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시집 감상

김수영 시집 『달나라의 장난』

by 언덕에서 2015. 3. 25.

 

 

김수영 시집 달나라의 장난

 

 

 

 

 

 

 


 

김수영(金洙暎: 1921 ~ 1968)의 시집으로 B6판. 118면이다. 1959년 [춘조사]에서 ‘오늘의 시인 총서’로 발간하였다. 차례 다음에 “이 시집을 박준경형에게 드린다”라는 헌사가 붙어 있다. 헌사 뒤에 발표연도 순으로 40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시집은 <토끼><아버지의 사진)><달나라의 장난><헬리콥터><눈><폭포><서시)><광야)><꽃><사령> 등 1948년부터 1958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잡지와 신문 등에 발표되었던 것을 추려 모은 것이다. <토끼>, <아버지의 사진>, <웃음> 세 작품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한국전쟁 이후에 쓴 것으로 특히 1959년에 이르는 3‧4년간의 작품이 여러 편 포함되어 있다.

 이 시집에 앞서 김경린ㆍ박인환 등과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 김종문ㆍ김춘수ㆍ김경린 등과의 합동시집 <평화에의 증언>(1957)이 간행되고, 사후에 시선집 <거대한 뿌리>(1974)가 나온 사실을 고려하면 이 시집은 김수영 생전에 출판된 유일한 시집이다. 이는 김수영이 1960년 4ㆍ19혁명을 겪고 나서 참여시를 쓰기 이전의,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초기 시 세계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시인 작품의 한 특징은 특정한 시어를 고집하지 않고 일상적인 언어를 그대로 시에 도입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시어에 대한 고집은 시와 우리의 삶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인식에 기초한 것이며, 동시에 신문학 이래 지속되어온 외래사조의 모방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삶과 현실에 맞는 시를 쓰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으로 보인다.

 <달나라의 장난>은 김수영의 첫 개인 시집이자 그의 초기 시를 마무리하는 시집으로, 이 시집에서는 바로 살고자 하는 의지와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한계상황으로서 현실 사이의 갈등과 대결이 중심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다. 한계상황으로서 죽음과 벽을 뛰어넘어 완전한 자아와 완전한 사회에 도달하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한편 이 시집의 또 하나의 특징은 그의 시에 대한 사색이 잘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이 시집에서 그는 시는 대지와 더욱 밀착되어야 하고, 어둠 속에서 더욱 큰소리를 내는 폭포처럼 한계상황으로서 벽 앞에서 타협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곧은 소리를 내야 된다고 말함으로써, 1960년대 그의 참여시론의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이 시집을 빼놓고 1960년대 한국시를 얘기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새로운 지형을 보여준 선언적인 책이다. 관념적인 시 세계를 떠나 저잣거리 같은 일상으로 시를 끌어들이는 분기점이 됐다. ‘달나라의 장난’ ‘가까이 할 수 없는 서적’ ‘아버지의 사진’ ‘폭포’ ‘눈’ '봄밤' 등이 그렇다.

 

 '봄밤'이란 작품은 대중적으로도 인기가 높은 서정시다. 시대의 양심으로 불렸던 그는 봄밤 애타는 마음에 결코 서둘지 말라고 말한다. 개가 짖고, 종이 울리고, 기적 소리가 슬퍼도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고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에 서둘지 말라고 한다. 이 시에서 그는 계속해서 절제를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 그 온몸에 “오오 봄이여”라는 탄식과 환희가 담겨 있다. 반세기도 더 전에 쓰인 시를 읽는 봄밤, 시인의 예지력과 변하지 않는 시대의 서툶을 생각하게 한다.

 

 

 

 

 

 

 

 

 

 

봄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

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

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

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

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사령(死靈)

 

…… 활자(活字)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나의 영(靈)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벗이여

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

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

마음에 들지 않어라.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어라.

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

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

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

 

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

행동이 죽음에서 나오는

이 욕된 교외(郊外)에서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어라.

 

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

간간이

자유를 말하는데

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냐.

 


 

 

 

 

 

 

달나라의 장난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 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 한 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도회 안에서 쫓겨다니는 듯이 사는

나의 일이며

어느 소설보다도 신기로운 나의 생활이며

모두 다 내던지고

점잖이 앉은 나의 나이와 나이가 준 나의 무게를 생각하면서

정말 속임 없는 눈으로

지금 팽이가 도는 것을 본다

그러면 팽이가 까맣게 변하여 서서 있는 것이다

누구 집을 가 보아도 나 사는 곳보다는 여유가 있고

바쁘지도 않으니

마치 별세계같이 보인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팽이 밑바닥에 끈을 돌려 매이니 이상하고

손가락 사이에 끈을 한끝 잡고 방바닥에 내어던지니

소리없이 회색빛으로 도는 것이

오래 보지 못한 달나라의 장난 같다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돌면서 나를 울린다

제트기 벽화 밑의 나보다 더 뚱뚱한 주인 앞에서

나는 결코 울어야 할 사람은 아니며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이 밤에

나는 한사코 방심조차 하여서는 아니 될 터인데

팽이는 나를 비웃는 듯이 돌고 있다

비행기 프로펠러보다는 팽이가 기억이 멀고

강한 것보다는 약한 것이 더 많은 나의 착한 마음이기에

팽이는 지금 수천 년 전의 성인과 같이

내 앞에서 돈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

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

팽이가 돈다

팽이가 돈다

 


 

 

 

 

 

 

 

 폭포(瀑布)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