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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최윤 단편소설 『하나코는 없다』

by 언덕에서 2016. 9. 7.

 

최윤 단편소설 『하나코는 없다』

 

 

최윤(崔允, 1953~ )의 단편소설로 1994년 [문학사상] 6월호에 발표되었다. 1994년 제18회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이다. 불문학자이자 문학비평가인 작가 최윤은 1978년 <소설의 의미 구조 분석>이라는 논문으로 [문학사상]에 비평가로 등단한 후, 1988년 「문학과 사회」에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발표하면서 작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이 소설은 남녀간의 우정, 그 미로(迷路)와 같은 오해와 환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나코는 없다」는 소설은 ‘미로’와 ‘안개’의 이미지가 뒤섞인 몽환적인 분위기로 시작된다. 이국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묘사된 ‘물과 안개의 도시’ 베네치아의 풍경에는 ‘최면 상태’인 듯 혼돈스러운 그의 내면이 투영돼 있다. 그는 미로 속을 헤매듯이 불분명한 기억들을 더듬어 가면서, 안개처럼 모호한 하나코의 실체를 되살려 내고자 한다. 그들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이 망쳐 버린 ‘그 사건’은 감춰진 비밀처럼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지만, 그날의 기억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그의 심리는 ‘그 사건’에 대해 말하는 순간을 자꾸만 지연시킨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서른두 살의 나이로 무역 회사의 간부인 주인공은 아내와의 찌든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출장을 핑계로 이탈리아에 간다. 그는 베네치아를 혼자 여행하면서 대학동창 모임에 늘 합석했던 하나코라는 여자친구에 관한 기억을 되살린다. 코가 유난히 예뻐 하나코라는 별명을 얻은 ‘장진자’는 그 모임의 대부분의 남성들에게 언제나 격의 없는 친구이자 연정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관계는 대단히 모호한 것으로, 그들이 하나코에게 연락하는 이유는 이따금의 기분 전환을 위해서이다. 그러나 그녀는 늘 진지하게 그들을 대하는데, 그들 모두는 그녀를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성친구라는 미명 하에 그녀는 매우 부당하게 자기 정체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코에게만 그렇게 대한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만나온 남자친구들의 우정도 사실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지내는 피상적인 관계였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코와 그녀의 하나뿐인 것 같던 여자친구와의 관계와 잘 대비된다. 여자들의 우정에 회의를 품는 사회통념을 비웃기라도 하듯, 두 사람은 때로는 동업자, 때로는 동반자로 함께 하며 이탈리아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성공하여 귀국한다. 즉, 남자친구들에게는 없는 듯 보였던 하나코의 실체가 그녀의 고유한 삶 속에서는 그 오뚝한 콧날처럼 당당히 존재하고 있었다.

 

 

 여성의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다룬 「하나코는 없다」는 가려진 여성, 부재하는 여성, 소외된 여성, 타자로서의 여성의 존재성을 자리매김해 보는 소설이다. 기표로서는 존재하지만 기의로서는 존재하지 않는 여성, ‘하나코’라는 별명으로는 불리지만 ‘장진자’라는 이름으로는 불리지 못하는 여성-.이런 의미가 바로 불가시적인 존재로 취급받아 왔던 여성들의 모습이다. 왜 하나코는 없고 부정되는가?

 하나코는 필요할 때는 언제나 만나주고, 늘 진지하며, 잘 설득당하고,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으며, 고해성사를 잘 받아주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리아 같고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고, 어머니 같다. 남이 자신의 일로 시간을 소비하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자신 때문에 주의를 끄는 일은 거의 만들지 않는다. 그러기에 ‘하나코’하면 ‘물’이 연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무엇이든지 다 받아주고 언제나 옆에 있을 것 같은 여성은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여성에 가깝게 된다. 무조건적인 인내와 배려를 보이는 무표화(無標化)된 인물이 바로 하나코다.

 여기서 하나코의 그런 특성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이기에 비판받아야 한다거나, 무한한 모성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가치 있다는 논쟁은 비생산적이다. 그것은 어쩌면 각도와 정도, 혹은 세계관과 여성관의 차이에서 연유하는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화자가 남성인 ‘나’라는 사실에서 암시되듯이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그런 여성을 왜 남성들이 부재화시키는 가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남성들이 이기적이고 자기 기만적이며 남성중심적인 시각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래서 편리하고 일방적인 관계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

 

 

 부담이 없어서 책임질 필요가 없어야 할 것, 자신들의 치부를 마치 보석 다루듯이 끌어안아 주어야 할 것, 필요할 때만 생각나고 쓸 데 없는 궁금증은 유발시키지 말 것. 이런 것들이 바로 부재하는 여성이 지켜야 할 혹은 갖추어야 할 강령이다.

 한 인간의 내부에 있지만 너무나 당연히 존재한다고 간주되어 오히려 지각되지 못하는 진정한 자아나 근원 본질의 의미가 바로 하나코일 수도 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어쩌면 이 소설은 진정한 자아가 없는 인간들의 내부를 내시경으로 들여다 본 소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의미에서 하나코는 침묵하도록 강요받지만 커다란 울림을 주는 말을 하는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가 말을 하지 않으면 진짜 하나코는 부재하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하나코는 없다’라는 제목처럼 타자 또는 집단 속에서 소외된 여성의 존재상실, 더 나아가 인간관계의 차단된 벽을 그리면서, 남녀간의 우정, 그 미로와 같은 오해와 환상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해 나가고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소재로만 다루어졌던 여성문제를 '있다'와 '없다'의 대립개념을 통해 관념적으로 바라봄으로써,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한 차원 더 넓혔다. 좁은 시각에서 보면 페미니즘의 문제가 되고, 넓게 보면 현대사회의 문제인 인간의 익명성을 격조 높은 기법으로 형상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