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디서 휴대폰을 잃어버렸는지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갑자기 참담한 심정이 들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친구를 찾은 나는 휴대폰이 어디 있는가를 수배했지만 막연할 수밖에 없었다. 쓰린 속을 달래며 아침을 먹은 둘은 휴대폰 찾기 작전에 돌입했다. 우선 전화를 걸어 휴대폰과 휴대폰 케이스에 들어있는 신용카드를 사용 중지시킨 후 통신사 대리점에 갔다. 그곳의 직원은 휴대폰 위치 조회를 하더니 ○○텔레콤 지사 건물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다. 곰곰 생각해보니 택시를 타고 귀가하다가 취한 내가 택시에 휴대폰을 두고 내렸고 친절한 기사아저씨는 가까운 ○○텔레콤 지사에 맡겨두고 운행을 계속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판단으로 ○○텔레콤 지사에 들렀는데 그곳 직원의 이야기는 달랐다. 휴대폰의 배터리가 완전 소모되면 마지막에 송출하던 신호가 있는 곳에 가까운 기지국으로 위치가 표시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휴대폰은 그 건물이 아닌 어젯밤 내가 주로 머물렀던 곳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귀중품을 잃어버릴 정도로 엉망으로 취했다는 것이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 "죽어버리자, 죽어버리자!“를 연발하는 나를 발견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둘은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었다. 암울해진 둘은 소주를 시켜 반주삼아 마시기 시작했다. 내게는 오랜만에 마시는 낮술인 셈인데 근심이 심했는지 인당 한 병을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S의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침 일찍 S는 전날 동석하여 마셨던 친구에게 내가 가방과 휴대폰을 분실한 사실을 이야기하며 그 클래식 바의 가게명이 무엇인지를 물었던 것이다. 그는 주인과 통화한 결과 내가 가방을 두고 그 술집을 떠났고 주인이 내 가방을 보관하고 있으니 저녁 7시에 문을 열 때 찾아가라는 말을 전했다.

 

 

 

 

 

 

<내가 휴대폰을 잃어버렸던 그 술집, 인터넷에서 그 집 사진을 찾을 수 있었다>

 

 

 찾았다고는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가방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 휴대폰 이야기는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는지의 기억도 불확실한 상태였다. 눈물겨운 우정을 보여준 S는 공동 책임을 이야기하며 내가 휴대폰과 가방을 찾을 때까지 귀촌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태였다. 그래도 일곱 시에 문을 연다고 하면 최소 다섯 시에 종업원들이 가게에 출근해서 청소를 하고 주류를 준비할 것이라는 생각에 다섯 시에 그곳을 찾았다. 그러나 문은 담긴 상태였다. 할 수 없어서 둘은 맞은 편에 위치한 빌딩의 술집에 앉아 저녁 겸 반주 겸 술을 또 마시기 시작했다. 야속하게도 그 술집의 종업원은 일곱 시 정각에 술을 열었고 내민 가방을 받고 열어보니 내 휴대폰은 가방 귀퉁이에 고히 모셔져 있었다. '이제 다행이구나' 라며 한숨을 돌리는데 S가 계속 심각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말이야……. 이거 큰일 났네!”

 “왜 무슨 일이 있니?”

 “하, 점심때까지 들고 있었던 내 휴대폰이 없어졌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잃어버린 내 휴대폰을 찾느라고 동분서주하는 사이에 친구가 본인의 휴대폰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S와 나는 점심 때 낮술을 마시고 내 사무실에서 잠시 쉰 후에 예의 그 클래식 바(Bar)로 간 것이었으니 분실 위치가 내 사무실인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처럼 되지 않고 없으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밤은 또 깊어가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도착하여 걱정스레 사무실 문을 여니 친구의 휴대폰은 내 책상 위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날 고등학교 동창 둘은 네 끼를 술로 때우게 된 셈이 되었다. 

 

 

 "살아보니 세상, 별 거 아니더라! 이젠 우리도 적은 나이가 아니잖아. 아침마다 팔굽혀펴기를 하면서 느낀다. 아, 이젠 할배구나. 늙어가는구나. 아마 식탁 밑에서 팔굽혀펴기를 하면서 남자는 통속과 한패가 되어 늙어가나봐. 숭고한 건 그거야. 팔굽혀펴기의 통속. 나의 소심함이 만드는 통속." 

 가로등 아래서 나는 붉게 변하기 시작하는 꽃가지를 바라 보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벚꽃 꽃잎이 휘날려 떨어지는 팔차선 대로변 버스 정류장에서 그를 태우고 떠나가는 버스를 보며 그에게 휴대폰으로 전화를 했다. 버스는 도시의 변경에 있는 열차역으로 갈 것이다. 나는 아까 했던 말을 또 하고 있었고 그는 대답했다.

 "어쩔 수 없잖아. 이렇게 계속 늙어 가겠지. 그렇지만 다음달에 또 만나자." 

 "그래, 알았다. 이젠 휴대폰 잃어버리지 말구.”

 "너도."

 나는 몸을 돌려 부슬비가 오는 벚꽃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로등에 비친 벚꽃 더미와 떨어지는 꽃비가 볼만했다. 바람이 그쳐 꽃비가 멈출 때까지 그렇게 걸어볼 작정이었다.

 

 

 

 

 

 

 

 

  1. 청록파 시인 동탁 조지훈이 제시한 주도에도 단이 있다고 한 주도의 경지. 술을 마시는 정도에 따라서 18단을 제시했다. 부주(不酒) - 술을 아주 못 먹진 않으나 안 먹는 사람 외주(畏酒) - 술을 마시긴 마시나 술을 겁내는 사람 민주(憫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기는 사람 은주(隱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고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쉬워서 혼자 숨어 마시는 사람 상주(商酒) - 마실 줄 알고 좋아도 하면서 무슨 이익이 있을때만 술을 내는 사람 색주(色酒) - 성생활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사람 수주(睡酒) -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반주(飯酒) - 밥맛을 돋우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학주(學酒) - 술의 진경(眞境)을 배우는 사람. 주졸(酒卒)애주(愛酒) - 술을 취미로 맛보는 사람. 주도(酒從) 1단 기주(嗜酒) - 술의 진미에 반한 사람. 주객(酒客) 2단 탐주(耽酒) -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 주호(酒豪) 3단 폭주(暴酒) -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주광(酒狂) 4단 장주(長酒) - 주도 삼매에 든 사람. 주선(酒仙) 5단 석주(惜酒) -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주현(酒賢) 6단 낙주(樂酒) -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주성(酒聖) 7단 관주(觀酒) -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이미 마실 수 없는 사람. 주종(酒宗) 8단 폐주(廢酒)- 술로 말미암아 다른 술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열반주(涅槃酒) 9단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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