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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소설

서정인 단편소설 『강(江)』

by 언덕에서 2015. 5. 14.

서정인 단편소설 『강(江)』 

 

 

 

 

서정인(徐廷仁.1936∼)의 대표적인 단편소설로 1968년 [창작과 비평]에 발표되었다. 그의 초기 작품에서 보이는 것처럼 삶의 현실적 상황을 상징, 또는 환상으로 포착하면서 자의식의 분열을 추적, 진실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지식인의 고민을 그렸다. 그리고 단아한 문장과 정확한 구성력으로 내적 체험을 통한 초현실적 수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서 긴장감은 차차 프티 인텔리의 속물화하는 좌절의 분위기로 바뀌어 단편 문학으로는 크게 성공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서정인의 작품세계의 특징은 극적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 전개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주인공들의 인간의 존재 의식을 표출시키는 데 있다. 이 <강>에서도 현실적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인물들의 인간관계, 특히 늙은 대학생 김씨와 서울집 작부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인간관계 속에서 개인의 실존적이며 내면적인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강」은 1960년대 소설이 획득한 뛰어난 서정성의 미학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보여준 독특한 여수의 미학은 속악한 현실에서 가위눌린 인간 존재에 대한 탐문의 결과요, 독특한 서사 스타일로 포착한 산업화 초기의 속사정에 대한 반성적 인식의 결과이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는 날, 세 명의 주인공인 김씨, 이씨, 박씨 등은 군하리행 버스 안에서 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 안에는 실팍한 검정 외투 속에 고개를 웅크리고 있는 늙은 대학생 김씨, 멋 내는 것을 좋아하고 하얀 목도리에 밤색 잠바차림인 세무서 주사 이씨, 그리고 털실로 짠 감색 고깔모자를 귀 밑에 푹 눌러 쓴 군 기피자이며, 국민학교 선생을 그만둔 박씨가 있고, 박씨 곁에는 어울리지 않게 멋을 낸 여자가 타고 있다. 박씨 집에서 하숙을 하는 김씨와 이씨, 그리고 박씨는 군하리의 친구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예정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버스는 출발하고, 김씨만이 묵묵히 창 밖의 진눈깨비를 감상할 뿐, 이씨와 박씨는 함께 탄 여자, 그리고 차장과 노닥인다.

 오후 3시가 다되어서 군하리에 내리게 되고, 함께 오던 여자는 서울집이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곳으로 사라진다. 세 사람은 군하리의 소박한 풍경을 즐기고 돌촌 김서방의 혼사 집을 물어서 간다. 그날 밤 10시께 그들은 술에 취해 돌마을에서 나와 서로 의기투합하여 아까 버스를 함께 타고 온 여자가 들어간 서울집으로 술을 마시러 간다. 집을 잘못 들어 김씨는 여인숙에서 머물며 잠을 청하게 되었고, 그 여인숙에서 학교에서 반장 일을 보는 소년을 만나게 되는데, 소년을 바라보면서 이런 시절 우등생이던 자신이 점차로 자라면서 열등생이 되어 가는 모습을 돌아보고는 상실감에 젖는다.

 한편, 서울집에서는 박씨와 이씨가 낮에 보았던 여자와 함께 술을 마시며 즐긴다. 박씨는 무슨 일에든 자신감이 있는 이씨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열등의식과 질투심에 젖는다. 여자는 김씨가 늙은 대학생이라는 말에 놀라게 되고, 방을 나와 김씨를 찾아 나선다. 밖에는 소리 없이 내린 눈이 하얗게 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는 김씨의 새신부가 된 자신을 상상으로 그려본다. 김씨가 자는 여인숙 방으로 들어선 그녀는 누나가 되고, 어머니가 되어, 김씨를 편히 누이고 남폿불을 끈다. 밖에는 끝없는 눈이 내린다.

 

소설가 서정인( 徐廷仁.1936&sim; )

 

 

 김씨는 늙은 대학생으로 점차 자신감을 잃어 가는 인물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꿈을 잃어버리고 소시민이 되어가며, 그 소시민은 자신의 소시민성을 감추기 위해서 허풍, 오기 따위의 위선의 세계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여관집에서 만난 공부 잘하는 소년 - 반장 표찰을 붙인, 조금은 뻔뻔스러운 소년을 통해서 그러한 깨달음을 확인한다. 박씨는 국민학교 교사를 그만둔 사람인데, 제 나름대로 삶을 즐기고 있다고 자부하나 서서히 자신감을 상실함을 감추지 못한다.

 세무서 주사 이씨 역시 일상을 유쾌하게 대하고 있지만, 그가 드러내는 속물 근성은 소시민적 페이소스(pathos)를 심화시킬 뿐이다. 이 소설의 백미는 후반부에 표현된 술집 여자의 태도이다. 그녀는 버스에서 세 사내를 만난 후 혼사 집까지 따라 갔다가 박씨, 이씨와 어울려 술자리에 앉는다. 그러다가 1960년대 당시에는 보기 드문 신분인 '대학생'이라는 말에 자극되어 옆집 여인숙에 투숙한 김씨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 이유를 작가는 해명하지 않는다. 그저 김씨가 당시로서는 '귀한 신분'인 대학생이라는 상황 설정뿐이다. 이것은 아마 그녀의 신분적 열등감이 대학생 사모라는 보상책을 통하여 아름다운 만남을 한 순간이나마 얻으려는, 꿈꾸는 자의 행위로 볼 수 있다. '대학생'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으며, '술집 여자'는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누나가 되고 어머니가 된' 보호자의 입장에서 대학생과 한 방에 드들었는지도 모른다.

 방금 전 그녀가 꿈꾸었던 눈 오는 밤의 신부가 되기는 불가능하더라도 그 신부와 같은 첫날밤을 대학생과 함께 하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인간과 인간 사이, 특히 '대학생'과 '술집 작부'의 만남은 특히 그녀에게는 우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밖에서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다. 그녀가 남겨놓은 발자국을 하얗게 지으면서'란 아름다운 마지막 문장이 그녀가 찾았던 꿈을 얘기해 준다.

 

 

 단편소설「강」은 이상과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좌절과 방황을 담은 작품이다. 전직 교사와 세무서 직원 그리고 늙은 대학생, 이 세 사람이 시골 잔칫집을 찾아가는 버스에 술집 여자가 동석한다. 진눈깨비와 시간이 되어도 떠나지 않는 버스, 분을 허옇게 바르고 있는 살찐 젊은 여자, 버스 차장과의 무의미한 말장난이 이어진다. 희망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하고 초라한 삶을 보여준다.

 그날 밤 대학생과 함께 있게 된 술집 여자는 잠든 그에게 ‘대학생!’을 부르며 자신의 초라함과 열등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여자와 하나도 다를 게 없는 ‘가난하고 늙은 대학생’의 현실은 인간의 슬픈 뒷모습이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개인의 고독, 그리고 주어진 현실과 내면의 갈등을 다룬 서글픈 인간의 존재를 우리는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