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 단편소설 『기억 속의 들꽃』
윤흥길(尹興吉, 1942~ )의 단편소설로 1970년에 발표되었다. 이 작품은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전쟁의 아픔을 담았는데 전쟁으로 버려진 아이의 혹독한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윤흥길이 쓴 대부분의 소설들은 '인간과 사회'라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우리는 부모 세대 혹은 조부 세대가 겪었던 슬픔의 근원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윤흥길의 고유한 문장 기법은 어른들의 세계를 어린이의 시점에서 서술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기억 속의 들꽃’의 화자에 바로 그러한 시점을 사용하고 있다.
만경강다리1를 건너면 지나갈 수밖에 없는 어느 마을에 사는 주인공은 6·25 전쟁으로 인한 피란민들이 자신의 마을에 왔다가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보며 자신도 피란민처럼 어디로 떠나고 싶어한다. 그는 피란민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모르는 순진한 아이의 이야기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6.25가 터졌을 때, 전라북도 만경강 다리 근처의 우리 마을에는 피란민들이 많이 몰렸다. 평소에 피란민을 부러워하던 누나와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피란을 나서지만, 인민군을 만나 겁에 질려 한나절 만에 되돌아오고 만다.
피란길에서 돌아온 이튿날 나는 전쟁으로인해 고아가 된 명선이를 집으로 데려온다. 어머니는 명선이를 박대하다가 명선이가 내민 금반지를 보고 태도가 바뀌었고, 금반지 때문에 명선이는 우리 집에 살게 된다.
명선이는 나의 부모에게 또 구박을 받게 되자 다른 금반지를 내놓는다. 나의 부모가 금반지 있는 곳을 추궁하자 명선이는 집을 나가고 이후 명선이는 숲 속에서 벌거벗은 채 발견된다. 그 사건으로 명선이가 여자아이임이 밝혀진다.
얼마 후 나의 부모는 명선이의 목에 달린 편지를 발견하고 명선이가 부잣집의 무남독녀임을 알게 된다. 그것 때문인지 나의 부모는 이후 명선이를 철저히 감싸게 된다. 나와 명선이가 부서진 만경강 다리의 철근 위에서 놀던 어느 날, 명선이는 비행기 포성에 놀라 한 송이 들꽃처럼 다리에서 떨어져 죽는다.
명선이가 죽은 후 나는 혼자서 철근을 건너가 다리 끝에 달려있는 헝겊주머니를 발견한다. 나는 주머니에서 명선이의 금반지를 발견하고 놀라서 강물에 떨어뜨린다.
어느 날 “한 떼거리의 피란민들이 머물다 떠난 자리에 처치하기 곤란한 짐짝처럼 되똑하니 남겨진” 아이 하나가 발견된다. "곱살스런 얼굴에 꼭 계집애처럼 생긴 녀석”은 “착 감기는 목소리에 겁 없는 눈빛”을 하고 있다. 이렇게 난리통에 부모를 잃고 혼자 남겨진 소녀 명선이가 가지고 있는 금반지를 매개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그 여자아이의 출현은 소박한 시골 생활에 익숙한 주인공 '나'에게 새로운 모험의 세계를 체험하게 한다. 그녀는 남의 집에 와서 스스럼없이 밥을 달라고 하고, 밥이 없다고 하자 자신이 지니고 있던 금가락지를 꺼내서 그 대가로 밥을 얻어먹는다. 동네 아이들은 서울말을 쓰는 낯선 아이에게 텃세를 부린다. 처음에는 명선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부모님은 명선이가 어딘가에 금반지를 더 숨겨 두고 있을 거라는 단서를 잡는 순간 명선이를 감싸고 돈다.
전쟁통에 고아로 살아가기란 어린 소녀에게는 녹록치 않은 현실이다. 그녀는 동네의 개구쟁이들보다 더욱 장난을 좋아했고, 끊어진 다리 위에서 누가 더 멀리 가는지 시합을 하기도 한다. 주인공인 나는 그녀가 서울의 부잣집 딸이라는 것을 알고 그녀가 금반지를 여러 개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안 부모로부터, 그녀를 감시하라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녀는 적극적이고 대담하며 장난꾸러기여서 소극적이고 소심하고 얌전한 주인공과 대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주인공은 그녀와의 모든 시합에서 질 수 밖에 없다.
그런 명선이는 폭격으로 허리가 끊어져 철근이 무성한 만경강 다리에 가기를 좋아한다. 그곳에서 명선이는 먼지 속에 뿌리를 내린 작은 꽃 한 송이를 발견한다.
거대한 교각 바로 위 무너져 내리다 만 콘크리트 더미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꽃송이 하나가 피어 있었다. 바람을 타고 온 꽃씨 한 알이 교각 위에 두껍게 쌓인 먼지 속에 어느새 뿌리를 내린 모양이었다.
“꽃 이름이 뭔지 아니?”
난생 처음 보는 듯한, 해바라기를 축소해 놓은 모양의 동전만 한 들꽃이었다. ‘쥐바라숭꽃’이라는, 세상에 없는 이름을 가진 이 작은 들꽃은 명선이에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끊어진 다리 위에서 놀다가 굉장한 폭음을 내며 날아가는 전투기 소리를 듣고 놀란 그녀는 강으로 떨어져 죽는다. 명선이는 함께 오던 피란길에서 전투기의 폭격으로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바 있다. 그녀는 무엇이나 무서워할 줄 모르지만, 부모의 죽음을 가져온 전투기의 폭음을 무서워 한다. 부모의 죽음을 목격한 정신의 상처를 무의식 속에 지니고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
'기억 속의 들꽃’이란 제목에서 ‘기억’은 서술자인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는 것이고, ‘들꽃’은 명선이를 비유한 것이다. 즉 ‘기억 속의 들꽃’은 나와 명선이에 얽힌 추억이 잊혀지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 있다는 의미다.
‘쥐바라숭꽃’은 내가 붙인 들꽃의 이름, 한낱 힘없는 존재인 명선을 상징한다. 명선의 머리에서 쥐바라숭꽃이 떨어진 사건은 명선의 죽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감동적인 것은 그 소녀의 죽음이 이름 없는 한 송이 들꽃으로 상징화된 데 있다. 끊어진 교각 위에 핀 한 송이 들꽃은 생명이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한다. 그 꽃을 꺾어 머리에 꽂고 있던 명선은 바람에 날려간 그 꽃처럼 전투기의 폭음에 놀라서 강으로 떨어져 죽는다. 전쟁의 폭력에서 살아남은 한 송이 들꽃인 그녀는 그 강인한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가냘픈 들꽃처럼 강바닥으로 떨어져 버린다. 이러한 들꽃을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자라난 화자는 그래서 지금도 슬플 것이다.
2015년 전북 익산과 김제를 잇는 첫 번째 교량인 이른바 만경강 다리가 87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익산지방국토관리청은 김제시 백구면 삼정리에서 익산시 목천동으로 이어지는 만경교를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1928년 지어진 이 다리는 폭 6m, 길이 550m로 일제강점기 곡물수탈과 이후 벚꽃축제 등 수많은 눈물과 추억을 간직해 왔다. 그러나 낡고 오래돼 안전기준 검사결과 E등급을 받아 1996년부터 이용이 금지됐다. 익산국토청은 역사적 가치 평가와 자치단체의 의견조율을 거쳐 5월까지 철거키로 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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