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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장용학 단편소설『요한시집』

by 언덕에서 2015. 5. 28.

 

장용학 단편소설 『요한시집』

 

 

장용학(張龍鶴,1921∼1999)의 단편소설로 1955년 [현대문학]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전후 실존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嘔吐)>를 읽고 그 영향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용학은 「요한시집」의 창작 동기에 대해서,  "1953년 봄,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고 실존주의 냄새를 맡고 있던 중,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 수기의 몇몇 장면을 읽은 것이 직접 동기가 되었다." 고 자술한 바 있다.

 단편소설 『요한시집』은 인민군 출신 전쟁 포로 누혜가 철조망에 목을 매고 죽기까지의 생애를 다룬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의 외적 묘사보다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자유의 문제를 의식적으로 묘파해 나가는 서술을 지니고 있다. 즉,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실존적 자각을 그려내고 있다. 바꿔 말하면 사건보다 등장인물의 의식 추구에 치중하는데 제목에 ‘요한’이 들어간 것은 자유의 예언자 요한에 비유하기 위한 것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 옛날 깊고 깊은 산 속에 굴이 하나 있었다. 토끼 한 마리 살고 있는 그곳은 일곱 가지 색으로 꾸며진 꽃 같은 집이었다. 토끼는 그 벽이 흰 대리석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나갈 구멍이라곤 없이 얼마나 깊은지도 모르게 땅 속 깊이에 '쿡' 박혀든 그 속으로 바위들이 어떻게 그리 묘하게 엇갈렸는지 용이 한 줄로 틈이 뚫어져 거기로 흘러든 가느다란 햇살이 마치 프리즘을 통과 한 것처럼 방안에다가 찬란한 스펙트럼의 여울을 쳐 놓았다.

 이 작품의 맨 앞에는 토끼의 우화가 등장한다.

▶토끼의 우화 :

 옛날 깊은 산 속 굴에 토끼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토끼는 바깥 세계를 동경하기 시작하였으나 나갈 구멍을 찾을 수 없었다. 얼마 후 생일날 토끼는 창 쪽으로 발돋움해 그쪽으로 손을 대었다. 그러자 무지갯빛이던 방안이 까맣게 되어 토끼는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며칠 동안 일어나지 못하던 토끼는 그 창을 통해 나갈 수 없을까 하는 위험한 사상을 품게 되었다.

 토끼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면서 창을 통해 바깥으로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토끼는 최초로 바깥 세계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토끼는 태양 광선을 견딜 수 없이 눈이 멀어 쓰러져 버렸다. 토끼는 그 후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영영 잃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 토끼가 죽은 후 그 자리에 버섯이 났고 후예들은 그것을 '자유의 버섯' 이라고 부르며 그것에 제사지냈다.

▶상 :

 나(동호)는 누혜의 어머니가 살고 있는 하꼬방(판잣집)으로 찾아간다. 포로수용소인 섬에서 나는 누혜를 만났고, 잠자릴 나란히 하는 벗이 되었던 것이다. 누혜가 죽은 뒤로 나는 배가 오기만을 기다렸지만, 자유는 오히려 무거움 또 다른 포로수용소의 문에 지나지 않았다. 하꼬방에 지나지 않는 삶을 유지하고 있는 중풍 걸린 누혜의 어머니가 있다.

 노파는 굶어 죽음에 직면한 채 고양이가 잡아다주는 쥐를 먹으며 연명하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섬, 막바지였다. 나는 쥐를 빼앗아 고양이의 면상에 팽개치곤 노파의 가슴으로 엎어진다. 그리고 노파의 손목에 매달려 어린애처럼 어머니를 부른다. 등골이 시려온다. 노파의 식은 피가 내 혈관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이윽고 "누혜!"하고 부른 후 노파는 죽는다. 고양이의 두 눈이 파란 요기를 뿜고 있었는데, 누혜의 눈인 것만 같다.

▶중 :

 누혜는 인민군이었다. 그는 누워 푸른 하늘을 쳐다보기를 좋아했고, 봉황새나 용이 되어 하늘로 날아가고 싶어 했다. 수용소 안에서의 생활은 두 번 째의 전쟁과도 같았다. 인민의 영웅이었던 누혜는 타락한 인민의 적으로 몽둥이질, 발길질을 당했다. 그는 어느 날,  "나의 열매는 익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열매를 감당할 만큼 익지 못했다……. 영원히 익지 못할 것이다! 내게는 날개가 없다……." 고 말한다. 그는 철조망에 목을 매고 자살한다.

