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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典을 읽다

임진왜란 야사 『징비록(懲毖錄)』

by 언덕에서 2015. 3. 5.

 

임진왜란 야사 『징비록(懲毖錄) 

 

조선 선조(宣祖)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쓴 임진왜란 야사(野史)로 활자본. 16권 7책으로 구성된다. 이 책은 현재 4종이 전하는데 저자 자신의 필사원본인 <초본징비록>(국보 132)과 16권으로 된 <징비록>, 2권으로 된 간본(刊本), 필사본이 있다. 1592(선조 25)~98년까지 7년에 걸쳤던 임진왜란의 원인ㆍ전황 등을 기록한 책으로, 전란이 끝난 뒤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로울 때 저술한 것이다. ‘징비’란 <시경(詩經)>의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役患)’는 구절에서 딴 것이다.

 계사년 10월, 거가가 환도하니 불타고 남은 것들만이 성안에 가득하고, 거기에 더해 전염병과 기근으로 죽은 자들이 길에 겹쳐 있으며, 동대문 밖에 쌓인 시체는 성의 높이에 맞먹을 정도였다. 그 냄새가 너무 더러워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 잡아먹어, 죽은 시신이 보이면 순식간에 가르고 베어 피와 살이 낭자했다.

- ‘유성룡 종군의 기록’ 중에서

『징비록』은 서책으로는 드물게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우리 역사에 드물게 보존되어 온 기록문학이다. 그 내용은 임진왜란 이전의 국내외적 정세로부터 임진왜란의 실상, 그리고 전쟁 이후의 상황에 이르기까지를 체계적이며 종합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나와 같이 보잘것없는 자가 흩어지고 무너져 내린 때를 맞아 나라를 지키는 무거운 임무를 맡아 위기를 극복하지도 못하고 쓰러지는 나라를 지키지도 못했으니, 그 죄는 죽음으로도 씻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산골 전답 사이에서 쉬며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고 있으니 이 어찌 두려움을 씻어 주시는 임금의 은혜가 아니겠는가. 그때 일을 생각할 때마다 두렵고 부끄러워 몸을 지탱할 수조차 없다.

- '유성룡'의 서문 중에서 

 1592년 왜군은 조선을 침략, 파죽지세로 조선 땅을 약탈했다. 그러나 하늘을 찌를 듯하던 왜군의 기세는 평양성에서 멈췄고, 명나라 군대의 개입과 의병의 활약 그리고 이순신 등 뛰어난 장수들의 노력으로 왜군은 후퇴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에도 1597년 정유재란으로 침략은 재발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전쟁의 끝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졌다.

 전쟁 당사자인 조선과 일본 그리고 참전국인 명나라, 명나라와 경쟁하던 청나라 등의 전쟁 관련국들에게도 임진왜란이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다만 전쟁의 직접 피해자인 조선 정권은 붕괴하지 않았다. 이러한 내용이 『징비록』에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서애 유성룡1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 포화의 한가운데서 전쟁의 참화를 실제로 겪은 고위 관리였으며, 특히 전쟁 수행 책임자 가운데 최고위직에 있던 인물이다. 따라서 그의 증언은 임진왜란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유성룡이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 ‘징비懲毖’란 《시경》 ‘소비小毖’ 편에 나오는 문장, ‘予其懲而毖後患(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로부터 유래한다. 즉 자신이 겪은 환란을 교훈으로 삼아 후일 닥쳐올지도 모를 우환을 경계토록 하기 위해 쓴 글이다. 이러한 집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유성룡은 자신의 잘못부터 조정 내의 분란, 나아가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 등 임진왜란을 둘러싸고 발생한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 전쟁 전 조선ㆍ일본 두 나라의 관계

 조선은 일본과 2백 년 동안 국교를 계속해왔다. 선조 19년에 일본의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를 가지고 조선에 왔는데 인동 고을을 지나다가 창 잡은 사람을 흘겨보고 조소하며 "너희들 가진 창의 자루가 몹시 짧구나"라고 했다. 서울에서는 예조판서가 잔치를 준비해 대접했는데, 다치바나가 자리 위에 후추를 흩어놓으니, 기생과 악공이 서로 다투어 줍느라 좌석의 질서가 없어졌다. 다치바나가 숙소에 돌아와 탄식하며 통역관에게 "조선은 망하겠다. 기강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이것은 전쟁 전에 조선의 군비가 소홀하고, 나라의 질서가 문란함을 적국의 사신이 이미 탐지하고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2. 관군의 붕괴와 민중의 분기

