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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이광수 단편소설 『무명(無明)』

by 언덕에서 2016. 9. 29.

 

이광수 단편소설 『무명(無明)』

 

이광수(李光洙.1892∼1950)의 단편소설로 1939년 2월 창간된 [문장]지 1호에 발표되었다. 신문 연재 장편소설을 많이 써 온 이광수의 작품 편력에 비추어 볼 때 이 『무명』의 발표는 상당히 주목을 끈다. 이 작품은 종래의 그의 소설이 지닌, 지나친 계몽주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있는 점이 특징이다. 근대 사실주의적 태도를 보이면서 객관적인 시점을 통해 ‘병감1’을 에워싼 닫힌 상황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이광수는 안창호2의 죽음(1938.3.) 소식을 들은 다음달부터 이 작품을 집필하기 시작하였으며, 동우회사건3으로 옥고를 치르다가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병원에서 구술로 탈고하였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은 1930년대의 소설의 장편화 경향과 관련하여 등장한 중편소설의 면모를 갖추었고, 기독교 사상을 기저로 한 계몽문학으로 일관해온 작가가 불교적 인식으로서 전환을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작가의 정신사적 측면에서 의의를 가지는데, 작자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문학적인 격조가 가장 높다고 평가되는 단편이다. 

 연재 지면에 ‘무명 이광수’라고 표기되어 있다. 중편 전재로, 이광수가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작가가 병상에서 구술한 것을 박정호가 받아쓴 것이라고 한다. 창작 당시의 제목은 '박복한 무리들'이었으나, [문장] 창간호에 발표될 때 이광수 자신이 ‘무명’으로 고쳤다. 후에 김사량이 일어로 번역하여, 동경에서 제정된 제1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평양 외곽에 있는 이광수 묘소4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입감한 지 사흘째 되는 날 ‘나’는 병감으로 보내진다. 과식과 악담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기범 '윤'과 마름 노릇을 하던 방화범 '민'노인을 그곳에서 만나게 된다.

 민이 병감으로 옮긴 뒤 '정'이라는 평안도 출신의 사기범이 들어오자 윤과 정은 쉴 새 없이 다툰다. 나와 윤과 정이 다시 옮겨간 방에서 다시 민을 만나고, 기자 출신으로 공갈 취재를 하였다는 강을 만나자 윤과 정은 기가 죽고 만다. 민이 복막염으로 병보석 되어 출감한 뒤 옆방에서는 장질부사를 앓던 청년 하나가 죽어 나가고 윤은 폐결핵으로 다시 전방된다.

 무죄방면을 바라고 <무량수경>을 얻어다 읽던 정은 징역 일년 반을 선고받고, 강도 징역 이년의 판결을 받는다. 강이 상소권을 포기하고 선선히 복죄하여 버린 것에 대조되어 정은 멸시받게 된다. 윤도 결국 병보석으로 출감한다.

 내가 출옥한 뒤 석 달이나 지나서 출옥한 간병부의 말을 들으니, 민도 죽고, 윤도 죽고, 강은 목수 일을 하고 있고 정은 병이 악화되어 본감 병감에 가 있는데, 도저히 공판정에 나가볼 가망조차 없다고 한다.

임시정부 사료조사편찬회 사진(1919). 맨 앞줄 가운데가 이광수이고 맨 오른쪽이 김병조. 뒷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도산 안창호.

 

 이 작품은 ‘나’라는 주인공이 병감에서 같이 지내는 간병부)인 ‘윤’ㆍ‘민’ㆍ‘정’ 등의 대화와 행동을 지켜본 대로 이야기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자유를 잃고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그들의 성격과 사고방식이 상당히 정확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고, 광명을 등진 이들 어두운 인간상을 통하여 작자의 소극적이기는 하나 인도주의적인 경향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 감옥 속에서는 밝음이 없다. 생존하고자 하는 욕구만 남아 있는 이들에게, 감옥은 동물적인 본능만 들끓는 처절한 생존의 공간이다. 이들은 서로 끊임없이 싸운다. 사소한 일로 서로 헐뜯고 싸우는데, 그러나 이러한 사소함이 그들에게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싸움의 성과나 이유는 사소해 보이지만, 그것은 이해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며,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문제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법이다. 생존이란 그토록 엄연한 그들의 현실이다.

