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 단편소설 『파충류의 밤』
천명관(千明官, 1964~ )1의 단편소설로 2014년 발간된 단편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 문학동네>에 게재되었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수면의 상태로 꿈속을 헤매거나, 현실을 악몽처럼 살아가거나, 혹독한 현실과 꿈의 괴리를 메우지 못해 좌절한다. 불면 혹은 절망의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 나약한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다름 아닌 약물의 투약과 복용이다. 밥을 먹고 나면 소화제를 먹고, 잠을 자기 위해 수면제를 먹고, 머리가 지끈거려 진통제를 먹고, 섹스를 위해 비아그라까지 먹어야 하는 ‘화학적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암에 걸리지 않기 위해 비타민을 과다복용하기도 한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이 작품을 통해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의 운명, 불안, 고통, 고독과 같이 누구나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케 한다. 그 해결 방안은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 존재는 서로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 속 수경과 소년, 영업부장은 결코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불면증 자체도 누구나가 겪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이 겪을 수 있는 문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수경은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힘들만큼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수경의 불면증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그녀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그녀의 불면증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오년 전이었다. 잠이 막 들려는 순간, 귓가에서 펑! 폭죽이 터지듯 큰 소리가 났는데 이때부터 잠들려고만 하면 ‘펑’하는 소리가 나서 놀라 일어나기 일쑤였다.
수경이 가정의학과와 신경과를 거쳐 마침내 정신과에 도달했고, 노란 알약, 하얀 알약, 파란 알약을 번갈아가며 먹었어도 오히려 의식과 잠 사이의 비무장지대로 내동댕이쳐져 고통에 힘겨워한다. 이제는 병원조차 그녀의 불면증을 해결해 줄 수 없다.
수경은 몇 년째 담배를 끊으려고 애썼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녀는 잠이 오는 곳을 찾기 위해 해외여행을 했고, 오랫동안 다니던 유명출판사의 편집장 자리를 버렸다. 해외여행의 경비로 집을 팔았기에 이제는 낡은 연립주택으로 이사를 왔다.
얼마 전 함께 술을 마셨던 한 소설가와의 대화에서 파충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소설가는 수경의 귀에서 들리던 소리는 파충류가 울부짖는 소리라고 했다. 그는 우리 뇌가 인간의 뇌인 대뇌피질, 포유류의 뇌인 변연계, 파충류의 뇌라고 하는 뇌간의 세 겹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는데, 수경의 자율신경에 이상이 생겨 뇌간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파충류의 기억을 일깨웠다는 것이다. 파충류의 삶은 사방에서 천적이 날뛰어 늘 죽음이 코앞에 와 있고 먹이는 너무 빨라 굶주림이 일상이었을 것이다. 그런 파충류의 불안과 걱정이 수경에게 이어져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수경은 옥상에서 이마에 커다란 멍이 든 옆집 아이를 만난다. 아이의 눈빛은 너무 외로워서 절망적인 기분이 들 정도였는데, 수경은 아이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보다 결코 가벼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경의 세계 여행은 불면의 기록이었다. 수경은 무수히 많은 곳을 돌아다녔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풍경은 거의 없고, 그저 잠을 어디서 어떻게 잤느냐 하는 것들을 기억할 뿐이다. 불면을 치유하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수경이 얻은 것은 그저 지독한 불면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완전한 체념이었다. 여행을 위해 그녀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아파트를 팔아야 했고, 돌아왔을 때 출판사에서 그녀가 있을 자리는 없어졌다.
여행 후 수경이 취업한 허접한 출판사의 영업부장은 수경처럼 불면증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며 수경에게 차라리 잠을 포기하라고 한다. 평생 출판 영업으로 먹고산 그는 쉰 살이 넘어 아내와 이혼하고 몇 년째 원룸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고 있다. 그는 쾌활하고 넉살 좋은 사람이었기에, 그가 오피스텔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는 소식은 수경에게는 파충류가 울부짖는 소리만큼이나 낯설고 혼란스러운 사건이었다.
수경의 삶에서 아침에 피우는 담배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옥상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다 그녀는 옆집 아이가 자살을 시도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그를 구하러 달려간다. 수경은 영업부장의 목숨은 살리지 못했지만 아이의 목숨은 살려낸다. 삼십팔 킬로그램의 여자가 팔이 부러지는 데도 한 생명을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었다.
수경은 아이를 구하고 나서 부러진 팔을 치료받으러 병원에 가기보다 침대에 누워 쉬고 싶어 한다. 그러고선 매일 옥상에 올라가 아이가 뛰어내리지 않도록 감시해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자신의 결심을 주문처럼 자꾸 되뇌는 동안 물속에서 소금이 녹듯 스르르 잠이 든다.
“파충류는 혼자 살지만 포유류는 같이 산다.”
작품 속 소설가가 한 말이다.
"지금 지구는 포유류의 시대지만 오래전 파충류는 인류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이 땅의 지배자였지요."
수경의 뇌간에서 파충류의 기억이 깨어나 그녀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파충류가 혼자 산다고 표현한 것은 수경이 병원에 가서 불면증을 치료하려 하지만 결국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느낀 점에서 기인한다. 그녀가 그 누구와도 깊은 관계를 맺지 않고 혼자 살아간다는 점도 그렇다.
그러나 수경이 옆집 아이를 구하고 잠에 빠져든 것과 앞으로는 소년을 매일 감시해야겠다고 결심을 되뇌는 것에서 수경이 혼자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소년과 함께 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포유류는 같이 산다고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뇌는 세 겹으로 되어 있는데 인간, 파충류, 포유류가 함께 만든 것이라 볼 수 있다. 때문에 한 겹의 뇌에 해당하는 삶의 방식으로는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작중 소설가가 한 말처럼 우리는 각자 고립된 개체도 아니고 백 년도 못 사는 유한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왜 이렇게 아프고, 언제부터 아프기 시작했는가? 천명관이 모든 이야기에서 천착하는 주제는 비극의 원인은 있지만, 결국 그것은 밝혀지지 않고 또 밝혀질 수 없다는,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그렇게 됐다”(121면)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바로 이러한 소설적 장치를 통해 천명관은 인생사의 비애와 아이러니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비극의 궁지에 몰린 인물들이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택한 해결책이 전혀 예상치 못한 극단적인 방법이거나 오히려 엇나가는 방향이라는 점에서 천명관 소설의 아이러니는 단순한 농담이나 해학을 넘어선 비극적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 1964년 경기 용인 출생. 골프숍의 점원, 보험회사 영업사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서른이 넘어 영화판에 뛰어들었다. 영화 「미스터 맘마」의 극장 입회인으로 시작해 영화사 직원을 거쳐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영화 「총잡이」 「북경반점」 등의 시나리오는 영화화 되기도 했으며, 영화화 되지 못한 시나리오도 다수 있다. 연출의 꿈이 있어 시나리오를 들고 오랫동안 충무로의 낭인으로 떠돌았으나 사십이 될 때까지 영화 한 편 만들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준비하던 영화가 엎어진 마흔 즈음,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어 동생의 권유로 소설을 쓰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2003년 문학동네신인상 소설 부문에 「프랭크와 나」가 당선되었으며, 2004년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에 『고래』가 당선되었다. 문학평론가 신수정이 "감히 이 소설을 두고 문학동네소설상 십 년이 낳은 한 장관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말한 『고래』의 '충격'에 대해, 소설가 은희경은 "인물 성격, 언어 조탁, 효과적인 복선, 기승전결 구성 등의 기존 틀로 해석할 수 없다"라고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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