 선조 25년 4월 13일에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니 첨사 정발과 동래부사 송상현은 임무를 지켜 목숨을 버렸다. 그러나 그 나머지 수신ㆍ진장들은 모두 소문만 듣고서 도주했으니, 관군은 총 붕괴의 상태에 이르렀다. 전란이 일어나자 민심은 극도로 동요해 서울에서는 장례원과 형조 등의 관아와 모든 궁궐을 불살라버렸고, 지방에서는 곳곳에 난민이 일어나 창곡을 약탈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민중은 침략자인 적군에게는 굴복하지 않았으니, 그들은 지방의 세가ㆍ대족들과 합세하고, 사족과 유생을 지도자로 삼아 이른바 '의병'이란 이름의 의용군을 형성하고, 이들이 조국 방위의 선두에 나선 것이다.

 3. 수군의 승전과 한산도해전의 의의

 유성룡은 임진왜란을 일본이 조선만을 침략한 양국 사이의 전쟁으로 보지 않고, 중국까지 침략하려는 동아 전국의 전쟁으로 파악하여 조선과 중국이 합세하여 공동의 적군을 격퇴시킨 방위전쟁적 성격으로 규정한다. 곧 이러한 관점에서 적군의 침범을 받은 즉시 중국에 사실을 보고하고 구원군을 보내주기를 요청했으며, 구원군이 오기 전에 자체의 힘으로 대항 방위했다.

 4. 전선의 교착과 강화 문제

 1592년 12월에 명나라에서 많은 군대를 동원하고 제독 이여송 이하의 여러 장수들이 압록강을 건너서 안주에 도착했다. 명나라와의 군사ㆍ외교 사무를 전담한 유성룡은 안주에서 이여송을 만나보고 평양 지도를 건네주면서 작전 계획을 협의했다. 이듬해 계사년 정월에 명나라 군대의 힘으로 평양은 즉시 수복되었으나, 서울로 남하하는 작전은 벽제관의 패전으로 중도에서 좌절되었고,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자 명나라와 일본 두 나라는 강화 교섭을 추진했다.

 5. 강화 교섭의 실패와 정유재란

 조선 측이 강력하게 반대하는데도 명나라와 일본 두 나라가 추진하던 강화 교섭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대개 일본의 관백 도요토미의 요구가 매우 커서 봉공뿐만이 아닌데, 명나라의 세객 심유경과 일본의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로 친숙하여 일을 임시변통으로 성사시키려는 실정으로, 명나라와 조선에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오랜 시일에 걸쳐 추진하던 강화 교섭은 결국 실패해 일본은 재차 조선을 침범했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조선은 즉시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 사실을 알리니 강화 교섭을 추진하던 명나라의 병부상서 석성과 세객 심유경은 죄를 얻어 하옥되고, 명나라의 군대가 다시 조선에 오게 되었다.

 6. 적군의 철퇴와 수군의 최후 공격

 선조 31년, 7월에 왜적의 관백 도요토미가 사망하자 조선에 있던 적장들은 모두 철수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이때 통제사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유정과 도독 진린과 합세해, 순천에 있던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를 수륙 양면에서 협공하기로 약속했다. 11월 I9일 조선 수군이 철귀하는 왜적을 격멸하는 최후의 결전이 전개되었다. 이순신은 명나라 제독 유정을 달래어, 유정은 순천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공격하고,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해구를 지키고 적을 핍박하니 고니시는 사천에 주둔한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수로로 와서 구원하므로, 이순신은 이를 공격하여 크게 부수고 적선 200여 척을 불사르고 수없이 많은 적병을 죽였다. 이순신은 적군을 남해의 노량진까지 추격하여 몸소 독전하다가 날아오는 탄환을 가슴에 맞았다. 그는 조카 이완에게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절대로 내지 마라"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이완은 이순신의 명령으로 독전하여 적군에게 포위된 진린을 구원했고, 적병은 흩어져 달아났다. 이로써 7년 동안의 임진왜란은 멸적 구국한 이순신의 운명과 함께 종말을 맺었다.

