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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류근 시집 『상처적 체질』

by 언덕에서 2015. 4. 1.

 

 

 

류근 시집『상처적 체질』 

 

 

 

 

주말마다 KBS- 1 TV의 '역사 저널 그날'이라는 프로에서 류근1(1967 ~ )시인이라는 이를 만난다. 그의 직설적이고 명쾌한 화법에 심히 공감하던 중 그의 시집을 뒤져보게 되었다.

 

 

 

 

 1992년 모 신문사의 신춘문예로 등단하였으나, 이후 한 편의 작품도 발표하지 않았던 그의 첫 시집을 읽는 일은 인간 삶의 슬픔과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쓸쓸한 영혼들의 상처는 타자에 의해 가감될 수 없는 고유한 것이므로 철저히 단독자의 형식이지만, 체질이 비슷한 우리는, 타인의 상처에서 나의 상처를 보게 된다. 우리는 그의 노래를 이미 들은 바 있다. 고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노랫말은 원래 그가 쓴 시였다.

 

 

 

 

 

 그의 시 세계는 낭만적 경향으로 흐르게 하는, 충만보다는 상실과 결락, 별리로 가득 찬 기억의 성질과 그에 따른 애수와 그리움을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공동의 통속미로 심화하는 운문을 읽는 시정(詩情)을 만끽할 수 있게 만든다.

 이 시집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회한이 짙게 잦아든 기억의 문법이다. 이것은 시인의 사랑의 추억과 그리움의 밀도를 제대로 측정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류근의 시는 통속의 재현이 아니라 통속미의 표현이며, 절망과 패배의 서글픈 유희가 아니라 희망과 사랑의 절실한 되찾음에 가깝다.

 

 

 

 

 

 

 

어떤 흐린 가을비


 

이제 내 슬픔은 삼류다

흐린 비 온다

자주 먼 별을 찾아 떠돌던

내 노래 세상에 없다

한때 잘못 든 길이 있었을 뿐

 

붉은 간판 아래로

총천연색 씨네마 스코프 같은 추억이

지나간다 이마를 가린 나무들

몸매를 다 드러내며 젖고

늙은 여인은 술병을 내려놓는다

 

바라보는 순간

비로소 슬픔의 자세를 보여주는

나무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고개를 숙이고 술을 마신다

모든 슬픔은 함부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

삼류가 된다

 

가을이 너무 긴 나라

여기선 꽃피는 일조차 고단하고

저물어 눕고 싶을 땐 꼭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잎사귀를 허물면서 나는

오래전에 죽은 별자리들의 안부를 생각한다

 

흐린 비 온다

젖은 불빛들이 길을 나선다

아무도 듣지 않는 내 노래 술집 쪽으로 가고

추억 쪽에서만 비로소 따뜻해지는

내 슬픈 잎사귀 또 비에 젖는다

 


 

 

 

 

 

 

 

 

너무 아픈 사랑

 

동백장 모텔에서 나와 뼈다귀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에 낀 기름때 경건히 닦고 있는 내게

여자가 결심한 듯 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라는 말 알아요? 그 유행가 가사

이제 믿기로 했어요

 

믿는 자에게 기쁨이 있고 천국이 있을 테지만

여자여, 너무 아픈 사랑도 세상에는 없고

사랑이 아닌 사랑도 세상에는 없는 것

다만 사랑만이 제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이어서

사랑에 어찌 앞뒤로 집을 지을 세간이 있겠느냐

 

택시비 받아 집에 오면서

결별의 은유로 유행가 가사나 단속 스티커처럼 붙여오면서

차창에 기대 나는 느릿느릿 혼자 중얼거렸다

그 유행가 가사,

먼 전생에 내가 쓴 유서였다는 걸 너는 모른다

 


 

 

 

 

 

 

 

 

 

가족의 힘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등켜 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을 봐 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이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 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 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 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

 


 

 

 

 

 

 

 

 

상처적 체질

 

나는 빈 들녘에 피어오르는 저녁연기

갈 길 가로막는 노을 따위에

흔히 다친다

내가 기억하는 노래

나를 불러 세우던 몇 번의 가을

한 세월 가파른 사랑 때문에 거듭 다치고

나를 버리고 간 강물들과

자라서는 한번 빠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던

서편 바다의 별빛들 때문에 깊이 다친다

상처는 내가 바라보는 세월

 

안팎에서 수많은 봄날을 이룩하지만 봄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꽃들이 세상에 왔다 가듯

내게도 부를 수 없는 상처의

이름은 늘 있다

저물고 저무는 하늘 근처에

보람 없이 왔다 가는 저녁놀처럼

 

내가 간직한 상처의 열망, 상처의 거듭된

폐허

그런 것들에 내 일찍이

이름을 붙여 주진 못하였다

 

그러나 나는 또 이름 없이

다친다

상처는 나의 체질

어떤 달콤한 절망으로도

나를 아주 쓰러뜨리지는 못하였으므로

 

내 저무는 상처의 꽃밭 위에 거듭 내리는

오, 저 찬란한 채찍

 


 

 

 

 

 

 

벌레처럼 울다

 

벌레들은 죽어서도 썩지 않는다

우는 것으로 생애를 다 살아버리는 벌레들은

몸 안의 모든 강들을 데려다 운다

그 강물 다 마르고 나면 비로소

썩어도 썩을 것 없는 바람과 몸을 바꾼다

 

나는 썩지 않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서 남김없이 썩기 위해 슬퍼하는 것이다

 

풍금을 만나면 노래처럼 울고

꽃나무를 만나면 봄날처럼 울고

사랑을 만나면 젊은 오르페우스처럼

죽음까지 흘러가 우는 것이다

울어서 생애의 모든 강물을 비우는 것이다

 

벌레처럼 울자 벌레처럼

울어서 마침내 화석이 되는 슬픔으로

물에 잠긴 한세상을 다 건너자

 

더듬이 하나로 등불을 달고

어두워지는 강가에 선 내 등뼈에 흰 날개 돋는다

 

 

 

 

 

 

  1.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충북 청주에서 자랐으며,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2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으나 이후 공식적인 작품 발표는 하지 않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