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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오정희 단편소설 『저녁의 게임』

by 언덕에서 2015. 6. 11.

 

오정희 단편소설 『저녁의 게임』 

 

오정희(吳貞姬, 1947~ )의 단편소설로 1979년 [문학사상]지에 발표되었으며 그 해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부녀간의 화투놀이가 소설의 소재다.

「저녁의 게임」에 등장하는 여성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빠 모두에게 상처를 받은 인물이다. 어머니는 “아가. 살려줘. 살려줘”를 외치다가 결국 아기를 살해하고 태연하게 햇빛을 받으며 머리를 묶는 여자로 설정되어 있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를 박해한 인물 혹은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인물로 나타난다. 어머니가 결국 정신이상을 겪으며 파탄에 이르도록 어머니를 억압하고 몰아간다. 오빠의 가출 또한 작중 화자에게 상처를 제공한다.

 이 작품에서의 화투 놀이는 바로 가부장적인 가족 관계를 은근히 상징하고 있다. ‘나’와 아버지가 화투 놀이를 하는 양상을 보면, 서로 무슨 패를 들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다. 화투가 너무 낡아서 훼손된 부분만 봐도 무슨 패인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게임은 지속되고 ‘나’는 사실상 아버지에게 져 주는 것으로 게임이 마무리된다. 아마도 아버지가 이기지 않는 한 화투 놀이는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이 하는 화투 놀이는 서로 들고 있는 패를 뻔히 알고서 하는 게임인데도 반드시 아버지의 승리로 끝나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아버지가 모든 것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가부장적 가족 관계다.

 이 작품에서는 무엇보다 가부장제 이념으로 대표되는 아버지와의 대립이 저녁의 게임, 즉 화투를 통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그들의 게임은“너덜너덜해진 각본으로 이루어지는 연극”에 불과한 행위이다. 그러나 여주인공은 이를 통해 무뇌아를 낳고 미쳐서 이상한 기도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결국엔 정신병원에서 죽어버린 어머니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에 대한 아버지의 억압적인 태도를 끊임없이 상기하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주인공‘나’로 등장하는 이 집안의 딸은 기형아 동생을 낳고 기도원에서 죽어간 어머니 대역으로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고, 아버지의 화투놀이 상대가 되어 저녁시간을 보낸다. 오빠마저 집을 나가 둘이만 있는 집에서 부녀는 오래 사용하여 헤져 엎어져 있어도 무슨 화투장인지 다 알 수 있는 낡은 화투로 ‘점수내기’ 화투놀이를 하며, 아버지가 이겨야만 끝나는 화투놀이를 매일같이 하고 있다.

 악성빈혈에 시달리는 노처녀인 ‘나’는 인슐린을 주사해야하는 당뇨병 환자인 아버지와 살며, 무료함을 극복하고자 저녁마다 화투놀이를 습관적으로 한다. 그리고 더 늦은 저녁이 되면 낯선 사내와 공사판에서 정사를 하고 집으로 오곤 한다(저녁 식사를 하고 화투를 치는 모습을 통해 평화로운 부녀관계를 보여주지만 이 가족의 실체는 화투치기처럼 아버지의 위선적인 권위가 횡행하고 이에 다른 가족은 상처받는 관계다).

 아버지의 부정적 행위 때문에 어머니는 기형아를 낳고 살해한 후 정신병원에 갇혀 비참하게 죽었다. 아버지 때문에 오빠는 결국 가출을 하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악성빈혈에 시달린다. 나는 겉으로는 아버지에 순종하는 딸로 살아가지만 밤마다 외출과 매춘을 통해 아버지의 위선적 권위에 저항한다. 매춘을 하고 돌아오니 아버진 아직도 재수 패를 떼고 있어 나는 자신의 방으로 가 다시 자위행위를 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작품은 단 둘이 살고 있는 아버지와 딸의 화투놀이 과정에서는 놀음판의 화투놀이와 같은 긴장감은 없고 생전의 엄마얘기, 집나간 오빠의 육성 듣기, 그리고 집안에 세 들어 사는 애기엄마의 애기 달래는 모습 등 그저 잔잔한, 지나간 일들이 대화나 생각 속에 등장할 뿐이다. “손에 든 게 없으면 선도 말짱 헛 거라니까요.”라는 딸의 말은 ‘나’의 가족이 처한 현실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너무 오래 썼거든. 새 걸로 바꿔야겠어.”라는 아버지의 말처럼 화투 몫 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을 통째로 변화시켜야 할 절제절명의 순간이 다가왔음을 웅변하고 있다. 그러나 말 뿐이지 소설 어느 구석에도 그런 변화의 느낌은 찾아 볼 수 없다.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에 대한 주인공의 노골적인 반감의 표현은 잘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내와의 성관계에서도 알 수 있다. 주인공은 환청과도 같은 휘파람 소리를 들으며 이전에 소년원의 열아홉 살 난 어린 청년과 있었던 관계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몽환적인 소리에 이끌려 잘 알지 못하는 사내와 관계를 갖고 돈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정상적인 관계나 가부장제 사회에서 요구되어지는 여성의 덕목을 깨트린다.

 이 소설에서 이 시대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작가인 오정희 문학의 특징인 유려한 메타포, 암시, 복선, 시적인 문체, 구성적 완결성이 나타난다. 이 소설은 탈출, 외출을 통한 감금의식, 정체성의 혼란, 버려졌다는 고아의식이 반영되고 있다. 여성 본연의 섬세함으로 자아를 찾아 떠나는 주인공의 순례는 기다림, 부재, 상처, 왜곡된 관능, 몸의 훼손으로 표현된다.  일상의 무의미함과 여성으로서의 본질을 찾기 위한 외출과 귀환의 반복으로 주제의식을 표출한 완결된 이 시대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이다.

 

 

 

 

  1. 오정희(1947 ~ )섬세한 내면의 정경묘사를 통해 인간의 존재론적 불안과 내면의 고뇌를 자의식적인 측면에서 예리하게 묘사하는 소설을 썼으며, 특히 여성의 심리 갈등 묘사에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화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70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작품집에 〈불의 강〉(1977), 〈유년의 뜰〉(1981), 〈바람의 넋〉(1986), 〈야회〉(1990), 〈불꽃놀이〉(1995), 〈옛우물〉(1996), 〈새〉(1996), 〈돼지꿈〉(2008), 〈가을여자〉(2009) 등이 있고,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2006), 동화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1993), 〈목마 타고 날아간 이야기〉(2000), 〈접동새 이야기〉(2006) 등이 있다.이상문학상(1979), 동인문학상(1982), 오영수문학상(1996), 동서문학상(1996), 한국불교문학상 소설 부문(2008) 등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독일에서 번역 출간된 〈새〉로 독일의 주요 문학상 중 하나인 리베라투르 상을 수상했는데, 해외에서 한국인이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로서 한국문학의 해외진출사에서 매우 의미 깊은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5년에는 〈새〉의 프랑스어 판이 번역, 출간되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