 '나'는 그들의 싸움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다. '나' 또한 갇혀 있는 무력한 인물이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기록하면서 과연 올바른 삶이란 무엇인가 생각해볼 뿐이다.

 

 

 이 작품을 쓸 무렵의 춘원은 불교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무명』은 속세의 헛된 욕망에 집착하여 살아가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미망과도 통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욕망을 버리지 않는 한, 밝음은 얻을 수 없다는 춘원의 종교관이 투영된 작품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 속의 '감옥'은 우리의 식민지 현실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갇혀 있으면서 그저 먹고 싸우고 동물처럼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작가 이광수는 우울한 식민지 조국의 초상을 본 것이다. 작가는 냉철한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감옥 속의 현실을 그림으로써 우리 민족의 식민지적 상황을 예리하게 묘파해낸다. 그러나 이후 그가 보여준 친일행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1. 교도소에서 병든 죄수를 따로 두는 감방. [본문으로]
  2. 항일 독립투사, 민족 개화 운동의 선구자. 평남 강서(江西) 대동강 하류 도롱섬에서 농부 안흥국(安興國)의 3자로 출생. 7세 때 부친을 여의고 조부 밑에서 성장. 서울 구세군 학당서 수학. 1896년 18세 때 [독립 협회] 평양 지회 결성식이 열린 평양 쾌재정에서 처녀연설을 하고, 1898년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였고 1900년 도미해 [공립협회(共立 協會)]를 창설, 1906년 귀국,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으며, 1907년에는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 정주(定州)에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설립하였고, 1909년 [청년학우회]를 조직, 무실역행(務實力行)의 민족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1년 재차 도미하여 191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인재 양성 목적으로 민족 혁명 수양 단체인 [흥사단]을 조직, 독립 운동을 펴던 중, 3ㆍ1 운동 후 임시 정부 내무총장을 역임하였고, 1932년 윤봉길 의거 사건 후 체포되어 본국에 송환되었으며, 대전서 3년간 복역 중 가출옥, 1937년 [흥사단]의 자매기관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돼 서대문 감옥에 다시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병을 얻어 12월 24일 병보석으로 경성제국대병원에 입원, 이듬해인 1938년 3월 10일 동 대학 병원서 폐병, 소화 불량으로 사망했다.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1962) 수상. [본문으로]
  3. 적지 않은 이 땅의 지식인들이 친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수양동우회는 1922년 상하이에서 도산 안창호의 지도를 받은 이광수가 귀국해 조직한 수양동맹회가 그 전신으로, 당시 몇 안 되는 합법적 민족운동 단체였다. 인격 수양과 민족문화 건설을 내세운 수양동맹회는 흥사단의 규약을 일부 수정해 채택하는 등 흥사단의 국내조직 격이었다. 1926년엔 안창호가 세운 평양 대성학교 출신 중심의 동우회(同友會)와 통합해 수양동우회가 됐다. 이들은 〈동광〉 잡지를 발행하는 등 합법적 실력 양성 운동을 벌였다.중일전쟁을 한 달 앞둔 1937년 6월 일제는 기독교청년민려회의 ‘불온 인쇄물’의 배후로 수양동우회를 지목하고 관계자 181명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해 42명을 기소했다. 전시체제를 정비할 목적이었다. 4년여간의 재판 끝에 모두 무죄 석방이 되긴 했지만 대부분 친일로 전향했다. 대표적 인물이 이광수로, 그가 다른 회원들의 무죄 석방을 조건으로 ‘천황의 적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는 이야기도 있다.이 사건으로 수양동우회는 와해되고 가출옥 상태였던 안창호는 다시 수감되었다가 병을 얻어 보석으로 풀려난 지 4개월 만인 1938년 3월 10일 사망했다. [본문으로]
  4. * 1991년 여름 그의 3남 영근(榮根)씨(미국 존스 홉킨스대학 교수)가 북한을 방문, 1950년 10월 25일 병사했으며, 평양 외곽에 있는 묘소를 확인한 바 있다. 춘원은 강계(江界)에서 노동을 하던 중 폐결핵이 악화돼 토굴 속에서 치료를 받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으로 알려졌다. - [동아일보](1991. 10. 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