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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최서해 단편소설 『탈출기(脫出記) 』

by 언덕에서 2015. 6. 18.

 

최서해 단편소설 『탈출기(脫出記)』

 

최서해(曙海: 1901~1931)의 단편소설로 1925년 [조선문단]지 3월호에 발표되었다. 작자의 자전적 요소가 강한 소설로서 ‘나’는 왜 가정을 탈출했는가 하는 이유를 김군에게 보내는 서한체로 서술하였다.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 고국을 등지고 간도 땅으로 살 길을 찾아 나섰던 빈농이 차디찬 현실에 꿈이 좌절당하는 과정, 1920년대를 전후한 수난사의 한 단면을 박진력이 있는 필치로 그려, 이 소설로 그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신경향파의 각광을 받았다.

 최서해의 본명은 ‘학송(鶴松)으로,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나 성진보통학교를 중퇴하고 1917년 간도로 이주한다. 이러한 당대의 시대적 상황과 체험을 그는 <탈출기>에서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주인공 ’나‘는 품팔이, 구들장이, 나무장수, 생선장수 등을 전전하면서 삶의 어려움에 부딪힌다. 성실하고 근면하면 살 수 있겠지 하는 믿음조차 거부당한 채, 죽음까지 생각했던 주인공은 근면과 정직이 외면당하는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게 된다.

 이 작품은 본래 1924년 [조선문단] 10월호에 ‘풍년년’이란 필명으로 투고된 감상문 형식의 체험기로서, 이광수의 권유에 따라 소설로 고쳐 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체험이 곧 작품화된 것이다. 작자는 자신의 생활체험에서 얻은 풍부한 소재를 가지고 당시 유행하던 빈궁문학, 즉 신경향파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군림하게 되었고 이 「탈출기」는 그 대표적 작품으로 되었다.

1920년대 만주의 항일 무장독립군 <사진:연합뉴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심한 가난에 시달린 나머지 간도로 떠나온 사람이다. 어머니와 아내를 거느린 한 세대의 가장으로서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 가족을 배불리 먹이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고, 게다가 무지한 농민을 가르쳐 이상촌을 건설하겠다는 꿈도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간도에 도착해 보니 농사를 지으려 해도 빈 땅이 없었고, 중국인 소작인 노릇을 하려 해도 빚 갚을 길이 막연한 현실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떠돌이 날품팔이를 했으나 사흘 굶기가 일쑤였다. 이틀을 굶은 어느 날, 임신한 아내가 거리에서 주운 귤껍질을 먹고 있는 광경을 보고는 더욱 열심히 살 것을 결심한다. 미장이 노릇과 생선 장사도 했고 두부 장사도 했으나 익숙하지 못한 솜씨로 만든 두부는 걸핏하면 쉬기 일쑤여서 그 쉰 두부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갓난아이는 젖 달라고 울고, 겨울이 닥쳐와 두부를 만들기 위해 몰래 나무를 해 오다 들켜 경찰서에 잡혀가 매 맞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경위를 거쳐 ‘나’는 이제까지의 생활을 반성하게 된다. 자신은 이 세상을 성실하게 양심에 따라 살고자 했음에도 세상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대로 있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게 된다는 생각과 함께 집에서 탈출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머니와 아내, 자식을 버리고 XX단에 가담하게 된다.

최서해의 간도 정착지<성동1대> 위치

 

 최서해는 뼈저리게 가난을 겪어야 했다. 1901년 함북 성진에서 출생한 그는 보통학교 2학년 학력이 전부다. 열일곱 살에 간도로 건너간 그는 7년간 유랑생활을 하며 머슴살이, 뱀잡이, 막벌이꾼, 구들장이, 나무장수, 두부장수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한다. 「탈출기」 주인공이 했던 갖가지 일들이 바로 서해 자신의 체험이었다.

 따라서, 이 소설은 최서해의 자전적인 소설이며 서간체 소설이다. 자신의 만주로의 탈출을 변명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20년대 우리 민족의 비참한 삶의 모습을 묘사한 '빈궁문학'의 대표적 작품이다. 다른 사실주의 작품들이 단순히 빈궁한 삶 자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 그러한 빈궁에 항거하는 반항적 주제를 강력히 내세우고 있는 특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주인공이 자신의 빈궁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는 이른바 신경향파 문학의 특징이 잘 나타나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은 자연발생기 프로 문학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가난에 시달리다 견디지 못해 간도로 이농한, 당시 우리 동포의 궁핍하고 처참한 삶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실감 있게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최서해의 출세작이다. 이 작품은 처음에 [조선문단] 투고란에 감상문으로 응모하여 가작으로 당선되었으나, 그 후 소설로 개작한 것이다.  1920년대를 전후한 시기의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사실적으로 표출한 것에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기도 하다. 단순히 생활고를 토로한 생활 문학의 범주를 넘어서서 직접 행동에 뛰어드는 사건 전개에서 프롤레타리아적인 해석을 가능케 한다.

 비록 ‘나’가 사상적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가족을 버려야 하는 논리적 필연성은 미흡하나, 자아에 대한 인식 이전에 가족 공동체가 유지될 수 없음을 감안한다면, 그 나름대로 현실의 논리를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전형적인 신경향파 소설의 결말이 살인이나 방화 등에 의해 처리되는 데 비한다면, ‘××단에 가입’하는 것, 즉 조직적인 사회운동에 뛰어드는 것으로 끝나는 점으로 보아, 좀더 현실적인 작가 의식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최서해의 현실적 의식은 당시 신경향파의 이론적인, 혹은 이념적인 주제 의식과는 달리 작가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가능했다.

 이 작품은 결함도 내포하고 있지만, 간도에서의 혹독한 체험이 정제되거나 여과되지 않은 채 독자의 가슴에 직접 와 부딪히는 감동을 느끼게 한다. 사실과 허구의 양면을 갖춘 것이 소설이고, 그 중에서도 허구성이 많이 강조된다고 하지만, 체험의 밀도가 높은 작품을 만날 때 허구는 사실성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 최서해(1901 ~ 1931) 소설가, 함북 성진 출생.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빈궁소설을 주로 썼다. 본명은 학송(鶴松). 일명 서해(曙海)·설봉(雪峰)·풍년년(豊年年). 이명은 저곡(苧谷).극도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 1911년 성진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가난으로 5학년 때 중퇴하고, 1917년 간도로 이주해 방랑하며 하층민의 생활을 했다. 1918년 3월 〈학지광〉에 시 〈우후정원(雨後庭園)의 월광(月光)〉·〈추교(秋郊)의 모색〉·〈반도청년에게〉를 발표하여 창작활동을 시작했고, 이어 시 〈춘교(春郊)에서〉·〈자신 自信〉 등을 발표했다. 1924년 1월 28일부터 2월 4일까지 〈동아일보〉에 〈토혈 吐血〉을 연재해 소설가로서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으며, 같은 해 10월 단편 〈고국〉이 〈조선문단〉의 추천을 받아 정식으로 문단에 나왔다. 1925년 2월 〈조선문단〉에 입사하여 이 잡지에 간도 체험을 생생하게 그린 〈십삼원 拾參圓〉(1925. 2)·〈탈출기〉(1925. 3)·〈살려는 사람들〉(1925. 4) 등을 발표했다.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담해 1929년까지 활동했으며, 1926년 KAPF 맹원이자 시인인 조운의 누이 조분려와 재혼했다. 〈현대평론〉·〈중외일보〉 기자를 거쳐 〈매일신보〉 학예부장으로 일하다가 31세의 나이로 죽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