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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소설 <옛날의 금잔디>

여행에서 만난 60대 부부 이야기

by 언덕에서 2015. 2. 13.

 

 

 

 

 

 

여행에서 만난 60대 부부 이야기

 

 

 

 

  

 

 

약 10년 전의 일이다. 결혼 15주년 기념으로 홍콩, 싱가포르, 마카오 등을 거치는 단체여행 상품을 구매하여 1주일간 동남아를 여행한 적이 있다. 단체여행 상품이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같은 일행 중에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뜻밖에 여행이 즐거워지는 법이다. 출발, 공항 로비에 여행사 직원이 도착하자 근처에 있는 초면의 일행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날 오후 알게 된 것이지만 단체관광 일행의 구성은 이랬다.

 40대 중반의 우리 부부 이외에 50대 초반의 부부와 자녀 둘,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노부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부부, 30대 후반의 부부 해서 12명의 인원이 일주일을 함께 여행하게 되었다. 어차피 다들 초면이어서 첫날과 이튿날은 관심이 없었지만 사흘째 날 즈음에는 누가 어느 동네에 살고 직업은 무엇인지까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것은 명품으로 온몸을 도배한 멋쟁이 60대 중반 부부 때문인데 두 분은 틈만 나면 일행들에게 눈을 맞추면서 '어디 살아요? 무슨 일을 하세요?' 등의 질문으로 일행들의 어색한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풀어갔다.

 그러나 그분들은 20대 후반 신혼부부로 보이는 젊은 커플에게는 '댁들은 신혼부부요?'라고 물었다가 그들이 '그냥, 친구 사이예요.' 라고 답하자, '결혼도 않은 사람들이 이래도 돼요?' 하며 면박을 줄 정도의 직선적인 면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첫머리에 60대 중반 부부라고 칭한 두 분의 나이는 부인이 65세였고 남편은 69세였다. 그분들은 손주가 있으므로 편의상 할아버지와 할머니로 칭하겠다. 나이가 드셨지만, 할아버지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는 ‘한량(閑良)’그 자체였고 할머니의 고운 자태(姿態)는 젊은 시절 대단한 미인이었음을 첫눈에 알 수 있었다.

 일주일간의 여행 중에 우리 부부는 자연스레 노부부(老夫婦)와 매우 친해졌고 거의 날마다 붙어 다녔다. 아마 너그럽고 온후한 두 분의 성품이 우리를 끌었던 것 같다.

 고혈압과 백내장을 안고 산다는 할아버지는 멋있는 옷차림의 능변가였다. 특이한 점은 할아버지가 식사 때나 이동할 때 물을 마시지 않고 대신 항상 캔 맥주를 드신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식사 후 집합할 때면 호텔의 편의점 등에 가서 캔 맥주를 대여섯 통 사서 가방에 넣은 후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다 중간에 맥주가 동나면 안내자(가이드)에게 차를 세우게 하고 가게에 가서 시원한 캔 맥주를 골라 사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내가 신기해하며 쳐다보면 맥주 한 캔을 내게 건네며

 “선생, 드세요, 내가 이것 마시는 것 외에 낙(樂)이 뭐가 있겠수?”

하는 것이 그 여행의 일상이었다.

 전직 사진작가였던 할아버지에게 기념사진을 부탁해서 찍은 사진이 지금도 몇 장 남아있는데 여행 후 PC에 옮겨서 확대해보니 뭐, 사진이 매우 평범해서 좀 놀라기는 했다.

 홍콩에서였다. 낮에 하버 시티(Habour City)라는 쇼핑센터를 관광했는데 진기한 물품이 많아 제법 볼만했다. 나는 평소에 갖고 싶었던 만년필과 넥타이를 구매하다가 옆 코너에서 할아버지가 유독 화장품, 액세서리를 많이 사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밤에 야경을 보면서 노부부와 함께 맥주를 마실 때 내가 할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참 좋으시겠어요? 바깥어른이 화장품, 목걸이, 반지 등 여성용품을 다양하게 사시던데 자세히 보니 자식들에게 줄 선물은 아닐 것 같고 말이에요. 사모님을 많이 챙기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할머니의 답변이 의외였다.