▶하 :

 누혜의 유서가 저기서 파란 두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의 유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생을 살리는 오직 하나의 길은 자유가 죽는 데에 있다."

 "자살은 하나의 시도요, 나의 마지막 기대이다. 거기에서도 나를 보지 못한다면 나의 죽음은 소용없는 것이 될 것이고, 그런 소용없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생이라면 나는 차라리 한시바삐 그 전신을 꾀하여야 할 것이 아닌가……."

 어둠 속에서 고양이는 아직도 나를 노리고 있다. 자기를 잡으려는 나의 손을 피해 고양이는 고목나무 가지 위로 올라간다. 나뭇가지에 웅크리고 앉은 고양이의 윤곽이 까만 동화처럼 달 속에 걸려든다.

 밤은 고요히 깊어 가는데, 누혜의 옷을 빌려 입은 나의 그림자는 언제까지나 그 고목 가지 아래서 설레고만 있다. 과연 내일 아침에 해는 동산에 떠오를 것인가.

 

 

 

 

 이 소설의 중심 과제는 '자유'다. 자유는 '참다운 것을 위해 겪어야 하는 또 하나의 구속'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누혜'를 신약성서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에 비유하여 부각시켰다. 즉, 예수의 출현을 위해 죽어야 하는 존재가 요한'이었듯이 자유란 찾아올 그 무엇을 위해 견뎌야 하는 고통이다. 자유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며 목적을 위한 희생이란 뜻이다.

 '토끼의 우화'는 누혜의 유서에 나타난 삶과 밀접히 대응된다. 동굴 속의 삶은 '주어진 대로 사는 삶'이며, 토끼가 어느 날 깨달은 것은 '실존적 자각'이다. 누혜도 서서히 세상의 벽을 깨닫고 그 벽을 뚫기 위해 전쟁에 참여한다. 그는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갇히는데 그곳 역시 이데올로기를 빙자해서 온갖 만행이 자행되며 그의 자유를 구속한다. 그는 외로움과 절망을 느끼고 마지막 탈출을 시도한다. 그것은 자살로 실현된다.

 그러므로 토끼가 바깥세상의 빛에 의해 눈이 멀고 죽음에 이르는 것은 누혜'가 진정한 자유가 없음에 절망을 느끼고 자살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의 실존적 선택이다. 인간은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이념을 준비하고 전쟁을 일으켰으나, 결국 스스로 그 전쟁으로 인해 희생되었을 뿐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실존 그 자체일 뿐, 신이니 자유니 하는 인위적인 것들은 인간을 자유롭게 할 수 없다. 신과 자유는 결국 또 다른 구속이요 벽일 뿐이다. 

 이 작품은 '동호'의 내적 독백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사실인지 환상인지 구별되지도 않는 숱한 생각들이 일관된 스토리를 갖지 않은 채 나열되고 있다. 역사에 대한 비판, 전쟁의 비인간성, 쥐를 먹는 '누혜' 어머니의 처참한 모습, 수용소 생활, '누혜'의 죽음과 관련된 '동호'의 내면 의식이 어지럽게 이어진다. 그러나 그 모든 독백은 결국 '나란 무엇인가?'라는 실존적 물음에 귀착된다.

 만약 '실존'이라는 것이 창조적인 주체가 되어 세상을 새롭게 인식하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고자 하는 꿈이라면, 이 소설은 그러한 꿈을 지향하는 인물의 비극적 체험을 6ㆍ25의 배경 속에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사르트르의 장편소설 「구토」의 영향을 받아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씌어진 소설이다. 누혜는 포로수용소 내의 비인간적 살인에 대해 절망을 느끼고 자살하지만 그의 시체는 '인민의 반역자'라는 낙인 아래 눈알이 뽑히는 비극을 겪는다. 시인이 되고자 했던 그는 노예와 같은 생활 속에서 새로운 자유를 경험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자유도 욕망의 대상이란 점에서 인간 정신에 대한 하나의 구속이므로 극복해야 할 무엇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죽음이란 방법을 선택한다.

 민족상잔과 인간 소외의 문제를 다룬 이 작품은 그 난해성 때문에 당시 문단에서 선뜻 받아들이기를 주저했지만 지금은 작가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소설의 중심 문제는 '진정한 자유는 가능한가?'에 있다. 그러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등장인물('누혜')이 자살을 택한다. 자유를 모색하고 갈구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인간의 고뇌가 6·25전쟁과 포로수용소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사건의 외적 묘사보다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자유의 문제를 의식적으로 묘파하고 있다. 즉, 극한 상황 속에서 인간의 실존적 자각을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