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마음
지금 기억을 되살려보니 그 해가 2007년이었다. 공무원인 아내가 기관 내에서 표창(表彰) 받은 관계로 그 포상(褒賞)으로 배우자로서 단체여행에 동반하게 되었다. 나는 단체여행이라는 단어에 항상 시큰둥한 편이지만 여행지가 백령도라는 말을 듣고 가겠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제주도, 울릉도 가봤다는 사람은 많았어도 백령도 여행 경험이 있는 이는 그다지 자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청에 납품하는 모여행사의 여행 상품은 부산에서 인천까지 관광버스로 이동하여 인천터미널에서 배를 타고 백령도에 도착해서 1박 2일 한 후 저녁에 배를 타고 인천으로 돌아와 경기도 이천에서 또 1박한 후 도자기 축제를 구경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그런 일정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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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3일 오전 9시 인천에서 백령도로 향하는 '데모크라시(democracy)'호라는 아주 민주적인 이름을 가진 유람선을 탔다. 배가 백령도에 도착해서 선착장에 내리면 사곶 천연비행장이라는 모래 사장이 보이는데 그곳에서 관광버스 운전사 겸 가이드가 반겼다. '백령도 1박 2일'의 코스라고 소개하고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이라 칭하며 “이 섬은 군사적 요지인데 섬의 오야붕은 해병대 준장”이라고 하며 너스레를 떠는데 다 믿지는 않더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외딴 섬에서의 새로운 경험을 기대했다.
1박2일 동안의 스케줄에는 건너편 황해도 황주에서 심청이가 빠져 죽은 것을 기념하는 심청각 구경이나 해금강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기암절경 두문진을 해상 관람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섬 내의 관광지 중 섬 북서쪽의 두무진은 고려시대의 충신 이대기가 쓴 '백령지'에서 '늙은 신의 마지막 작품'이라 표현했을 만큼 기묘한 절경을 자랑했다. 그러다가 정오 무렵에 갑자기 가이드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해무(海霧)가 심해서 인천에서 들어와서 우리를 싣고 나가야할 배의 입항이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것이다. 멍한 기분으로 여관에서 점심을 먹고 이른바 자유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남는 시간을 어떻게 해보려고 여관을 나와서 백령도 시내 구경을 하기 위하여 돌아다녔는데 15분 만에 끝났다. 조그마한 섬의 면사무소 소재지를 아무리 돌아 다녀도 15분이 넘지 않았던 것이다. 인터넷 신문이나 볼까 하여 PC방을 찾았지만 그런 시설은 아예 보이질 않았다.
백령도의 중심지에는 해병대 군인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술집 십수 군데, 여관 예닐곱 군데, 식당 열 개 정도……. 다방 네 개 정도……. 약국 한 개……. 이것이 섬의 주요 인프라였던 것이다.
여관에서 소일거리를 찾던 일행들은 다들 망연자실해 했다. 시간 보낼 장소가 전혀 없어서인데 하다못해 영화관이라도 있으면 시간을 보낼 텐데 하는 사람도 있었다. 등산을 하려고 해도 군사요충지인 관계로 지뢰가 매설된 곳이 많기 때문에 되도록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해서 일행의 절반은 여관방에서 고스톱을, 나머지 절반은 낚시점에서 낚시도구를 빌려 낚시를 하러 갔다. 고스톱도 낚시도 할 줄 모르는 나는 매우 곤혹스러웠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저녁을 맞이했는데 그때는 다들 ‘배가 내일은 과연 뜰까?’하는 생각에 다음날이 더 걱정인 모습이었다.
다음날 아침, 일단 배가 뜬다고 생각하고 아침 일찍 짐을 꾸렸다. 게다가 어제 밤에 일행 중의 누군가가 백령도에서의 마지막 밤인데 그냥 보낼 수 있나 어쩌고 하는 술판을 만드는 바람에 그 여파로 속이 쓰리기 짝이 없었다.
오전 11시경이 되자 가이드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안개가 심해서 인천에서부터 배가 들어오지 못하고 출발대기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내일은 어떻게 될는지 기다려보자고 했다. 또 하루가 연기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흘이 더 지나갔다.
