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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이병률 시집 『눈사람 여관』

by 언덕에서 2015. 3. 11.

 

 

 

이병률 시집 『눈사람 여관

 

 

 

 

 

 

 

바닥없는 ‘슬픔’과 깊고 조용한 ‘응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생의 안팎에 새겨져 있는 특유의 ‘절박함’으로 표현될 수 있는 시들이 있다.

 온전히 혼자가 되는 일은 자신을 확인하고 동시에 타인을 발견하게 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시집에는 그러한 내용의 시들이 즐비하다. 타인에게서 오는 감정이란 지독한 그리움이고 슬픔이지만, 슬픔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그 일이 곧 사람의 마음을 키우는 내면의 힘이 된다. 그러니까 이 시인의 슬픔은, 힘이다는 결론이 된다.

 불가능성 앞에서 그는 슬픔을 느끼지만, 그것을 쥐고, 그 힘으로 서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그가 잠시 머무르는 곳 ‘눈사람 여관’은 모두가 객체가 되는 공간이자 타인의 삶을 온몸으로 겪게 되는 슬픔의 처소이며 스스로 “세상의 나머지”가 되는 그곳이다.

 

 

 

 

 

애별(愛別)

 

어떻게 된 일이길래 마을 이름이 애별인가

태어났으니 감옥이란 말인가

한 번 안아봤으니 이별 또한 받아들이자는 것인가

저기 저 내리는 눈발의 반은 사랑이고 또 절반은 이별이란 말인가

어제는 미안해서 오늘은 이별을 하지는 말인가

아름다웠던 날들의 힘으로 달은 뜬다는 말일까

마음을 주면 표정의 한쪽이 파인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 사람 등 뒤에

영원히 앉아 있으란 말인가

한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저릿저릿할 때는 사람의 눈발을 외면하자는

말일까

세상 모든 것이 거짓이 아니기를 바란단 말인가

 

 

 

*애별: 홋카이도의 어느 시골 마을 이름.

 

 


 

 

 

 

 

 

눈사람 여관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그러면 날마다 아침이에요

 

밥은 더러운 것인가

맛있는 것인가 생각이 흔들릴 때마다

숙박을 가요

 

내게 파고든 수북한 말 하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서

 

모든 계약들을 들여놓고

여관에서 만나요

 

탑을 돌고 싶을 때도 그만두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도

 

내가 껴안지 않으면 당신은 사라지지요

길 건너편 숲조차도 사라지지요

 

등 맞대고 그물을 당기면서

다정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면

그게 어디 여관이겠어요

 

내 당신이 그런 것처럼

모든 세상의 애인은 눈사람

 

여관 앞에서

목격이라는 말이 서운하게 느껴지는 건 그런 거지요

 

눈사람을 데리고 여관에 가요

거짓을 생략하고

이별의 실패를 보러

 

나흘이면 되겠네요

영원을 압축하기에는

저 연한 달이 독신을 그만두기에는

 

 


 

 


 

 

 

 

아무한테도 아무한테도

 

1

 그 땅에는 뽑아내고 뽑아내도 자꾸만

 그 나무가 자란다고 했다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땅에

 유독 그 자리에 그 나무만 자라난다고 했다

 

 2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는 소릴 들었다

 

 사랑한다면서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다

 사랑한다는 감정의 판지를 덮고도 이토록 추운 것은

 혓바닥으로 죽은 강물을 들이켜

 한꺼번에 휘파람 불 수 없다는 증거

 

 한 덩어리의 바람이 지나고

 한 시대를 에워 가릴 것처럼 닥치는 눈발까지도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라는 소리로만 들렸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는 말만 거셌다

 

 돌에서 물이 흐르고

 그 물이 굳어 돌이 되고

 

 그 돌에 틈바구니 생기도록

 사무치고 사무쳐도

 

 나 또한

 아무한테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자는 소리만 되뇌었다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샀는지 얻었는지

남루한 사내가 들고 있던 도시락을

공원의자 한쪽에 무심히 내려놓고는

가까이 있는 휴지통을 뒤져 신문지를 꺼낸다

신문지를 펴놓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도시락을 엎더니

음식 쏟은 신문지를 잘 접어 보퉁이에 챙기며 저녁 하늘을 올려다 본다

행복을 바라지 않겠다는 것인가

빨래를 개고 있는지

옷감을 만지고 있는지

그녀는 옷을 쥐고 재봉틀 앞에 앉아 있다

눈이 내리는 창밖을 보는 것 같았다

만지던 옷가지들을 주섬주섬 챙겨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바늘로 생손가락을 찌른다

십일월 하늘에다 행복을 꿰매겠다는 것일까

어느 날 길이 나오듯 사랑이 왔다

어떤 사랑이 떠날 때와는 다르게

아무 소리 내지 않고 피가 돌았다

하나 저울은 사랑을 받치지 못했다

무엇이 묶어야 할 것이고 무엇이 풀어야 할 것인지를 모르며 지반이 약해졌다

새 길을 받고도 가지 못하는 사람처럼

사랑을 절벽에다 힘껏 던졌다

공중에 행복을 매달겠다는 것이었을까

 

 

 

 

 


 

 

 

☞이병률(1967 ~ ) :

 

 

시인이자 방송작가인 이병률은 1967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좋은 사람들」,「그날엔」이 당선되어 등단했다.‘시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바람의 사생활』『찬란』 등과 여행산문집 『끌림』(2005) 등이 있으며, 제11회 현대시학 작품상을 수상했다.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