 

 

 

 

 

 

 『징비록』은 영의정, 도체찰사 등 나라의 운명을 책임진 자리에서 임진왜란을 겪은 유성룡이 지난날을 반성하고 앞날을 대비하기 위해 후손에게 남긴 고통의 기록이다. 임진왜란에 관련한 기록으로는 국내의 『선조실록』과 『난중일기』를 비롯해 각종 『용사일기』가 있고, 중국과 일본에도 몇 가지 기록이 있으나, 『징비록』처럼 임진란을 대국적으로 관찰하고 종합적으로 기술해 뒷세상에 전해준 중요한 문헌은 없다. 또 유성룡은 당시 정국의 최고 책임자였으므로, 그의 이야기는 다른 누구의 기록보다도 신빙성이 높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국방·군사·정치·외교·민사 등 모든 분야에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 대신 유성룡이 쓴 임진왜란 기록이다. 이 책은 조선에서 간행된 이후 일본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해 새로이 간행했고, 중국 역시 임진왜란 전사의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일찍이 영어판까지 나온 국제적으로 공인된 역사 기록이다.

 책 이름에서 “징비”라는 말은 《시경》〈소비편小毖篇〉에 나오는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유성룡이 쓴 서문 가운데 “지난날을 생각할 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 둘 곳을 모르겠다”라는 문장과 맥이 닿는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성룡이 후대에 남긴 글이다.

 위정자들의 무책임하고 안이한 대처로 수많은 백성들이 어떻게 고통을 받았는지, 그리고 나라의 운명이 상국이자 대국인 명나라에 맡겨진 사이에 나라의 체모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절절히 이야기한다. 당시 조선은 군사작전권마저 명나라에 사실상 넘긴 상황에서 침략자를 마음 놓고 응징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는 한강을 기점으로 조선을 분할통치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구원병을 보낸 또다른 전쟁 당사자인 명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조선을 완전히 식민통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백성은 “차마 제 자식을 잡아먹지 못해, 서로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누구보다 전쟁의 참상을 절감한 유성룡은 전쟁을 막지 못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자신의 힘으로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크게 절망했다. 정유재란 이후 완전히 조정에서 물러난 유성룡은 고향인 경상도 의성에 들어앉은 채 지난 7년 전쟁의 기록과 기억을 정리해 생생하게 되살린다. 정직한 태도로 조선 조정의 분란과 무능을 기록했고,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싸운 이순신과 의병의 활약에 온당한 존경을 보냈다. 또한 굴욕적인 외교의 실상을 고백하고, 백성의 고통에 같이 아파했다.

 임진년에 시작돼 7년간 이어진 전쟁의 실상은 이렇게 유성룡의 손을 통해 다큐멘터리 겸 르포르타주 『징비록』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성룡의 수고는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병자호란이라는 굴욕을 통해 조선은 다시 한 번 짓밟힌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로부터 불과 100여 년 전 일어난 한일강제병합이라는 사건을 통해 또다시 반복된다.

 유성룡은 전란의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의 중추기관에 참여해 난국을 처리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정국에서 물러나 지난날 성패의 자취를 세밀히 고찰, 반성하여 국가의 큰 계책을 강조했으니, 그의 애국자다운 모습이 이 책에 생생하게 나타난다. 특히 그의 유창한 필치와 탁월한 견식으로 전후 7년 동안의 조선ㆍ중국ㆍ일본 세 나라의 외교관계와 전쟁의 추이를 명쾌하고 간결하게 기술하여, 우리에게는 다시금 지나간 일을 징계하여 뒷일을 조심해야 한다는 결의를 더 한층 환기시킨다. 『징비록』은 중요한 사료인 동시에 전쟁 문학의 가치도 지니고 있어, 『난중일기』와 더불어 임진왜란 관련 문적으로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1. 유성룡은 1542년, 즉 중종 37년에 경상도 의성 지방에서 황해도 관찰사 유중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 때 향시에 급제한 그는 21살 되던 해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25세 되던 1566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임진왜란 발발시 좌의정으로 병조판서를 겸하고 있던 그는 다시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군무를 총괄하였다. 선조가 난을 피해 길을 떠나자 호종扈從하였으며, 개성에 이르러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했다. 서울 수복 후,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선조가 서울로 돌아오자 훈련도감을 설치, 제조에 올라 군비를 강화하고 인재를 배양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 이듬해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조용히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그 후 복관되어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일체 응하지 않았으며, 1607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