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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동리 단편소설 『역마(驛馬)』

by 언덕에서 2015. 5. 22.

 

김동리 단편소설 『역마(驛馬)』

 

 

 

김동리(金東里.1913 ~ 1995)의 단편소설로 1947년 종합교양지 [백민]에 발표되었다. 역마살 또는 당사주로 표상되는 한국인의 운명관을 그린 작품으로 운명에 패배하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순응함으로써 인간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작가의 문학관이 짙게 깔려 있다.

‘역마살’이라는 민속적인 소재를 통해 토속적인 삶과 그 운명을 다룬 이 소설은 작가의 운명론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이다. 이 소설의 배경인 화개장터는 역마살이 낀 장돌뱅이들의 집결지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삶은 자신의 의지나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주어진 역마살에 둘러싸여 있다. 이 역마살을 극복하는 방법은 결혼을 통해 한곳에 정착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 성기가 사랑하는 계연이가 어머니 옥화의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이들의 결혼은 불가능해진다. 성기가 역마살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유랑의 길을 떠나는 결말은, 운명에 순응함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믿는 한국적 운명관을 드러낸 것으로 삶의 한 형식으로 운명에의 순응을 제시한다. 이 작품은 이복이모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그 운명에 순응하는 한 인간을 통해 한국인의 운명적 삶을 그리고 있는 김동리의 문학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흘러서 세 갈래로 나 있었다. 한 줄기는 전라도 땅 구례 쪽에서 오고 한 줄기는 경상도 쪽 화개협에서 흘러내린다. 여기서 합쳐져, 푸른 산과 고목 그림자를 거꾸로 비치인 채, 호수같이 조용히 돌아, 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를 그어주며 다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 본류였다.

 남사당 패 우두머리가 경남 하동의 화개장터에서 주막집 홀어미와 하룻밤의 인연을 맺는다. 그는 전라도 지방을 여행하다가 40여 년만에야 어린 딸 계연이를 데리고 화개에 들른다. 옛 주막집에는 그 홀어미 대신 딸이 환대한다.

 화개장터에서 주막을 꾸려가며 사는 옥화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역마살을 없애기 위해 쌍계사에 보내 생활하게 하고 장날에만 집에 와 있게 한다.

 어느 날 체장수 영감이 딸 계연을 데리고 와 주막에 맡기고 장삿길을 떠난다. 옥화는 계연을 성기와 결혼시켜 역마살을 막아 보려는 심정에서 성기와 계연이 가깝게 지내도록 한다. 계연으로 하여금 성기의 시중도 들게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계연의 귓바퀴에 난 사마귀를 보고 놀란 옥화는 계연이 자신의 동생일지 모른다는 예감이 들어 두 사람이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한다. 남사당 패 우두머리가 바로 체장수 영감이고, 옥화와 계연은 서로 이복 자매가 되는 예감이 든 때문이다.

 체장수 영감이 돌아옴으로써 예감은 맞게 되고, 옥화와 계연이 이복 자매임이 밝혀지게 된다. 36년 전 옥화의 모와 하룻밤 관계한 체장수의 딸이 옥화임이 밝혀진 것이다. 서로 맺어질 수 없는 사이이기에 채장수 영감은 계연을 데리고 고향으로 떠나가게 된다. 이 일이 있은 후 성기는 중병을 앓게 되고 병이 낫자 역마살을 따라 엿판을 꾸려 계연이 간 반대 방향으로 집을 떠난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겨 놓을수록 그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져 멀리 버드나무 사이에서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고 서 있을 어머니의 주막이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갈 무렵에는 성기는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고 있다.

 

영화 <역마, 1967>

 

 이 소설의 주제는 ‘끊임없이 떠돌아야 하는 인간의 운명’이며, 배경은 전라도와 경상도 경계에 있는 화개장터다. 이 소설의 주제와 배경은 매우 밀착되어 있다. 인간의 떠돌이 운명과 삼거리라는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 잘 들어맞는 예다.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의 무상함과 미묘하게 얽혀 가는 운명의 장난이 인물들 위에 비극적 색조를 드리우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역마살을 타고난 성기는 사랑하는 계연과 정착을 이루려 하지만 운명은 그를 죽음과 유랑의 길 중 어느 하나만을 강요한다. 여기서 성기가 유랑을 택한 것은 현실적으로 운명에의 패배를 뜻하지만 그 내면에서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담긴 극기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다. 자연법칙과 인간의 생명이 하나의 원리에서 조화되는 세계를 그리는 김동리 문학의 중요한 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팔자소관에 순응함으로써 도리어 죽음에서 구제된다는 동양적 운명론을 실천하고 있기도 하다. 성기는 엿판을 메고 떠나면서 콧노래까지 부르지 않는가?

 

 

 이 소설의 테마는 역마살로 대변되는 운명론이다. 남사당과의 하룻밤 인연의 소산인 옥화는 다시 떠돌이 중과의 인연으로 성기를 낳는다. 성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역마살을 운명적으로 갖게 된 것이다. 그 역마살을 풀어 보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성기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소설은 종결된다.

 사실성을 요구하는 소설의 관습으로 본다면 이 작품은 우연으로 점철된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하루 저녁 놀다 간 남사당(현재의 체장수)에게서 옥화를 낳은 할머니, 떠돌이 중으로부터 성기를 낳게 된 옥화, 마침내 엿목판을 메고 유랑의 길에 오르는 성기 등 삼 대에 걸친 역마살의 내력이나, 옥화와 계연의 만남, 옥화가 계연이 그녀의 이복동생임을 알아차리는 계기 등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요한 사건들이 우연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 우연들은 김동리의 소설 속에서는 단순한 우연에 그치지 않고 운명의 지위로 올라선다. 이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의 삶은 자신의 의지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그들의 삶은 이미 운명적으로 주어져 있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단단한 테두리에 둘러싸여 있다.

 이 작품은 '역마살'이라는 무속을 소재로 한국인의 집단 무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체장수 영감과 성기는 역마살이 낀 인물들이다. 주인공인 성기의 역마살은 외할아버지인 체장수 영감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그것으로 인해 성기와 계연의 결혼은 불가능해진다. 이 소설에서 주된 갈등은 역마살을 제거하려는 인간들의 노력과 운명적인 역마살과의 대결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운명을 거역하기보다는 거기에 슬기롭게 순응함으로써 생의 리듬을 얻고 있는 한국적인 인간상 즉 인간은 자신의 운명에 따라 살아갈 때 가장 행복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작가의 인생관이 반영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