 “저건 나에게 줄 것이 아녜요. 우리 영감에게는 애인이 있어요. 애인 주려고 저러는 거야.”

 생각도 못 한 놀라운 이야기여서 내가 물었다.

 “아니, 사모님, 그런데 질투 나지 않으세요?”

 할머니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에이, 질투는 무슨. 나도 애인이 있어. 히히, 나도 내 애인 주려고 선물 많이 샀어요.”

 순간 매우 재미있는 분들을 만났다고 하는 생각에 엔도르핀이 돌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그 순간에도 계속 맥주를 마시고 계셨다. 할머니는 내가 질문할 틈을 주지 않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죄다 전개하시는 게 아닌가.

 “5년 전에 영감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때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우리가 앞으로 살면 얼마나 많이 살겠어? 그지? 영감이나 나나 앞으로 살아갈 날이 그다지 많이 남지는 않았는데 서로 즐겁게 살아야지. 이런 것 갖고 서로 싸우면 둘 다 말년이 불행해지잖아. 그래서 영감을 이해하려고 나도 애인을 구했어요.”

 놀라웠다.

 “아, 그러셨군요.”

 “선생님, 내 이야기 들어봐요. 언젠가 영감이 시내 호텔다방에서 만나자고 하는데 내가 그 호텔에 시간 맞추어 갔거든. 그 호텔 로비에 한 여자가 나오는데 순간 느낌이 딱 오는 거야. 영감의 여자구나.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여자 특유의 느낌. 그럴 땐 아주 정확해. 히히.”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이번에는 아내가 물었다.

 “뭘 어째? 내가 아무개의 마누라인데 잠깐 둘이서 이야기 좀 하자고 그랬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요? 둘의 관계를 부정하거나 자리를 피하려고 하지는 않던가요?”

 “어휴. 뭘 그래? 같이 늙어가면서. 본인도 영감과의 관계를 시인했어요. 그래서 내가 이야기했지. 둘이서 이렇게 지내는 것은 좋은데 조건이 있다! 단 한 가지다. 우리 영감이 죽을 때까지 절대 헤어지지 마라. 영감이 술을 많이 마시고 고혈압이 있어서 당신과 헤어지면 큰 충격을 받고 며칠 못 가서 죽을 것 같다. 그건 내가 영감과 몇십 년 살아봐서 잘 안다. 그날 내가 이렇게 말했어.”

 “흠. 그러셨구나.”

 순간, 갑자기 김광석이 다시 불러서 히트시켰던 김목경의 노래 ‘어느 육십 대 노부부 이야기’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노래가 20년 전의 60대 노부부의 정서를 담았다면 여행에서 만난 두 분의 정서는 가장 최신판의 그것이 아닐까 한다.

 이야기가 빗나가는 게 아닌지 모르겠지만,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가치관에서 결정되는 것 같다. 이건 맞불 작전을 피우며 사는 노부부가 ‘맞다 틀리다’를 논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나름대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보다 좋은 조건 속에서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 행복하게 되려면 사물이나 상황을 어떻게 보느냐가 첫째 조건이 아닐까 한다. 녹색의 안경을 쓰고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녹색으로 보이게 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마음으로 인생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즐겁고 기쁘게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결국 이 세상은 마음먹기에 따라 좌우되지 않을까?

 새 세기가 열리던 해 2000년, 내 생애 최고의 영화 ‘화양연화(花樣年華)'를 보고 난 이후 줄곧 홍콩에 대한 매우 좋은 감정을 계속 가지고 있다. 올해 5월에 10년 만에 다시 홍콩을 여행할 기회가 생겼다. 이번에는 어떤 분들을 만나게 될지 기대해 본다.

 

 

 

- 월간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2016. 6월호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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