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작소설)옛날의 금잔디

고향

by 언덕에서 2015. 2. 17.

 

 

 

 

 

 고향

 

 

 

 

 

 

 

 

 

 

 

 

 

 

나는 자리에 드러누웠다. 배 밑바닥에 부딪히는 잔잔한 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깊이 생각했다.

 나는 지금 나의 길을 가고 있다. 그렇다. 생각해 보면 그와 나는, 각자가 이미 다른 길을 걸은 지 오래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의 마음은 아직 하나로 이어져 있다.

 성인이 된 그와 내가 겪어야 했던 단절을, 어린 이 아이들이 미래에 또다시 겪지 않기를 바란다. 서로의 단절된 마음 때문에 지금의 나처럼 이곳 저곳 괴롭게 떠도는 생활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지금의 아이들이 그처럼 경제적으로 괴롭고 힘든 생활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처럼 괴로워하면서 삶을 포기하는 지경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아이들은 마땅히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아직 경험해 본 일이 없는 그런 삶 말이다!

 '희망'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가 향로와 촛대를 달라고 했을 때, 나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그가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는, 그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진 희망 역시 내가 만든 또 하나의 우상은 아닐까?

 그의 희망이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반면, 나의 희망은 더 막연하고 아득하게 멀다는 차이뿐이다.

 파란 바닷가와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을, 나는 떠올려 보았다. 짙은 쪽빛 하늘엔 동그란 황금빛 보름달이 걸려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에 난 길'이나 마찬가지다. 땅에는 원래 길이 없는 법이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魯迅 : 1881.9.25∼1936.10.19)의 단편소설 '고향' 중에서

 

 


 "희망이란 것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땅에 난 길'이나 마찬가지다. 땅에는 원래 길이 없는 법이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얼마 전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미생’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 인용됐던 말이다. 미생이란 ‘완전히 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완벽하게 안전하지 않은 돌’이라는 뜻의 바둑 용어다. 이를 좀 더 넓게 해석하면 이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완전하게 살지는 못하는 존재들이라는 의미다. 드라마에서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는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했던 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모든 완생을 ‘희망’하는 모든 미생에게 남기는 말이었다. 루쉰은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에게 희망을 품게 했다.  그가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로 평가받는 이유는 민족의 고뇌를 몸소 체험하고 중국민족을 각성하고자 실천한 열망 때문이었다. 진정한 문학이란 정치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되며 작품 속에 진실이 살아 숨 쉬어야 하는데, 이러한 진실이 인간을 바꾸고, 희망을 주므로 독자들에게 삶을 긍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 근대화 속에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중국민족을 문학을 통해 치료하고자 한 루쉰. 그의 작품 대부분은 봉건적 습속이 혼재된 반식민지 상태라는 어두운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변혁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에서 쓴 것이었다.

 낼모레가 설날이다. 귀성열차표는 벌써부터 동이 났다고 한다. 새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곳에 모이는 것처럼 설날 기차역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수많은 귀성객으로 붐빈다.

 우리는 왜 설 귀향(歸鄕)이라고 하지 않고 설 귀성(歸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을까? 귀향은 단순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귀성은 부모님을 뵙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감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도시의 물결 속에 빠져 살고 있지만 부모님에 대한 사랑, 고향에 대한 향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도로에 허비하는 교통체증을 감내하면서도 느긋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고향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들의 고통이야 오죽하겠는가. 특히 고향을 등진 것도 서러운데 갈 수 없는 실향민이나 다문화가족들의 슬픔을 무엇으로 달랠 수 없을 것이다.

 '희망이란 것은 있다가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묵묵하게 제 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이 문장이 주는 위안보다 더 큰 선물은 없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이런게 명절이 주는 살가운 선물일 것이다.

 

 

 

'(연작소설)옛날의 금잔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버지 마음  (0) 2015.03.06
귀신이 있다?  (0) 2015.02.27
여행에서 만난 60대 부부 이야기  (0) 2015.02.13
안녕, 안녕  (0) 2015.01.23
어떤 투사(鬪士)   (0) 2015.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