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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김연수 단편소설『뿌넝숴(不能說)』

by 언덕에서 2016. 9. 1.

 

김연수 단편소설『뿌넝숴(不能說)』

 

 

김연수(金衍洙.1970∼ )의 단편소설로 2005년 출간된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게재된 작품이다. 중국어 ‘뿌넝숴(不能說)’를 해석하면 ‘말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 작품 『뿌넝숴(不能說)』는 중국 군인 출신 점쟁이가 한국인 작가에게 자신이 전쟁에서 겪은 일들을 들려주는 이야기식으로 전개된다.

 작가가 이 소설집의 『뿌넝숴(不能說)』를 비롯한 모든 작품을 관통하는 유일한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진실도 말해질 수 없다’일 것이다. 이 세계는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이라는 작가적 자의식은, 그러나 허무주의에 쉽게 안착하는 대신 이야기의 가장 마지막 지점까지 독자를 밀어붙인다. 요컨대, 말해질 수 있는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자리에서 멈춰 서버리는 것이 아니라, 타인/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야기의 끝의 끝까지 가닿게 된다. 그러니 그 앞에서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절망’이란 허무주의에서 이끌어낸 그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가 된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소설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한국전쟁 경험담으로 시작한다. 해방군의 모표도, 가슴의 휘장도 없지만 자긍심 하나로 똘똘 뭉친 그들의 가슴은 전사의 배포로 가득 차있다. 그때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전쟁이, 그리고 역사가 우리의 삶을 매 순간 바꾸어 놓았듯이 서서히 몸을 적신다. 피부에 옷이 착 달라붙는 그 요염함을 말로 표현하려 했으나 이미 몸은 젖어 버렸다. 이미 몸이, 마음이, 그리고 전부가 젖어 버렸다. 그 놈의 비 때문이다.

 한국전쟁 투입 초기에 중국 인민지원군은 승리를 거듭하며 밑으로 전진한다. 보급선이 진출할 수 있는 한계점에 도달한 지점에서 인민지원군은 미군의 허리를 끊기 위해 지평리로 향하고 그 곳에서 참패한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매화 꽃잎이 되어 들판에 휘날린다. 그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매화 꽃잎이 되어 날아간 것이어야만 했다. 그들의 육체가 죽었다고 해서 그들의 자긍심, 그들의 피지 못한 꿈까지 죽어버리면 안 되니까 말이다. 붉은 꽃잎이 날아다니는 그 광경을 그 누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뿌넝숴, 뿌넝숴. 저 꽃잎은 나비를 좋아했고 저 꽃잎은 나무의 향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은 붉게 물들어 흩날리고 있다.

 화자 또한 한 때 날아갈 준비를 하는 꽃잎이었다. 하지만 한 여성 구호원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300그램의 피를 수혈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빈 오두막을 찾아 그녀와 함께 지냈다. 낮에는 공습을 피해 숲에 앉아 있었고 밤에는 강렬한 섹스를 했다. 모두가 꽃잎이 되어 버려 내가 꽃잎인지 사람인지 분간이 안 되는 상황에서 섹스는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해주는 매개체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그와 섹스를 하지 않는다. 자신이 어렵게 살려 놓은 그가 섹스로 인해 상처를 건드려 피를 흘리며 죽어버리면 안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는 ‘피로써’ 살아있음을 확인하기보다 ‘사랑으로써’ 살아있음을 확인하길 원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살리기 위해 사랑도, 피도 모두 다 주었다. 그녀는 죽고 그는 살아남았다.

 

 

 

‘뿌넝숴(不能說)’를 해석하면 ‘말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작품 속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 점쟁이가 지평리 전투가 끝난 후의 처참한 광경에 대해서 언급할 때(p. 70)와 지평리에서 무엇을 봤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받았을 때 여성 구호원이 답할 때(p. 71)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이 겪은 역사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했고, 말하고 싶지 않을 만큼 가혹하다. 하지만 100년도 채 안된 시간이 흐른 후임에도 역사는 그 사실을 단순히 숫자로만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가에 의해서 채택되고 정리된 역사. 하지만 이런 역사는 진실을 담아내지 못한다.

 점쟁이와 여성 구호원이 겪었던 것과 같이 처참하고 비극적인 역사는 기록에서 숫자로만 남을 뿐이다. 게다가 우리는 진실이 아닌 이런 왜곡된 사실은 믿으려 들면서도, 진실을 말하려 하면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점쟁이는 이런 답답한 상황에 대해서 “책에 씌어진 얘기가 아니라 두 눈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 얘기하게나.”라고 말한다. 전쟁 와중에 들리는 세발의 총성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세심함으로  ‘말도 안 되는 진실’에 귀를 기울이길 바라는 것이다.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손가락이 잘린 노인. 사람들은 노인을 전쟁에서 싸우기 싫어서 손가락을 자른 겁쟁이라고 손가락질한다. 노인은 한국전쟁 지평리 전투에서 매화 꽃밭을 보았노라고, 폭탄에 맞아서 다리가 잘린 자신을 위해 몸의 피를 너무 빼서 수혈해주고 자신 대신 죽은 여인을 만났다고 말한다. 그 여자를 너무 사랑하기에 손가락을 잘랐다고 이야기해도 세상 사람들은 비웃음만 짓지 믿으려 들지 않는다.

 과연 진실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말이 되어야 믿는다. 앞과 뒤가 맞아 들어가는 개연성이라는 것이 존재해야만 진실이라 받아들인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엔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 투성이다. 이 소설의 이야기처럼. 삶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렇다고 우리네 인생은 진실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말이 안 되는 것이 진실이다. 그것에 대하여 말을 할 수는 없지만, 말로 할 수 밖에 없는 것. 그게 인생이니까.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목소리를 내어 이야기 하지 못하는 것. 그게 바로 살아간다는 것이 아닐까. 그게 작가가 이야기하는 뿌넝숴(不言說)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