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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시집 감상

막다른 골목을 사랑했네, 나는

by 언덕에서 2015. 2. 4.

 

 

 


 

강은교 시집 막다른 골목을 사랑했네, 나는

 

 

 

 

 

 

어느 신문 기사에서 강은교 시인은 “한용운은 ‘님의 침묵’이 어느 유명인의 장례식에서 조시(弔詩)로 쓰인 것을 보고 참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시는 한용운이 세속에서 어느 여인과 열애할 때 쓴 사랑의 시고 연애의 시다. 이렇게 이중성과 다중성, 중층성이 있는 시야말로 명시 아니냐”고 이야기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시는 쓰고 싶은 것들이 넘쳐흐를 때 써야 한다는 게 시인의 생각이다. 한용운과 김소월의 시를 대표적이라고 했다. 시인은  “요즘 시 가운데 상당수는 한마디로 ‘징징거린다’는 느낌이다. 시가 메시지를 억지로 던져 주려는 듯하고 비틀어 쥐어짜 나온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시인의 작품이야말로 미문의 교과서, 운율의 절정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나는 요즘도 그의 시를 자주 읽는 편이다.


 


 


그 담쟁이가 말했다


나는 담쟁이입니다

기어오르는 것이 나의 일이지요

나의 목표는 세상에서 가장 길며

튼튼한 담쟁이 줄기를 이루는 것입니다


옆 벽에도 담쟁이 동무 잎들이

기어오르고 있었지만 내가 더 길고 아름답습니다

내 잎들은 부챗살 모양입니다


오늘도 그 사람이 보러 왔습니다.

나는 힘차게 벽을 기어올라갔습니다

그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나를 바라보다가

벽의 어깨를 한 번 쓰다듬고는 떠나갔습니다


나는 부챗살로 벽을 기어올라 갔습니다

주홍빛 아침 해가 내 꿈밭 위에서 허리를 펼 때까지

아아,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담쟁이 줄기가 될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해.



 

 


 

막다른 골목


막다른 골목을 사랑했네, 나는

막다른 골목에 사는 나의 애인을 지독히 사랑했네

막다른 골목에서 늘 헤어지던 인사

막다른 골목에서 만져보던 애인의 손

끝없는 미로의

미래의 단추를 사랑했네


오늘밤은 미로에 갇힌 애인의 꿈을 불러보네

애인의 꿈속을 뛰어다니네

풀처럼 풀떡풀떡 뛰어다니네


사랑하는 나의 애인 사라진 벼랑


아, 숨 막히는 삶

 


 

 

 


혜화동 - 어느 황혼을 위하여 


가끔 그리로 오라, 거기 빵들이 얌전히 고개 숙이고 있는 곳, 황혼이 유난히 아름다운 곳, 늦은 오후면 햇살 비스듬히 비추며 사람들은 거기서 두런두런 사랑을 이야기한다,

그러다 내다본다, 커다란 유리창으로 황금빛 햇살이 걷는 것을, 그러다 듣는다, 슬며시 고개 들이미는 저물녘 바람 소리를


오래된 플라타너스 한 그루 그 앞에 서 있다, 이파리들이 황혼 속에서 익어간다, 이파리들은 하늘에 거대한 정원을 세운다,

아주 천천히 날아가는 새 한 마리, 실뿌리들은 저녁잠들을 향하여 가는 발들을 뻗는다


가끔 그리로 오라, 거기 빵들이 거대한 추억들 곁에 함초롬히 서 있는 곳

허기진 너는 흠집투성이 계단을 올라간다

이파리들이 꿈꾸기 시작한다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라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서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의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나부끼는 바람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 위의 아침 햇빛이 꿈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 위의 반짝이는 소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시인 강은교(1945 ~ ) :

 

함남 홍원 생. 출생 후 100일만에 서울로 이주. 1964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졸업 1968년 연세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68년 9월 [사상계(思想界)] 신인문학상에 <순례자의 잠>이 당선 등단, 1970년 [샘터]사 입사, 김형영, 정희성, 임정남 등과 등과 [70년대] 동인으로 활동, 1971년 첫 시집 <허무집>을 [70년대] 동인회에서 간행. 1975년 산문집 <그물사이로>(지식산업사), <추억제>(민음사) 간행. 현대문학상(1992), 소월시문학상(1994), 제2회한국문학작가상(1975), PSB문화대상(1997), 정지용문학상(2006) 등 수상. 1983년 이래 동아대 국문과 교수.