무엇 하나 소일거리가 없는 무료함 때문에 마치 고문을 받는 느낌을 주는 답답한 날들이었다. 면사무소 옆 M모텔에서 선착장까지 약 5KM의 거리를 그냥 걸어서 왔다갔다 이유 없는 왕복을 하는가 하면 사자바위 옆 해변에서 조개를 줍는 등 하루 종일을 지루하고 답답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백령도의 날씨가 매우 맑고 쾌청한데 인천에 안개가 짙어 배가 움직일 수 없다니 모두들 분통이 터지는 듯한 표정이었다. 선박회사의 이야기로는 자기네들은 배를 움직이고 싶어도 해군측이 호위를 해주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방법이 없다고 했다. 여관주인 말에 의하면 백령도에 1박2일 코스로 들어와서 안개 때문에 배가 움직이질 못해서 1주일가량 체류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했다.
일행 중에 우리 부부보다 너덧 살은 연배로 보이는 부부가 있었다. 그 부부의 남편 역시 나처럼 공무원의 남편 자격으로 온 고등학교 교사인 A씨였다. 당시 그 여행에 참가한 대부분의 공무원들이 남편이고 아내는 부부 여행의 배우자의 자격으로 온 경우인데, A씨와 나만 공무원의 남편으로서 온 터였다. 한 직장에 20년 넘게 함께 근무해온 공무원들은 모두들 면식이 있는 사이여서 다들 직급보다는 ‘형님, 동생’으로 통했고 그들은 남고 넘치는 낮 시간을 고스톱으로, 밤 시간은 음주가무로 뭉쳐지고 있었다. 그러한 분위기에 쉽게 휩싸이지 못한 A선생과 나는 언제나 별 할 일 없이 붙어 다니던 어느 날 오후였다.
선착장 인근을 산보하고 있는데 더블백1을 짊어진 해병대 병사 둘의 모습이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한 명은 작대기가 두 개인 일병이었고 또 한 명은 작대기가 하나인 이병이었다. A씨는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이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야, 너그 여기 오봐라(야, 너희들 여기로 오너라)!”
놀란 군인들은 가던 걸음을 멈췄다.
이윽고 A선생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지폐를 꺼내어 둘에게 한 명당 삼만 원씩 지폐를 손에 쥐어주었다.
두 병사는 당황한 모습이었으나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의 눈물에 이내 평정을 되찾고 선임병사인 일병이 A선생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왜 이러십니까?”
“내가 너그들을 보니 일주일 전에 군대 간 우리 아들이 생각나서 눈물이 나서 그런다……. 마, 받아라!”
A선생은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해병 용사들의 자존심도 만만치 않았다.
“괜찮습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장면을 지켜보던 내가 인상을 지으며 한 마디 했다.
“얘들아, 아버지가 주신다고 생각하고 받아라! 이제는 우리가 니들의 아버지들이다.”
내가 내뱉은 말이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멋진 표현이었다. 나도 어쩌다 멋진 표현을 쓴다는 것을 그날 알았다. 두 명은 내 말이 끝나자말자 왼손에는 지폐를 쥐고 A선생과 나를 향해 “필승!”이라는 구호와 함께 경례를 붙이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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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1박2일의 일정을 넘기고 5박6일의 일정으로 바뀐 뒤에야 해무(海霧)가 사라져 백령도를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감옥살이를 하는 듯한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이었고 내 집과 내 시간의 중요성을 알게 된 시간들이기도 했다. 아무리 경치가 좋은 곳이고 일이 없는 곳이라고 해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가 없으면 인간존재 자체는 무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소중한 경험은 A선생이 해병대 병사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우리 아들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나는 향후 내 아들이 입대한 후 내가 받을 슬픔을 미리 맛보고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3년 후, 스무살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아들아이는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내 품을 떠났다. 아들이 논산으로 떠나던 그날 저녁 나는 소주잔을 붙잡고 우주처럼 끝없는 슬픔 속에 쏟아지는 눈물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 즈음의 어느 날 저녁, 시내 중심지의 식당가 앞에서 휴가 나온 육군 일병 두 명 앞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며 그들에게 만 원짜리 지폐 여러 장을 건네주고 있었고 이를 마다하는 둘에게 내 친구는 ‘아버지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받아라’며 야단치고 있었다.
- double bag. 군인들이 사용하는 개인용 가방의 하나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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