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 현대소설

이호철 단편소설 『탈향(脫鄕)』

by 언덕에서 2016. 9. 20.

 

이호철 단편소설 『탈향(脫鄕)』

 

 

이호철(李浩哲.1932∼2016)의 단편소설로 1955년 [문학예술]지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전쟁으로 북쪽의 고향을 버리고 월남한 사람들인 실향민들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에는 아홉의 나이로 단신 월남하여 부산에서 노동을 하며 생계를 해결해야 했던 작가의 실제 체험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고향을 생각하는 동안만큼은 행복하다. 하얗게 함박눈이 내리던 고향, 잘 웃던 이웃집 형수의 웃음이 기억 속에서 환하게 밝혀져 있는 고향을 그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이처럼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꾸고 있지만, 이들이 살고 있는 현실은 꿈과는 다르게 참혹하다. 같은 고향이라는 공동체 의식만으로는 어찌해 볼 수 없는 현실의 이해관계가 그들을 갈라놓는다. 마침내 '나'는 돌아갈 기약조차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만 짜고 있는 감상주의적 태도와 결별해야 한다.

 

 

소설가 이호철((李浩哲.1932-2016)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6ㆍ25전쟁에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한 대규모 1ㆍ4후퇴 당시, 엉겁결에 LST에 올라 한 마을에서 함께 월남한 광석, 두찬, 하원 그리고 '나'는 부산에서 궁핍한 피난살이를 시작한다.

 이들은 부산 부두 하역장에서 육신을 팔아 간신히 끼니를 이어 가며 생활을 한다. 이들에게는 기거할 방이 없다. 그래서 이들은 정차되어 있는 화차(火車)에 숨어들어 잠깐씩 잠을 청한다. 이들의 생활은 이처럼 극도로 어렵지만 이들은 서로 고향으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 이 고통스러운 생활을 이겨내기를 맹세한다. 이들은 화물차 안에서 고향에서 내리던 눈, 잘 웃던 이웃집 형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기도 한다.

 그러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나이가 많은 두찬과 광석은 '나'와 하원을 귀찮게 생각한다. 하원은 입만 열면 고향이야기이고, 눈물을 흘린다. 급기야 광석이 화차에서 실족하여 죽는 사건을 계기로 이들의 관계는 점차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이들 세 사람은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점차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마침내 두찬은 광석의 죽음 후 이들을 버리고 도망했으며, 이젠 '나' 역시 하원을 버리고 도망할 궁리를 한다.

 

 

 

 이 작품은 6ㆍ25전쟁 당시 부산을 배경으로 피난 온 실향민들의 애환을 그리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작품은 귀향 소설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피난민의 고통스러운 삶만을 그리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곧 이 작품은 고향을 잃은 것에 대한 한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삶을 개척할 길을 찾고 있는 실향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나는 광석과 두찬의 갈등을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상황이 어려워져 생활을 감당해 내지 못한 결과, 이성의 통제가 약화되면서 나타나는 인간의 사악함과 나약함에 대한 경멸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달리 보면 이러한 나의 태도는 같은 고향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서 엉켜 지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나'의 내밀한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 '나'는 돌아갈 기약이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만 짜고 있는 하원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 작품의 제목처럼 '탈향'을 감행한다. '나'는 이로써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이러한 '나'의 모습은, 전후 소설이 소박한 휴머니즘과 비장한 영탄조에 이끌리는 것에서 벗어나 객관적 현실의 구체적 탐구로 나아가기 시작했음을 보여 주고 있는데, 바로 여기서 이 작품의 문학사적 의미가 있다.  

 이 작품에서 '탈향'은 일차적으로는 전쟁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야 했던 체험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6ㆍ25 전쟁을 반영한 사실주의 문학에 해당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면, '탈향'은 인간의 근원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인간은 누구나 어머니의 품에서, 그리고 원초적인 고향의 품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고향 상실은 인간에게 고향 회귀 의식을 낳는다. 실존주의 문학에서는 고향을 상실한 인간의 조건을 '실존'이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 작품의 밑바탕에도 실존주의적 경향이 깔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